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8.00
Description
“시공을 점묘(點描)하는 타자의 집”
박성현의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2009년 『중앙일보』로 등단한 박성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가 ‘시인수첩 시인선’ 39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뚜렷한 병명(病名)을 찾지 못한 채 응급실에 실려 가고 큰 수술도 받았지만, 아픈 내색 없이 항상 웃는 얼굴로 주변의 궂은일에도 선뜻 나서는 성품에 시단 선후배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다.
종로에서 태어나 종로에 있는 직장을 다니는 서울 토박이인 시인은, 저녁 이후에는 시를 쓰지 않고 낮 시간을 쪼개 시를 쓰며, 도시인들의 비좁은(?) 표정을 읽고 그 느낌을 문장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자신의 시가 건조하고 차갑다고 말하는 박성현 시인은 첫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2018)에서 “가상현실로의 산책”(장은석)을 선보인 바 있으며, 이번 시집에서는 “복안(複眼)에 포착된 다면과 사태의 다각성”(조강석)으로 빠르게 미끄러지며 기존의 시 문법을 한 번 더 뒤틀고 있다.
요컨대, 박성현 시인이 첫 시집의 ‘입체파 춘자’를 통해 주목했던 시공의 ‘뒤틀림’과 ‘균열’은 ‘주체-의-없음’이라는 반(反)-자본주의적 미학의 극단을 파생하면서 현대인들이 겪어야 하는 착란과 현기증, 히스테리로 요약되겠지만, 두 번째 시집은 ‘춘자’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두꺼운 유리벽을 걷어내는 방식으로 타자를 확장한다. 해설을 맡은 조강석 평론가의 문장처럼 “시의 붓이 새겨 넣은 타자의 영역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웅숭깊은 집”이 바로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에 포진된 내력과 깊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등단 때부터 보여 준 시인만의 독특하고 낯선 방식으로 독자들이 “박제화되어 가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내면을 섬세하게 점검하는” 할 수 있는 미적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선정 및 수상내역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저자

박성현

2009년『중앙일보』등단.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수혜(2013)
세종도서교양부문선정(2018)
〈한국시인협회젊은시인상〉수상(2019)
우수출판콘텐츠선정(2020)
서울교대출강
시집으로『유쾌한회전목마의서랍』(2018)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내몸으로기우는저녁이쓸쓸했네
저녁이머물다
속초
쓴맛
밤새서리가내리다
수선화
멀리갔던새가나를비집고들어왔다
맨발
팽목
그리운그랑블루
희고간결하게
늦은저녁이찾아왔다
우체국
빙하기
하염없이
가을무렵악기한소절

2부|당신의몸에바람이파고든흔적이있다
흰눈
얼음눈물

화분
검정은멀리갔을까
세한도,봄꿈
나의유일한행성
거미별
나와말라리아와늙은난쟁이의사
종이인간
발목과의지
새와의지
열일곱개의나무계단이있는집
그림자의회화와춤
밤의휘장과노래

3부|사물의영역
물방울을뜯어내면-사물의영역?1
흔해빠진유령-사물의영역?2
유령소나기-사물의영역?3
서핑보드-사물의영역?4
아직희미하게보인다-사물의영역?5
1985년에티오피아우표-사물의영역?6
하,춘화(春畵)-사물의영역?7
밤새지랄이다-사물의영역?8
1976년검은달-사물의영역?9
개미가끓었다-사물의영역?10
무진-사물의영역?11
서울의낮은언덕들-사물의영역?12
왕국의우물과시계태엽-사물의영역?13
사마르칸트-사물의영역?14
중국식목각인형-사물의영역?15
악몽-사물의영역?16
시청이있다-사물의영역?17

4부|나다와저녁이걸어간다
국립극장
세상의끝,딜런
출생증명서가필요해-시청이있다?1
북문3층12호실-시청이있다?2
우리는설계자가아니야-시청이있다?3
왓슨
요른
출애굽외전
창과라
카페뮐러
그물과의지
정오의눈부신빛
봄날의허밍
바라보다

해설|조강석(문학평론가)
타자의집

출판사 서평

‘정동적동요’의영역,시선과경험의경계를지우다

박성현시인이바라본첫번째‘타자의집’은3인칭관찰자의시선으로시작한다.이른바‘엽편소설’의형식을취하면서서사의유입을허용한다는말이다.하지만어느순간시인의문장은그경계를지워버린다.마치F.베이컨이인간의육체에서지워버린‘인간성’처럼말이다.이른바‘정동적동요(affectivefluctuations)’로요약되는첫번째그룹의시편은3인칭소설처럼파국이진행중인사건을다룬다.물론시를읽는독자들은작품속의시선이숨은1인칭(시인)이라는사실을알고있지만,박성현시인은지배적정서의표현에서자유로울수없는1인칭화자를최대한배제한채마치시계(視界)의주재자인양화면을부려놓고여기에파국을던져놓음으로써‘정동적동요’를일으킨다.이러한방식이라면‘세상의모든타자들’이시야에포착될수있다.

신이만든세상은적절하고신비로웠으며매혹적이었다그는만족해하면서스타벅스로가에스프레소를주문했다며칠후신은자신과똑같이생긴아담을만들고아담이외롭지않도록이브를만들었다여기까지는다아는얘기다

(……)몇명의아담과이브를추방했는지모른다날이갈수록신은능숙해졌다9월이지나고12월이다가왔다거실에앉아뉴스를보는데한강에신원불명의벌거벗은시체두구가떠올랐다는소식이들려왔다신은갑자기눈물을흘리기시작하더니같이작업하던왓슨에게설계를미루자고제안했다한참후신은스타벅스에서에스프레소와샌드위치를주문하고달빛이은은히내려앉은창가에오래앉아있었다옛날에도그랬다
-「왓슨」부분

B.C.954년시바가눈을떴다천년을먼저깨어났다별자리가뒤바뀌는뒤숭숭한일기가계속됐다별의색과운행을바라보는자의눈도사원의어둠과엉키기시작했다사람들의머리는뱀을닮아갔고,목과등에도뱀이새겨졌다봄의별은빠르고겨울의별은모호했다제사장은모든죽음이왕국의우물에서시작할것이라말했다불안은징후로나타났다(……)여기까지가인도와이집트와이스라엘이똑같이기록하는역사다그러나출애굽외전은이렇게덧붙였다:“남자와남자가아닌것들이먼저출발했으나지금까지누구도시온에도착하지못했다”
-「출애굽외전」부분

‘사물의영역’,시공을점묘(點描)하다

『내가먼저빙하가되겠습니다』가집중한‘타자의집’의두번째형식은‘사물의영역’이다.글자그대로사물을시야의중심에놓고그내력을살펴보겠다는것이다.시집3부에배치된시전체가‘사물의영역’을부제로하고있다.문장의지향도‘시청’을중심으로그반경에놓인‘아케이드’의화려한모습과박물관에전시된‘몰락한왕국’의쓸쓸한풍경을비롯해시인개인의경험의영역에서신화나혹은무속으로변용되는흔치않는여러사건들이다.거듭해서읽으면마치시간을여행하는급행열차를탄듯한느낌도받는다.시공을점묘하듯써내려간문장과3인칭에서1인칭으로의급격한전환과몰입때문인바,이것이두번째형식의특이점이다.

당신은중국출장중에목각인형을사온다중국식무덤에서자주발견되는손바닥만한목각인형이다그인형은진시황의토기병사들처럼생매장됐으며매우고약했던식인풍습의흔적도묻어있다(적어도품질보증서에는그렇게적혀있다)모두구체적이고생생한표정을짓고있어마치“식당에서저녁먹고있었어요”라고말하는듯하다그렇게끌려온사람들을아틀리에어디쯤놓을까고민하다가당신은테디인형가랑이사이에목각인형을놓았다롯데가잠실한복판에거대한종유석을건축한이유와같다

(……)

당신은집에돌아오자마자바로아틀리에로간다오른손엄지로중국식목각인형을쓰다듬는다황홀해서눈을뗄수없다산것과죽은것도아닌,이흔해빠진유령들에게가족과같은유대감과놀라운청교도적사랑을느끼는것인형이불타버리는악몽을꾼다음날불안한당신은국가기록물보관소에가서그의증명서를신청한다국가는국민의출생만증명한다고공무원이말한다그리고,“장난감등록은3층소관입니다”
-「중국식목각인형-사물의영역ㆍ15」부분

목각인형하나가집안의‘아틀리에’에놓이자이인형은이내사위를장악한다.“진시황의토기병사들처럼생매장됐으며매우고약했던식인풍습의흔적도묻어”있는듯한이인형은‘잠실한복판에놓인거대한종유석’처럼집안의‘아틀리에’를장악하고그주인에게“가족과같은유대감과놀라운청교도적사랑”을선사하기도한다.그리고시가이대목에서끝이났다면한바탕소동에불과했을이사물의영역에의‘틈입’은마지막대목에이르러예기치않은귀결을맞는다.역사와결부되었을지모를‘일화’를지닌인형이라면공적기록물보관소에등록되어야마땅하지만인형의존재증명서신청에대한답은“장난감등록은3층소관”이라는말이다.내력을보지못하는이들에게사물의영역은어디까지나소관영역밖의일인것이다.

‘당신의영역’,‘타자’로‘나’를사유하다

마른볕에당신이고여있었다뜻밖이라한걸음에달려갔지만당신은꼭그만큼물러났다볼수만있고닿을수없어마음만우둑했다볕은숲을흔들면서꽃가루를날렸다북쪽으로떠나는철새처럼크게휘어지고출렁거렸다하늘이노랗게덧칠되다가물에씻긴듯맑아졌다너는어디를보고있냐는당신의옛물음같았다나는소리가없으므로가만히바라보기만했다한참을바라보는데그만몸이무너졌다
-「바라보다」전문

세번째형식은바로‘나’와‘타자’의관계에대한발화다.시집에실린상당수의시에서가장큰지대를차지하고있는것은바로‘당신’의영역이며,그만큼‘나’와‘당신’이맺는관계의특수성이고스란히새겨진시들이많다.시집맨마지막작품인「바라보다」는“볼수만있고닿을수없”는자리에“당신”이있다고말한다.“당신이고여있었다”라는,시간적경과가깃든표현으로‘당신’을그리는마음이어제오늘의일이아님을알수있다.
뿐만아니라이시집에는‘엽서’,‘빙하’라는단어가많이등장하는데,“우체국에서엽서를잔뜩샀다밤마다종이배를만들었다주소가없으니가라앉을뿐이었다”(「팽목」),“내가먼저빙하가되겠습니다그두껍고어두운곳에서당신을녹일햇살의울음을기다려야겠습니다”(「빙하기」)에서볼수있는것처럼이는“볼수만있고닿을수없”는곳에있는‘당신’에대한‘나’의심리적이정표들이다.이형식의시들에서는‘당신’에게다가가지못하고바라볼수밖에없게하는거리일지언정바로그거리를붙들고자하는바람을‘나’가직접적으로표현하고있다.

엽서를쓰고우표를붙였다
짧고가는문장이두줄로포개져있었다
읽을수있을까,이비틀거리는
새의말을쓸쓸한발톱이휘갈겨쓴
마음의잔해들을
정류장에서버스를기다리다가
버스에서내린사람들을따라갔다
가다멈추고공원근처
가까운편의점에서생수와빵을샀다
벚나무아래나무의자에는녹지않은눈이가득했다
녹을수없는눈과
녹지않는눈의차이는무엇일까
나는엽서를꺼내그두줄의문장에서
희고간결한새를꺼내날려보냈다
-「우체국」전문

“녹을수없는눈”과“녹지않는눈”의차이를묻는다는것은당신에게다가가지못하는‘현상’과당신에게다가가고자하는‘의지’의경계를가늠해보겠다는것이다.우체국에서엽서를보내는대신이두문장에서“희고간결한새를꺼내날려보냈다”는것은현상과의지의교환을삶의태도로수락했다는것을의미한다.이시집에서가장뛰어난대목중하나가바로이“녹을수없는눈”과“녹지않는눈”사이에서깃을펴는“희고간결한새”이미지라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