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토지조사사업,그역사적성격과실상은어떠했을까ㆍ
이책은한국근대의토지제도특히토지소유권의정리과정을분석한것이다.다룬시기는1890년대갑오·광무개혁기부터1910년대일제초기까지이다.30여년간근대토지소유권과토지조사사업문제를꾸준히파고든저자최원규교수의실증연구가돋보이는결과물이다.
저자는한국에서근대국가수립기전국단위의토지조사가두차례시도되었다고한다.하나는대한제국이근대적토지제도수립을목표로추진한양전ㆍ관계발급사업이고,다른하나는일제가한국을식민지로지배하기에적합한토지제도를수립하기위해실시한토지조사사업이다.갑오ㆍ광무정권과일제모두국유지조사와민유지조사라는두단계로토지조사를추진했다.이들은구래의토지권을조사하여‘근대법’으로법인하려한점,이를토대로지가에근거한‘근대적’조세제도시행을전망했다는점에서동일한측면이없지않았다.그러나그목적에서갑오·광무정권은조선국가의‘근대적’개혁기반으로,일제식민지정권은제국주의의자본축적공간으로삼으려했다는점에근본적인차이가있었다.
저자가책에서가장주목한점은일제가국유지조사와토지조사사업에서사정한소유권이당시배타적수준에도달하여그대로조사추인한것에불과한것인지의여부이다.그리고갑오·광무정권의공토조사와일제의역둔토(=국유지)조사와의동질성과차이점을밝히는문제다.갑오정권이추진한갑오승총은공토에서면세조치를철회,무토는돌려주고,유토는결세를부과하고,작인이결세는탁지부에,도조는해당기관에납부하도록한조치였다.그러나유·무토를구분하는일은쉽지않았고,때문에결세가이중삼중부과되어분쟁이제기되었다.분쟁은유·무토의구분에따른소유권문제처럼보이지만,현실은결세증가에따른수조액의수준을둘러싸고제기된것이다.작인납세제는경작권의물권화가보장되어야시행할수있는방안이고,을미사판(乙未査辦)의작인과도조를확정하는작업은그일환이었다.이러한정책은농민군의평균분작론,유길준과이기등의감조론적여론에힘입어추진된것이었다.
광무사검(光武査檢)은무토를유토로환원시키는등의공토강화책,수조액의수준을강화하는방향에서공토를조사한것이다.갑오정권의조사원칙은그대로준수되었으며,이는광무양전사업에서민전으로확대되었다.광무양안에토지소유자인시주와납세담당자인시작을등재한것이그반증이다.그리고지계아문에서는시주에게구문기를회수하고‘대한제국전답관계’를발급하였다.이는한국역사상국가가처음으로토지소유권자를‘공인’하고발급한소유권증명서였으며,여기에토지등기부역할을부여했다.광무양전·관계발급사업은제도적완결성면에서는미흡한측면이없지않지만,구래의관습적용익물권이나경작권을물권으로인정하는가운데시주·시작을조사하고작인납세제를전망한근대적토지조사작업이라할수있다.물론작인납세제는경작권을물권으로인정하는법적조치를취해야했지만,당시는실현되지않았다.1906년에기안된부동산권소관법은임조권을물권으로인정하고등기대상으로삼았다는점에서그단초를연시도라하겠다.
반면일제는한국을식민지로지배하기위한방안으로토지조사를추진하였다.토지조사는일본제국주의의조선지배와일본인지주·자본가의경제활동을고려하여조선의토지제도를일본과다를바없는방향으로구조화하려는데목적이있었다.일제는민유아닌모든토지를국유로선언하고농민의자유로운이용권을박탈한국유미간지이용법과삼림법을공포한다음,공토를역둔토로조사하여근대법에근거한국유지로확정하는작업을시행했다.1907년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을설치하여이일을담당하도록했다.신고제도와청원제도를도입하여이를조사하여조사국의행정처분으로국유로확정하고,원시취득의자격을부여하였다.‘행정처분’은행정관청에게소유권판정의독점권을부여한조치로일제가토지조사를신속하게실시하기위해도입한핵심방책이고,‘원시취득’은이렇게결정한소유권에이의를제기할수없도록한,토지분쟁을일소하기위해마련한법에의한강권적조치였다.
다음으로국유지실지조사는소작인신고제를미끼로역둔토와소작인을확정하고,결(結)+도(賭)를합하여소작료를결정하는등의내용으로역둔토(=공토)를배타적성격의국유지로확정하는작업이었다.또각필지를근대적측량방식으로측량하고장부에등록하는실지조사작업을병행하였다.그결과물이국유지대장과국유지도였다.이를근거로작인을임대차한소작인으로확정하고국유지소작인허증을발급했다.탁지부에서는이와함께혼탈입지와투탁지를환급해주는조치를계속취했지만,여기서제외되어자기권리를빼앗긴관습적용익물권자나사실상의소유권자들이반발하여국·민유분쟁을격렬하게일으켰다.
토지조사사업에서‘행정처분’으로확정된국유지라도분쟁은제기할수있었지만,행정기관스스로오류라고인정하고번복하지않는한,임시토지조사국단독으로민유로판정을번복하지는않았다.저자가조사한김해군과창원군분쟁사례에서는이를찾아볼수없었다.동양척식주식회사의정부출자지도맞물려있어번복하기가쉽지않았으리라짐작된다.일제의국유지조사는수조권적권리를배타적소유권으로,다른용익물권은채권으로정리하는작업이었다.
일제는1910년토지조사법으로민유지조사를계획했다.그러나국유지실지조사를중단하는등여건이악화되자1912년토지조사령을공포하고전토지를대상으로한토지조사사업을시행했다.토지조사에서국유지는통지제도,민유지는신고제도를도입하여시행했다.전자는국유지대장을근거로이미국유로확정된토지를통지한다는의미였다.신고제도는지주가자기토지를의무적으로신고하고,소유권판정은임시토지조사국에서하도록한제도였다.토지신고서는소유권만신고대상으로삼았으며,그결과도지권등관습적용익물권은점차소멸하게되었다.그리고동리,종중,계등구래의공동체는토지소유자로인정하지않았다.이들소유지는공유로취급되어점차해체되기에이르렀다.
분쟁지처리절차는사정전분쟁지심사와불복신청에따른재결의두과정이있었다.전체토지의1/200씩도합1%정도에불과했지만건별로질적편차가심했다.한건이수백명또는여러동리를포괄하는경우도적지않았다.나주영산강유역3개면에서동양척식회사,낙동강유역의김해ㆍ창원에서무라이(村井吉兵衛)·오오이케(大池忠助),만경강유역에서후지이(藤井寬太郞)등일본인대지주가여러동·리를포괄한광대한지역에서주민들과분쟁한사례도있었다.토지분쟁다발지역은일본인이집중투자한전남·경남의농장지대,부산등시가지,큰강하류의개간지를비롯하여전남섬지역과경기·황해도등국유지집중지역이었다.
분쟁지심사에서는국·민유분쟁이65%로압도적이었다.절수사여지를대상으로국유론과민유론이충돌한것이다.김해ㆍ창원등의사례에서보듯,국유지대장에근거하여작성된국유지통지서의필지를대상으로제기된분쟁은통지서대로판정되는것이일반적이었다.고등토지위원회에재결을위해제기한불복신청은신고나입회를하지않은경우,역둔토대장등장부를무시하고통지를하지않아사정대상에제외된경우등이비일비재하였다.때로는신고와통지를했음에도불구하고달리사정된경우도있었다.재결서만보면부실과오류가점철된토지조사라고할정도였다.불복신청을제기한건수를보면,조선인이42%,일본인이36%,국유가21%를차지하였다.불복신청대상이된토지는조선인토지가80%,국유가6%,일본인토지가10%정도였다.사정작업이조선인을위한것처럼보이고,불복신청은사정에서불리한판정으로소유권을상실한일본인과조선총독부가조선인을상대로권리회복에나선듯한모습을보였다.재결결과는국유가22%,조선인토지가46%,일본인토지가39%를차지하였다.조선인토지가절반정도대폭감소되고일본인토지와국유지가대폭증가한것이다.국유지는민유로환급된것도있었지만,조선인토지가국유로재결되어3배이상크게증대되었다.재결과정은식민지지배국가의속성과지배·피지배의민족적이해관계가그대로표현된것이라고할수있다.일제가200년전구양안까지동원한시원적(始原的)판정,일본인지주들의강압적불법행위등을논외로한문서증거,특히구문기보다증명제도위주의판정,일본인지주의입장을반영한개간권과점유권을근거로한소유권판정,수조권적권리를강권적으로적용한소유권판정,관습법에서벗어난일본민법의적용강화등을판정에적용하여이같은결과를초래한것이다.
와다이치로(和田一郞)등토지조사사업담당자와현대의식민지근대화론자는광무사검의공토정책과이를계승한융희년간의역둔토조사작업의성과를비판하고,토지조사사업을공전의민전화,민전의공전화에따른문란을바로잡는작업이라고동일하게평가하고있다.후자는이과정에서민유로의환급이크게증가하였다고분석하기도하였다.이들은기본적으로조선의토지소유권이배타적수준으로발전해왔다는전제아래,소유권을조사하여일본민법적배타적소유권의자격을부여하는과정으로토지조사사업을이해하고,수탈성은전면배제하였다.그러나적어도국·민유분쟁은수조권차원에서추진된광무사검의성과를일제가역둔토조사에서공토를역둔토로등록하고국유지라는배타적소유권의자격을강제로부여하는한편,관습적용익물권을배제하면서본격화되었다.토지조사사업도물권적경작권과같은관습적용익물권이나사실상의소유권을조사대상에서제외하는방식으로해체시키고,수조권적권리(=명목적소유,법률적권리)를포함한소유권을조사하여배타적소유권으로‘법인’화해가는과정이었다.광무양전사업과질적차별성을보였다.
저자가보기에토지조사사업을통해일제는‘법인’한토지소유권에일본민법의배타적소유권의절대성과‘원시취득’의자격을부여하였다.그러나이소유권은식민지국가권력이위로부터부여해준속성때문에그배타성과절대성이그들의정책적결정에따라휘둘릴가능성이상존해있었다.일제는필요에따라소유권을박탈하여이용할수있도록토지수용령을제정하고군사적목적과독점자본의이해에맞추어이를발동해갔다.
일제토지조사사업의역사성을둘러싼‘수탈론’과‘식민지근대화론’의주장들이첨예하게부딪치고있지만,세밀한실증적연구들이뒷받침되지않는논의들은사상누각에불과하다.저자는토지조사사업에대한역사성의부여는보다광범한실증연구들의축적위에서이루어져야한다고본다.자칫지루하게보일수있는이연구작업을저자가지속하는이유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