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이래조선시대의농업사에대한연구방법론은세가지였다.첫째는20세기초일제의사회경제사학자들이주장했던‘정체성이론’과‘봉건사회결여론’이었다.이는처음부터조선봉건사회와그경제적토대로서지주제의‘실재(實在)’를부정하였다.그리고1980년대중반이래이를계승하고있는것은우리나라일부근대경제사학자들의‘식민지근대화론’이다.둘째는1960년대이래우리나라사회경제사학자들이주장해왔던‘내재적발전론’과조선후기경제사연구에서의‘자본주의맹아론’이었다.이는우리나라의역사를,나라안에서일어나는‘계기(契機)의법칙적전개에의해발전해가는것’으로인식하면서도여러계기가운데특히생산력과소유생산관계의대응과모순,그리고그모순의해결방법으로계급투쟁을사회발전의원동력으로삼는데서역사적유물론의연구방법론과크게다르지않았다.셋째는서구역사학계의‘총체적노예제론’으로곧‘식민사학’의밀알이되었던‘아시아적생산양식론’이었다.이는인류역사가시작된이래19세기말까지아시아사회는오직한사람,즉왕만이자유인이고나머지모든인민은노예적존재였다는내용이다.이견해는이미연구방법론에서도기각되어언급할가치가없으리라고본다.
근래에첫째의근대경제사학자들은조선사회가19세기에이르러농업생산력의급격한하락으로존립자체의위기를맞고있었음(‘19세기위기’)을강조하고실증하는데전력을기울이는한편,그실증적인연구성과를계속해서저서로발표함으로써결과적으로는19세기말일제의조선침략에면죄부를주고있고,나아가서‘수탈적식민지배’를‘식민지근대화’라는이름으로정당화해주고있다.반면둘째의사회경제사학자들은우리사회의보수화추세의효과인지그수가줄고있을뿐만아니라1990년대이후에는그연구성과를거의내놓지못하고있다.이런상황에서실로우리사회경제사에서오랜만에나온묵직한역작이바로이조선시대지주제연구이다.
이책의의의는한마디로위의첫째와셋째의‘역사적사실에의해서검증되지않은정치이데올로기적가설’을실증적으로논박한데있다.그리고조선시대의경제를분석하면서근대경제학의분석방법을이용하여도출하고있는근대경제사학자들의연구성과또한또다른허구임을폭로하는데에있다.이로써조선시대사회경제사에대해일제시기의‘식민사학’(정체성이론과봉건사회결여론)이제기했고,1980년대중반이래근대경제사학(식민지근대화론)이제기했던숙제를푼것이다.
저자가조선시대의지주제연구에서다룬주요주제와그내용을정리하면아래와같다.
(1)토지수조권문제:고대중세전시기에걸쳐서국가(전주)와토지소유주경작자(전객)관계(전주전객제)에서관철되고있었던토지수조권(국가가토지소유주경작자로부터전세를수취하는권리)문제이다.그간토지제도사연구에서다루어져왔지만그기원과유래에대해서는밝혀지지않았다.따라서처음으로조선국가의소유주경작자에대한수조권행사,즉전세제도가중국고대의주나라에서시행되었던정전제(井田制)와하은주3대의세법(貢助徹法),즉주자의해석에의하면‘천하통법’이된‘십일세율(什一稅率)’‘경자구일(耕者九一)’에서유래했음을밝혔다.
(2)토지소유권문제:17세기후반부터18세기중반에걸쳐진황처(陳荒處:경지였다가묵혀진진전과공한지등)의기경자(起耕者:처음으로개간하여경작하는자)가누구든지간에그가그기경지를보유하고경작하고있다는것을전제로그의기경지보유가국가의기본법전인속대전에의해서법인(法認:기경자를소유주로한다)되었다.그것은기경자가기경지의사적소유주로서그토지에대해포괄적소유권(이용권임대권처분권)을갖게되었다는것을의미하고,따라서토지에대한사적소유권이일반화되었음을말하는것이다.이로써기경노동이기경지소유의기초전제가된다는것,경작권이소유권의전제가된다는것,노동이소유의기초전제가된다는토지소유권성립의보편적원리가조선시대에도관철되고있었다.
(3)조선전기의농장제:고려말,향리에서신분상승한사족품관과그후예들로서과거를거쳐중앙관계에진출하여조선건국에참여한신진사대부와,조선건국이후15세기후반기까지1세기에걸쳐서거족가문(鉅族家門)출신으로공신이되거나과거를거쳐중앙관계에진출하고이후보수화권귀화한훈신관료층(훈구세력,혹은훈구파),그리고왕실척족과종친등은과전공신전별사전등사전(私田)을지급받거나(사전형농장),진황처해택을개간하거나(개간형농장),장리의사채를이용하거나(사채형농장),그들의신분지위와직권을행사하여민전(民田)을겸병함으로써(권력형농장)농장(農庄田土農場)을조성했다.한편,향촌의재지사족(在地士族:토착사족,품관한량,향리군사등이후의사림파)은상속개간매득등을통해서농장을조성하였다.왕실척족종친과훈신관료층의농장은대부분경기지방에있었고,그농지규모는최소50결이상이었다.
한편,이들농장주들은자기소유의노비와모점은닉한관속공사천,그리고요역군역을피역하고자투속해온양인을압량위천하여노비적농민(농노:비부봉족반인고공솔정협호등)을농경노동력으로확보하였다.그리고이들농장은주로‘양반농장주-노비노비적농민(농노)’관계아래서가작제(家作制)와작개제(作介制)로경영되었고(직영),그일부는‘양반농장주-예속적전작전호농민’관계아래서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로경영되었다.
(4)조선후기지주층의형성과지주경영:전(前)근대의지주는30결(1결=40마지기)이상을소유한소지주,50결이상의중지주,80결이상의대지주로구분되었는데,통상대지주를일컬었다.조선후기지주들은궁방지주,양반지주,서민지주등으로구분되었다.
먼저궁방은18~19세기에40여곳에달했다.그가운데7궁(수진궁명례궁어의궁용동궁육상궁선희궁경우궁)은역사가길뿐만아니라각각소유한궁방전의규모도컸다.이들궁방은임진왜란이후에노전(갈대밭)해택지(연안의습지)니생지(진흙탕)폐제언(폐기된저수지)산림과구릉등을정부로부터절수(折受)하고,궁방이독자적으로자금을대거나인근의부민들과합자해서(이런부민이중답주가된다)수령으로부터인근의민인들을징발받아개간하여장토를조성하거나,정부로부터토지대금을받고민전을매득하여장토를조성했다(예로써장토의규모는수진궁어의궁은2천여결,용동궁은1천여결이었다).이렇게조성된궁방전은서해남해의뱃길을따라연안에서가까운곳에자리하고있었으며,그것의관리기구로‘도장-감관-사음’을두고‘궁방-작인’관계나‘궁방중답주-작인’관계아래서병작반수제로경영되었다.
조선후기의전형적지주는양반지주였다.양반지주는그거주지를기준으로서울의양반지주(경양반지주경화양반지주)와지방향촌의양반토호지주종가지주로나뉘었다.
먼저경화양반은대가명가(누대에걸쳐고관명신을배출한환족문벌가문)와사대부등이었다.이들역시궁방처럼해서지방경기지방호서지방에있었던갈대밭연안습지진흙탕폐기된저수지산림구릉을대상으로입안(立案:개간허가증서)을내고,이를근거로민전을침탈하거나,위세와직권을이용하여수령의지원(개간에소요되는물자와기계,민정역군의개간노동자)을얻어개간하거나,17세기후반부터는민전을매득해서개인장토를조성하였다.특히이들의대토지는호서(충청)내포지방에집중되어있었다.또한호서지방에는공경재상으로있다가퇴거한자들이많았기에이들의장토도많았다.그들경양반지주들은대부분부재지주가되었기에그들의장토에관리인(감관과마름)을두고,개간에동원되었던가난한농민(빈농)이나토지없는농민(無田農民)등을시작전호농민(소작농민)으로삼아서‘지주-전호’관계아래서병작제(타조제도조제)로경영하였다.
한편양반토호지주는품관재지사족의지위를유지하거나,조선후기에고관명신을배출한가문의자손으로서생원진사거나,혹은퇴직관료등으로향촌에거주하면서토지를집적한지주였다.이들역시거주고을의진황처공한지를자기가소유하고있던노비나,불법으로모점은닉하고있던노비적농민을부려서개간하거나,민전을침탈하거나,장리의사채를이용하여민전을뺏다시피사들여토지를집적하였다.그리고이들은시작전호농민과함께병작제경영을하면서도본가가까이있는일부전답은노비와노비적농민의노동력을이용하여가작작개제경영을하고있었다.다만17세기전반기이후에는후자의노동력가운데서노비비부의비중은감소되어갔고,호지집과고공의비중이커져갔다.
종가(종손가문)의지주경영경우,16세기중엽부터각지역과향촌별로조선전기의세족가문과임진왜란이후문벌가문의종가지주들은서원사우를건립하고운영하였다.그리고그것은17,18세기에붕당정치가활발했던요인이되고있었다.이는각서원의학생들이향시(소과)를거쳐생원진사가되었고,그가운데일부는이내대과를거쳐중앙정계에진출해서는서원소재지별지연혈연과서원에서의사제선후배관계,즉학연을매개로하여이합집산하면서당파를결성하고당파정치를했기때문이었다.
이책에서는그중동인(東人)의온상이었던상덕사도산서원을건립한이황가문의종가지주를사례로종가의경영실태를살펴보았다.16세기후반이래동인-영남사림의주축이던이황가문의서원전경영은대지주의경제력을바탕으로서원을건립하고그재산의운영과관리를주관했던영남지방의문벌가문종가지주들의표준이되었다.
(5)서민지주(庶民地主)의성장:조선후기의토지의소유와경영분화속에서일부의자소작상농은농법(견종법이앙법)과작부법(근경법간경법이모작등과상품작물재배)의개량으로향상된농업생산력과시장의발달에힘입어광작(廣作)과상업적농업에전력을기울임으로써부농(富農)과지주로성장해가고있었다.그런데그들은사서나각종기록에서요호(饒戶)부민(富民)들로표현되고있기때문에그실체를파악할수없다.그들이그실체를드러낸것은정부에서진휼곡을마련하기위하여권분원납수직책(勸分願納授職策)을시행하고그들의권분원납실태를기록으로남겼기때문이다.
18~19세기에양인천민농민들이양반신분으로상승할수있는길은납속수직(納粟授職)속량면천(贖良免賤)모속(冒屬)등과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이었다.이가운데노비종모법을제외하고는모두가경제력과밀접한관계가있었다.특히납속수직은요호부민들에게양반신분으로상승할수있는절호의기회였다.더구나그들이권분원납한전곡액수(錢穀額數)에상당하는실직산직명예직등의관직을받는것은양반사회로진출하는것을의미하는것이었고,이를계기로수년간또는평생의군역을포함한각종의역(役)을면제받을수있었다.그러므로그들은권분원납수직정책에편승하여조(租)500석이상을원납해서관직을취득하고자했다.그런데흉년에‘천석군’지주가아니고서는500석이상을원납할수는없었고,따라서500석이상을원납한요호부민이라면그들이바로‘천석군서민지주’였다.‘천석군서민지주’들은본인이2~3차례,혹은2대에걸쳐서조1천석이상,많게는1만석까지를권분원납하여납속직인영직(影職)가설직(加設職)뿐만아니라내외실직의군직까지수직하고있었다.한편,요호부민들가운데는중소지주층이확인되고있는데,그들의평균토지소유규모는30결정도였다.그리고요호부민들의다수는2결정도를자경하는중농이거나,3~4결부터많게는6~7결정도까지를전작하는광농의부농들이었다.
(6)조선시대토지개혁론의흐름:조선후기부터한말에이르는동안토지농업개혁론을제시한유학자사대부들의토지농업농정문제에대한인식과진단은크게다르지않았다.그것은지주제의발달과모순의심화에따른농민층의빈곤과몰락,그리고이러한농민층에대한국가의수조권적토지지배가관철되지못함에따른세수의감소로인한국가재정의고갈이었다.정약용은구체적으로그원인을지적하였는데,첫째,지주계층의토지겸병과전호농민의수탈,둘째,진전모칭(冒稱)의은결(隱結)누결(漏結)의증가,셋째,경계(經界)의문란과양전(量田)의미실시,넷째,결부제에의한토지파악과불공정과세,다섯째,이서배(吏胥輩)들의가렴과중간착복등이었다.한마디로지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