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신, 함께 정치를 논하다 (명대 경연정치의 변천과 그 의의 | 양장본 Hardcover)

군신, 함께 정치를 논하다 (명대 경연정치의 변천과 그 의의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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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경연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보는 중국 명나라의 흥망성쇠!
이 책에 담긴 열 편의 논고는 약 15년 세월에 걸쳐 저자 고(故) 윤정분 교수가 전념했던 명대 경연에 관한 연구들이다. 1984년부터 덕성여대에 재직하면서, 중국근세사 특히 명대(明代) 역사를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강의해왔던 윤정분 교수는 2017년 12월 31일 불의의 사고로 말미암아 영면(永眠)하였다. 이 책은 윤 교수의 제자들이 스승이 생전에 마지막까지 천착했던 명대 경연(經筵)에 관한 글들을 모아 담기로 뜻을 같이 하고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저자의 경연 연구는 중국, 그리고 조선과 같이 유교 이념에 기반을 둔 체제에서 이상적인 정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서 출발하였다. 경연이란 전통 유교국가에서 성학 교육과 정사 협의를 통해 군주의 사적 권력인 ‘가업으로서의 천하(家天下)’에서 ‘공천하(公天下)’를 실현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이며, 사대부들이 추구하는 정치의 이상이기도 하였다. 바른 학문을 숭상하고 이를 통치의 기반으로 삼으려고 하는 군주가 빼어난 성취와 그에 걸맞은 인품을 구비한 신료들과 평생을 두고 학술을 토론하고 배우며 정치를 논의하는 경연이라는 장은 아마도 유교 이념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명대 경연의 역사는 물론 녹녹하지 않았다. 정치의 중심기구로 부상한 내각은 황제 개인의 정치?문학적 자문기구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황제의 일상을 돌보는 환관들과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황권과 신권의 균형에 의한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공천하’의 이상은 일시적으로 모습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제도로서 정착되기는 어려웠다.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혹은 잦은 일탈로 정사에 소홀한 황제에 대해 신권이 견제권을 행사하며 공치를 펼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았다. 문인 엘리트가 주축이 된 신료들 역시 부정부패나 파벌정치의 폐단으로 흐르기 일쑤였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시행한 초기 경사(經史) 강론은 유교주의 통치이념을 표방하는 것과 함께 이를 실현하는 방안으로서, 황실에 대한 교화(敎化)의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경사 강론의 실제적 운영방법을 보면, 주원장이 시행한 경사 강론은 황제 자신의 통치 방향이나 방안, 이에 대한 구상을 배석한 강관이나 대신에게 일방적으로 설파함으로써 황제의 주도권이 매우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이렇게 유교주의 통치이념에 입각한 정사 협의의 실현과 이에 의한 군신공치(君臣共治)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명대 경연제도는 단지 교육 기능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고 군신간의 정사 협의, 즉 유교적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은 제대로 달성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황제의 사적 권력은 어디까지나 성학 교육을 통한 수양이라는 황제 개인의 자율성에만 의존하는 형태로 제약될 뿐이었다.
영락제 연간(1403~1424)의 경연은 북경 천도와 관련하여 ‘감국(監國)’ 등 실무적 황저(皇儲) 교육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후계자 양성에 그 주요 목적이 있었다. 황태자와 황태손에 대한 경연과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황위의 찬탈을 통해 황위에 등극했다는 영락제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수성(守成)의 군주 역할을 남달리 강조했던 정국 구상과 운영이 크게 작용했다.
2부에서는 명대 정치구조의 변화에 따른 경연과의 관계 변화에 대하여 서술한다.
정통(正統) 연간(1436~1449)의 경연은 명분뿐인 제도로만 유지될 뿐이고, 경사 강론에서 이루어진 각신(閣臣)들의 ‘참예기무(參預機務)’를 통한 황권 견제나 정사협의체의 기능은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대와는 달리 경연 교재나 경연개최 시기 등 경연 개최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생략된 채, 경연 담당관의 임명 등 단순히 제도적인 측면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종대에 이루어진 경사 강론의 제도화는 그 이후 황실 교육은 물론이고, 군신의 정사 협의와 정국을 운영함에 있어서 중요한 모델로 정형화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후 황실의 경사 강론은 황실 교육과 군신 간의 정사 협의 등 그 기능과 역할을 어디에다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졌고, 이에 따른 정국운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는 황제가 정사를 등한시하는 가운데, 주요 국사는 대부분 황제 측근인 태감을 비롯한 환관에 의해 농단되는 등 정국은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처럼 군신간의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언로의 개방과 민정의 상달, 경연 개최와 성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조정 대신 및 과도관들의 상소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던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결국 성학 교육과 군신간의 정사 협의, 황권 견제 등 종전의 경연제도 기능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유교적 통치이념에 입각한 이상 정치의 상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내각을 대신하여 언관인 과도관들에 의한 공론 정치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

윤정분

저자윤정분
1952년2월3일경북예천출생.숙명여고,연세대학교사학과졸업.國立臺灣大學校歷史學硏究所석사,연세대학교대학원사학과박사.한성대학교,원광대학교강사를거쳐덕성여자대학교사학과교수로재직(1984~2017)중2017년12월31일영면.
논저로『中國近世經世思想硏究:丘濬의經世書를중심으로』(혜안,2002),『한국여성사연구70년』(공저,한국학중앙연구원,2017)외다수.

목차

첫머리에

1부건국초기경연의시행과정국운영

明代經筵制度와政局運營의추이-洪武(1368~1398)~弘治年間(1488~1505)을중심으로-
Ⅰ.서론
Ⅱ.洪武(1368~1398)·永樂年間(1403~1424)의經史講論과황제독재체제의정립
Ⅲ.宣德(1426~1435)·正統(1436~1449)·天順年間(1457~1464)의내각제와경연의제도화
Ⅳ.成化(1465~1487)·弘治年間(1488~1505)의경연제도와공론정치
Ⅴ.결론

明初經筵제도의배경과그특징-朱元璋의經史강론과군주권강화를중심으로-
Ⅰ.서론
Ⅱ.朱元璋의유교주의표방과제도화
Ⅲ.經史講論과政事자문
Ⅳ.주원장의통치책과군주권강화
Ⅴ.결론

永樂帝(1403~1422)의經筵운영과그특징-북경천도추진과관련하여-
Ⅰ.서론
Ⅱ.황제經筵과영락제의崇儒정책
Ⅲ.영락제의北京遷都추진과皇儲교육
Ⅳ.결론

2부명대정치구조의변화와경연

宣德年間(1426~1435)의經史講論과그특징-宣德初현안문제와宣德帝의정국운영과관련하여-
Ⅰ.서론
Ⅱ.卽位初의현안과經史講論의시행
Ⅲ.宣德年間의經史講論과그내용
Ⅳ.召對강화와宣德帝의정국운영
Ⅴ.결론

正統(1436~1449)·天順(1457~1464)年間의經史講論과정국운영-經筵의제도화와내각제운영과관련하여-
Ⅰ.서론
Ⅱ.正統·天順年間의經史講論
Ⅲ.內閣制와政局운영
Ⅳ.결론

成化年間(1465~1487)의經筵과정국운영-내각제의쇠퇴와科道官體系의성립과관련하여-
Ⅰ.서론
Ⅱ.成化年間의經筵과그특징
Ⅲ.科道官體系의등장과성화연간의정국운영
Ⅳ.결론

弘治年間(1488~1505)의經筵과政局運營-내각제복원과공론정치와관련하여-
Ⅰ.서론
Ⅱ.弘治初(즉위년~2년)「經筵儀注」의제정배경과경연시행을둘러싼논쟁
1.「경연의주」의제정배경과내각제의복원
2.경연시행을둘러싼논쟁과그의미
Ⅲ.홍치3~8년(1490~1495)경연시행의실상과황제중심의정국운영
Ⅳ.弘治8년(1495)이후경연제도의유명무실화와내각수보중심의정국운영
Ⅴ.결론

3부체제위기와‘군신공치’의쇠퇴

正德年間(1506~1521)의정국운영과經筵
Ⅰ.서론
Ⅱ.正德初의政局과經筵
Ⅲ.劉瑾세력의거세와경연의형식적재개
Ⅳ.‘豹房’정치와경연중단
Ⅴ.맺음말

嘉靖前期(1522~1528)‘大禮議’政局과經筵
Ⅰ.서론
Ⅱ.楊廷和내각과경연개시
Ⅲ.‘議禮派’의정국주도와경연중단
Ⅳ.「明倫大典」의편찬과경연파행
Ⅴ.결론

隆慶年間(1567~1572)의정국운영과經筵-‘내각파동(閣潮)’과관련하여-
Ⅰ.서론
Ⅱ.내각파동(閣潮)과융경연간의政局運營
Ⅲ.經筵운영과그실상
Ⅳ.결론

참고문헌
출전
고윤정분(尹貞粉)교수님연보
추모의글
편집후기

출판사 서평

홍치(弘治)연간(1488~1505)은봉건사회가동요되는가운데제반사회의변화상을대변하는사대부들의공론이그어느때보다다양한형태로등장하고있었던시대였다.그럼에도불구하고군신간의정치적공론장인경연에서는이러한당시의공론정치를반영하지못하고,오히려‘조종지제(祖宗之制)’의황제독재체제로복귀함으로써언로의장을제약하였다.당시경연에서는군신공치의‘공천하(公天下)’의실현이라는시대적요구를반영하지못한채,황제의사적권력인‘가천하(家天下)’로회귀함으로써시대의변화상을수용하거나발전적으로반영하지못하고오히려후퇴하였다.이러한홍치연간의경연제도를통해볼때,이른바‘홍치중흥’이란평가는그타당성에있어서재고의여지가있다.
마지막3부는명나라체제의위기와군신공치의쇠퇴과정을다루었다.
명건국후약150년이지난정덕(正德)연간(1506~1521)은명대역사에서정치·사회·경제적으로제반모순이첨예하게표출되던시대였다.정치적으로환관세력의전횡은,이때에이르러유근(劉瑾)을비롯한‘8호(虎)’와‘표방(豹房)’정치에서극에달했다.사회·경제적으로도‘토목의변(土木之變)’이래몽고의지속적국경침략,기상이변으로인한북방의극심한가뭄,그리고남방의홍수등은농업생산력의급격한감소를초래하였다.이로써농민의유민화와도시화등농촌분해현상이심화되었다.이처럼제반모순이그어느때보다심화된상황에서명왕조초기의‘조종지제’와경연제도는해체되기에이르렀다.정덕8년이후에는황제가표방에유숙하면서정사를돌보지않는상태에서황제는정덕8년4월에열린경연에잠시참석하였다.그러나이마저도강독도중에중단되고말았다.따라서그이후로는정덕9년두차례,그리고정덕10년한차례에걸쳐경연개최를명하기도했지만,특히정덕12년이후로는황제가북방과남방순행을강행함으로써월강과일강은당연히중단될수밖에없었다.
가정(嘉靖)연간(1522~1528)은가정제의독단적인정국운영으로황극(皇極)을운운할정도로무소불위의군주로까지언급되었다.이같은정국상황에서,경연은일강에병합되어그개최여부와운영방식은말할것도없고,심지어는강론과교재선택조차도황제와일강관에포진된의례파에의해자의적이고도파행적인형태로시행되었다.따라서이시기에군신공치를이상으로하는조종지제의원형은이미와해됨으로써,군신간의정사협의나황제의사적권력에대한제약이라는경연의취지는더이상발휘될수없었고,경연은단지황제의일방적요구에따라이에응하는문학적자문기능으로전락하고말았다.이로볼때가정연간의경연은대례의정국속에서유교적정치이념을이상으로삼는조종지제의경연이붕괴되었음을반영하는동시에,명왕조개창이래지속되었던예제적(禮制的)국가질서또한근본적으로동요하며,새로운국면으로접어들고있음을예고하는것이었다.
이어진융경(隆慶)연간(1567~1572)의경연은각신들간의갈등과대립이각정치세력의이해관계에따라권력투쟁의양상으로전개된‘내각파동(閣潮)’을빈번하게거치면서,국초에제정된경연의당초취지와목적을실현할수없었다.이것은융경제가정사를돌보지않은채향락에만탐닉하고있었던황제개인의문제점과함께,이로인해야기되는내각중심의정국운영,특히내각수보의권한이지나치게비대해진조정운영시스템상의문제가그원인으로작용했기때문이다.이렇듯융경연간에는황제의리더십이발휘되지못하는공백상태에서,정국운영의권한은자연히내각에집중될수밖에없었다.정국운영의주도권이융경제의친위세력에의해장악되면서,언관을비롯한비판세력이기대하는유교적이념에따른‘조종지제’의복원은좌절되었다.게다가융경4년이후정국은주로고공(高拱)과장거정(張居正)을중심으로하는황제친위세력에의해주도되는상황에서,내각의내분과갈등또한정치적이념이나명분,정책방향을둘러싸고전개되었다기보다는다분히권력투쟁적성격을띠고있었다.이것은황제를중심으로하는정국운영시스템의붕괴인동시에,내각수보를비롯한내각중심의정국운영시스템으로변화하는것을의미하는것이었다.따라서이시기에경연은의례적명분조차그의미를상실할수밖에없었다.

이상에서볼때,저자가보기에명대의경연제도는15세기이후계속조종지제(祖宗之制)가형해화되면서16세기후반융경연간에이르러서는유교적이념에입각한제왕학의학습과정사협의라는기능과그의미조차근본적으로붕괴되었다고할수있다.경연의영향력은성학교육을통한수양이라는황제개인의자율성에만의존하는형태였고한계성을가질수밖에없었다.황제권력의자의성에의존하는군주권의독주는명대정치사의특징이자명왕조멸망의주요원인으로작용하였다.이런점에서명대의경연은군신간의정치적공론장으로서경연이이상적으로시행되고있었던조선시대의경연제도와는차이를보였다.그러나윤정분교수의연구는명조멸망을100여년앞둔1572년까지진행된채,뜨밖의비보로인해중단되고말았다.15년계속된연구의결실을거두고유종의미로마무리짓지못한것이새삼안타깝기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