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도유호 (한국 고고학 첫 세대 | 양장본 Hardcover)

하담 도유호 (한국 고고학 첫 세대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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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굴포리 구석기유적을 발굴하고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였지만, 북으로 간 것 때문에 잊혀진 고고학자 하담 도유호의 삶과 학문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하담 도유호』.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고고학 개론서인 《조선 원시 고고학》을 저술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 고고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저자 한창균 연세대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개설서인 도유호의 《조선 원시 고고학》이 남쪽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현실이 안타까워, 1994년 그 복간본을 내는 데 관여하면서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이자 선학으로서 도유호의 삶과 학문을 자리매김하고자 결심하고, 국내외에서 관계된 모든 자료를 섭렵하며 10년 가까운 세월을 이 책에 투자했다.
저자

한창균

저자한창균은연세대학교사학과졸업,동대학원문학석사.
파리6대학교박사(선사고고학)
현재연세대학교사학과파른기념교수,연세대학교박물관장

저서|『북한의선사고고학①구석기시대와문화』(1990,편저),『북한선사문화연구』(1995,공저),『북한고고학미술사용어집』(1996,편저)외

목차

글을시작하며:도유호를읽으면북한고고학이보인다
감사의글

1부청년학도도유호

함흥출생의독학篤學청년
도정호都定浩와도유호都宥浩
도유호의가계家系와함흥영생학교시절
휘문고등보통학교와경성고등상업학교
유럽유학의길에오르다
경성京城에서프랑크푸르트佛郞府로
독일유학생활
그늘밑에한송이장미꽃!
민족문제그리고춘원이광수
그러나아직나로서는춘원이너무나가깝습니다
박사학위논문통과
프랑크푸르트대학佛郞府大學에서비엔나대학維也納大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청구기호951.9-D631p
박사학위를받고나서
문화권설과비엔나학파
비엔나학파와문화사고고학
도유호와비엔나학파

2부귀국과해방공간

만록총중일점홍滿綠叢中一點紅
비엔나維也納에서경성京城으로
도유호의귀국소식
비엔나그리웁다!하담荷潭도유호
제비제비날아간다
국내학자들과의갈등,그리고잃어버린행동의자유
비엔나에서귀국이후의학문활동
도유호의변증법적발전사관
일본으로출국,그리고귀국
해방공간의정치적격동기:민주주의민족전선,인민당,남조선공산당
제3의길을찾아서
정치활동과인민당프락치

3부도유호와북한고고학(1):1940년대후반~1950년대초반

북으로간도유호
1946년10월20일,김일성대학교원으로채용결정
고고학강좌장:도유호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의발족과도유호
『문화유물』간행과북한학계의동향
한국전쟁이전의유적조사와발굴
한흥수에대하여
유럽유학이전:유물사관그리고조선적특수성론
프라이부르크대학(스위스)에서박사학위를받다
해방공간과입북
도유호와한흥수의학술논쟁
한흥수의논문,논쟁의빌미가되다
도유호의반론:변증법적발전사관,문화권설,유물사관
논쟁의핵심줄거리
한흥수의재반론:민속학연구의당파성문제
논쟁이후의한흥수
한국전쟁과도유호
통역장교,인민군소좌도유호
전쟁으로훼손된고고학자료

4부도유호와북한고고학(2):1950년대중반~1960년대중반

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장,도유호
회령오동유적발굴참가
조선의원시시대도전세계사적범위에서연구하여야한다
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설립(1956년3월2일)
원시유적과유물의연구
나선초도유적(1949년발굴)
온천궁산유적(1950년발굴)
봉산지탑리유적(1957년발굴)
회령오동유적(1954~55년발굴)
이제조선고고학은새로운자신의길을개척했다
조선거석문화에대하여
고고학유적,유물에관한새로운용어정리
『조선원시고고학』간행
도유호동지에게국가박사학위수여(1961년4월)
장덕리털코끼리유적의발굴:고고학,지질학,고생물학의합작
강좌:빙하기,인류의기원,구석기란무엇인가
굴포리구석기유적과도유호:뜻이있는곳에길이있다
토론과논쟁의시대
삼국시대의사회경제구조에대한문제
고조선문제
초기금속문화의기원문제
고구려석실봉토분의기원문제
운명의갈림길
1962년이전의상황
1963년이후의변화

글을마무리하며:도유호는떠났지만그의학문은우리와함께있다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한국고고학첫세대이자,잊혀진학자도유호의삶을복원하다!
이책은우리에게도잘알려진굴포리구석기유적을발굴하고한국고고학의선구자였지만,북으로간것때문에잊혀진고고학자하담(荷潭)도유호(1905~1882?)의삶과학문을평전형식으로재구성한것이다.
도유호는함경남도함흥출신으로일제강점기,유럽유학,해방공간,월북과같이복잡한시대적여건을두루겪은지식인이다.그는해방이후한국최초의고고학개론서인『조선원시고고학』을저술한학자로널리알려져있으며,1940년대후반부터1960년대중반까지북한고고학을주도적으로이끌었던대표적인인물이다.그는함흥영생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를졸업한다음중국북경의연경대학을중퇴하고유럽으로유학을떠났다.독일프랑크푸르트대학을거쳐오스트리아비엔나대학에서철학박사학위를받았다.
도유호가독일로유학을떠났던가장큰동기는일제강점기라는식민지적상황에놓여있는민족문제와관계있다.유럽유학중그는민족문제에대한자신의뜻을서신에담아김명식,주요한,이광수등에게보내기도하였다.프랑크푸르트대학재학당시독일은나치스정권이세력을확장하는험난한정치적상황에놓여있었다.이러한분위기에서그는오스트리아비엔나대학으로학적을옮겨,유럽에서한국사에관한주제로박사학위를받은최초의인물이되었다.학위논문에서그는통사적인체제를유지하면서문화적맥락속에서한국사의전개과정을파악하려고하였다.
박사학위를받은이후에도도유호는귀국을서둘지않았다.박사학위논문을통하여한국사전반에대한인식의체계를세웠으나,자신의학문세계를넓히고자선사학과민속학분야에또다른주의를돌렸다.그는자신의학문적인꿈을실천하려는목표로비엔나에머물며비엔나학파에서추구하였던문화사적방법론에대하여충분한이해를갖추고자하였다.그러나제2차세계대전발발로,유럽유학생활을접고,1940년초에조선으로귀국하였다.유학당시도유호는일제관헌의감시를받았으며,귀국이후에는자신의학문적꿈을이루어내는데어울리는직장을구하지못하고일본에체류하기도하였다.
해방이후고향함흥에잠시머물렀던도유호는1946년3월서울로와서,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과학자동맹,인민당,조선공산당에적을두며정치적활동에적극개입하였다.비록철저하게무장된마르크스주의자는아니었지만,이같은정치적이력은그가김일성대학교원으로임용되는데요긴한것이었다.1946년10월16일삼팔선을넘어월북한도유호는곧김일성대학교원으로채용되는기회를얻었다.몇차례의우여곡절을겪으며,1947년10월역사문학부‘고고학강좌장’으로임명되었다.북녘에서그의고고학관련활동은이때부터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그뒤‘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와‘조선력사편찬위원회’의위원으로활동하였다.한국전쟁중에는공산군측의통역장교로근무하였고,과학원산하의물질문화사연구소소장을역임하며‘후보원사’로임명되었다.
월북이후(특히정전협정이후),그는북한고고학을앞장서서이끌어가는핵심적인역할을하였다.1956년에궁산유적의발굴보고서를내면서,해방이후처음으로신석기시대의편년체계를확립하고자노력하였다.1957년발굴된지탑리유적의조사및연구성과를바탕으로는당시까지해결되지않은상태에머물렀던신석기시대와청동기시대의상호관계를밝힐수있는결정적단서를찾아냈다.그뒤거석문화연구,철기시대유적의연구등을통하여그는일제어용학자들이조선의식민지지배를정당화시키는수단의일환으로활용하였던이른바‘금석병용기설’의허구성을입증하는데온힘을기울였다.마침내도유호는1963년,오랫동안기다려왔던굴포리구석기유적의존재를최초로확인한주인공이되어북한고고학연구에새로운이정표를세웠다.
1956년부터1963년까지기껏해야7년남짓한기간동안,북한고고학에서는구석기시대부터철기시대에이르는선사시대편년의기본얼개를마련하였다.여기에서도유호의학문적역량은비교할수없을정도로커다란보탬이되었다.이와같은학문적공로를인정받으며그는국가박사로임명되었고,과학원원사라는명예로운칭호도얻었다.그러나그것은개인적으로잠깐동안누릴수있었던짧은영광에지나지않았다.
도유호는고조선의사회경제구조와관련하여김석형으로대표되는역사학계와깊은갈등관계에놓여있었다.당시고대사분야의주요연구동향은고조선사회를노예소유자국가로인정하는데초점을맞추고있었지만,도유호는끝내여기에동참하지않으며자신의견해를고수하였다.학문적인관점의차이로인하여그는유물사관의내재적발전론에기초하여한국고대사의체계를확립하고자했던시대적여건에제대로부응하지못하였다.특히1960년대중반이후김일성개인숭배의전면적확립과유일사상체계의구현이라는정치적격변속에서도유호가줄기차게내세웠던문화이동론은‘부르주아적,수정주의적인반동학설’로낙인이찍혔다.북한원시고고학의체계를세우는데이바지한바가누구보다도컸지만,그는당시사회에회오리친정치적,사상적투쟁에휘감기며북한고고학계에서자취를감추었다.
비엔나학파의문화사적방법론에큰영향을받았던도유호의전파론적인식은오늘날의관점에서본다면적지않은시대적한계를반영한다고볼수있다.다시말해서철저하게전파론적인시각에서한국원시문화의형성및발전과정을해명하려했던그의연구성향은외적문화의요인을지나치게과대평가한측면을지니고있다.그렇지만불모지와다름없는고고학적여건에서한국원시문화의체계를확립하는데공을들였던그의학술적인노력에대해서는또다른점에서주목할필요가있을것이다.유적의발굴과연구,원시문화의전개과정에대한이론적설명,고고학적문화의개념창안(굴포문화,궁산문화),지금도유효하게활용되고있는그의논문과저서,자연과학분야와의합작을통한공동연구,순화된고고학용어의사용등등이그것이다.
이책의저자한창균연세대교수는우리나라최초의고고학개설서인도유호의『조선원시고고학』이남쪽에서완전히잊혀지는현실이안타까워,1994년그복간본을내는데관여하면서한국고고학의선구자이자선학으로서도유호의삶과학문을자리매김하고자결심하고,국내외에서관계된모든자료를섭렵하며10년가까운세월을이책에투자했다.저자가본도유호의역사적자리는“해방이후이루어진한국고고학사의흐름속에서도유호가쌓은학문적업적을되짚어볼때,그는한국고고학의첫세대로서어느누구도비견될수없을만큼진정‘최고봉’에게어울리는역할을다하였다.”는결론으로매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