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씻다 (이선식 시집)

귀를 씻다 (이선식 시집)

$8.00
Description
시어(詩魚) 잡는 어부, 신(神)의 꽃을 탐하나?
-이선식의 『귀를 씻다』
시인수첩 시인선 41번째 책이자 2020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선식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귀를 씻다』가 출간되었다. 199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여 12년 만에 출간한 첫 시집 『시간의 목축』(2011)에 이어 다시 10년의 시간을 보내고 두 번째 시집을 엮게 되었다.
첫 시집에서 오랫동안 축적해 온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줬다면,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 시인은 시의 원형을 찾아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험을 시도한다. 이선식 시인에 따르면 꽃은 신(神)들이 쓴 시(詩)이며, 신이 신발을 신고 간 바람에 맨발로 꽃들을 밟고 절며 절며 걸어와 몇 날 며칠 꽃불 난 발을 앓은 시인의 걸음에서 피어난 것이 바로 속세의 시다.
이선식 시인은 드문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키리조트 설계사다. 1997년도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열렸던 전북 무주의 경기장과 2018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강원도 평창의 다운힐경기장 모두 그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20여 년 동안 해오던 사업을 접고 5년 전에 고향인 강원도 양구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으며, 허름한 농가 한 채를 리모델링하는 데 3년째 혼자 매달려 쩔쩔매고 있다. 난다 긴다 했던 건축설계사지만 정작 자신만을 위한 작은 공간이어서 손이 느리고 더욱 마음이 쓰인다고 한다. 아직도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이 집의 이름이 바로 ‘세이헌(洗耳軒)’이다. 귀를 씻는 집, 시집의 제목도 이 이름을 따라 막판에 바뀌었다.
시인은 고향에 내려가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도 굽고, 클래식 기타도 연주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시를 쓰기 위한 감각의 민감도를 높이려는 훈련이라는 것이다. 시를 위해 삶을 꾸려 가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집 작품 전체에서도 이선식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경건성과 진성성이 잔뜩 묻어난다.
저자

이선식

강원양구출생.1999년『월간문학』신인상으로작품활동시작,시집『시간의목축』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어린목동
자기앞의생
하루
신화(神話)
나무와광부(鑛夫)
흰죽같은말한술
백년만에내리는눈
까마귀공회당
수탉
오후
비를맞는문장들
가난
관중(貫衆)
봄은어떻게오는가

2부

사랑의인사
파안대소
문장채집
길잃은바람
물길내던할머니
바람의정석
생산적인너무나생산적인
월명리(月明里)
슬픔의총량
귀를씻다
꽃을심는이유
여우에게
물뱀이강을건너간날
나들에게보내는안부
슬픔이찰랑찰랑

3부

무죄(無罪)
빈의자
너와나의우산
쪽동백나무에게청혼하다
이사
숙취(熟醉)
그리운쥐를찾아
나무와봄비
주문진
적멸(寂滅)
애인
물방울신부(新婦)
별빛편지
라면을끓이며
자동세차기
상류층시인-서정춘

4부

휴일
내마음의초가
똥둣간에서
아우에게
목마른영가(靈駕)를위하여
무수한입
난산(難産)
천진항
최초의여행
마중
춘천
섭농(攝農)
돌아오지않는여행(旅行)
까마귀
눈길

해설|이승우(소설가)
시,신이쓴사랑의편지
-이선식의시집『귀를씻다』

출판사 서평

‘신’과‘사랑’과‘편지’라는시의기원을찾아서

하늘의신이빛이라불리는투명한작대기로
“눈을감아도그리운얼굴이명멸하여
수백페이지불면의밤은한권의서책이되었소
그대집앞
은하수건너는나무다리난간위에올려놓았으니
가져가심심한날펼쳐보시오”
라고대지위에끄적거려놓았다고한다
우린그연서를꽃이라부른다
꽃은신(神)들의시(詩)이다

속계의어느시인이봄산에올라
여간해선눈에띄지않는다는시어(詩魚)*를찾아
꽃포기를뒤적거리다가
신발을벗어놓고그만잠이들었다

그때마침붓을들고시를써내려가던신이
꽃잎가마같은물건을발견하고
슬쩍발을넣어보았다
넣어보니구름신발하고는또다른느낌이라
그냥신고가버렸다지
맨발이된시인은꽃들을밟고절며절며
마을로내려와몇날며칠꽃불난발을앓았다
그런일이있은후그의걸음걸음마다
백치의시가피어났다는이야기가전해온다

*죽은시어(詩語)말고살아서펄떡펄떡뛰는시어(詩魚).
-「신화(神話)」전문

시「신화(神話)」에서‘꽃은신들이투명한작대기로땅위에끄적거린연서’라는표현은시인이꽃에보내는최고의찬사다.시인은이시에서뿐만아니라시집의여러작품에서꽃을신성한위치로떠받들고있다.“봄눈녹듯세상의채무도사라지는”희망의날은“꽃피는봄날”(「하루」)이고,광부에게꽃은“해마다단한번허락된등불”(「나무와광부(鑛夫)」)이며,노모는“꽃밭을보며열여섯인듯스무살인듯다시환해지는꽃”(「꽃을심는이유」)에비유된다.시「나무와봄비」에서꽃은“모시러가”야하는대상이며,「적멸(寂滅)」이란시에서꽃은스스로어떤의미도되지않겠다선언하기도한다.시집의해설을쓴소설가이승우는이선언을“어떤의미도되지않기위해서는모든의미를넘어서야한다”는역설이라고설명한다.
신이대지위에끄적거린사랑편지가꽃이고시가이데아인꽃을모방한것이라면,시의기원은지상에있는것이아니라하늘,다시말해신의영역에있다.꽃을피우는데,즉시를쓰는데필요한것은‘신’과‘사랑’과‘편지’다.이는지상의모든시가꽃을이루는3요소인신과사랑과편지를떠나서는쓰일수없다는암시와같다.적어도이선식시인은그렇게믿고있으며,그만큼시를신성시하는시인의자세를엿볼수있는대목이다.


살아서펄떡펄떡뛰는시어(詩魚)를기다리며

『시인수첩』2020년겨울호에실린‘시론에세이’에서이선식시인은궁극적인시에다가가기위해여러가지비문학적연습을수행하고있는데,요즘은주로‘시어(詩魚)’만드는일을시도하고있다고밝혔다.시「신화」의주석에서“죽은시어(詩語)말고살아서펄떡펄떡뛰는시어(詩魚)”라고언급했듯이시인은‘시어(詩魚)’가초월적인물고기의모습을하고있을거라는상상과짐작으로그형상을표현하다보면어느순간금시초문의시어를만날지도모른다는믿음과기대를갖게된다고고백한다.시인에게시를이루는시어란생명을가지고있는데다가,보기도얻기도어려운것이다.이러한어려움은「문장채집」이라는시에잘드러나있다.

속초북쪽바닷가에문장채집을나갔다가
뒷골목초라한난전에서만난좌판바구니에
매혹적인꼬리만살짝보이는문장을발견하고
노파에게물었다
그문장은얼마요?
이것은돈으로사고파는물건이아니오
대답이돌아왔다
그럼어찌해야얻을수있단말이오?
이영물은자신이숨쉴곳을스스로안다오
곤한잠의어둑새벽소리없는부름을듣는혼의촉이라든가
마음이란연못에살다떠난물고기가그려놓은영선(泳線)을보는눈과
별들의독백을청음할수있는귀를동시에가진
선험이성립되는순간시공을초월해그곳에나타난다오
그순간은아주짧아서별이눈깜박하는찰나의섬광같은것이라오
준비되지않은이는알수도없거니와놓치기일쑤지요
-「문장채집」부분

‘문장’을채집하기위해속초북쪽바닷가로간화자는“뒷골목초라한난전에서만난좌판바구니에/매혹적인꼬리만살짝보이는문장”을발견하고이신비한존재인‘문장’을어떻게얻을수있느냐묻는다.그러자“이영물은자신이숨쉴곳을스스로안다”는대답이돌아온다.‘시어’와‘문장’을보기어렵고채집하기어려운것은그것이살아있기때문이다.살아있는것의존재방식은변화무쌍,예측불허다.게다가시어와문장은채집되는것이아니라저스스로숨쉴곳을알고찾아온다.시인이할수있는일은시어와문장을채집하는것이아니라“자신이숨쉴곳을스스로”알고찾아오는문장을맞이하는것뿐이다.즉문장이스스로찾아오도록하고맞이할준비를하는이가시인이다.“별들의독백을청음할수있는귀”,“마음이란연못에살다떠난물고기가그려놓은영선(泳線)을보는눈”,“곤한잠의어둑새벽소리없는부름을듣는혼의촉”이바로이선식시인이제시하는준비목록이다.
눈과귀와촉감으로는볼수없고들을수없고만질수없는대상을보고듣고만질수있는신의감각이촉발하는건“별이눈깜박하는찰나의섬광같은”순간뿐이다.이선식시인은시어와문장이찾아오는순간을찰나에비유함으로써그런감각이항구적소유의영역이아니라일회적촉발의사건임을말한다.시인자신이손에넣었거나가지고있는것들이아닌,스스로찾아오는것들을맞이하여시를쓰기때문에시인의시작(詩作)은‘섭농(攝農)’이된다.

어떤날은밤나무가툭던져주고
어떤날은까마귀가까치가직박구리가
시(詩)를물어온다
어느날은깨진항아리가울음울어시속에수련이피고
어느날은늙으신어머니가
옜다받아적어라케케묵은골동구럭을푼다
알고보면나의농사는내가짓는게아니다
매사어설뱅이인나를불쌍히여겨
주변들이섭농(攝農)을해주는것이다
이아름다운인연보시
어느생어느인연들이
이승의저물녘푸새고랑에찾아와
김을매주고가는것이다

삼라(森羅)에빚이많다
-「섭농(攝農)」전문

이선식시인이생각하는시인은자신이가지고있는것을부리는자가아니라주어질것을기대하고기다리고준비하는자다.이선식시인은“나의농사는내가짓는게아니”라고,“밤나무”가,“까마귀가까치가직박구리가”,“깨진항아리”와“늙으신어머니”가던져주고물어다주고울어주고풀어준것이라고말하면서자신의시작(詩作)이‘섭농’이라고고백한다.언어로구현되지못한시어와문장을찾아미지의숲으로들어간시인의시를향한경외감과열망이엄숙하게까지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