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성호학파의 자연학 (양장본 Hardcover)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자연학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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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조선후기 과학사상사의 핵심, 성호학파의 자연학이 주자학적 자연학에 대해 심층적 비판을 가하다!
이 책은 조선시기 과학사상사 분야를 수십 년간 연구해 온 구만옥 경희대 교수의 ‘조선후기 과학사상사 연구’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저자가 이번 책에서 다루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사표(師表)로 삼는 성호학파(星湖學派)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학파 가운데 하나이며, 자연학(自然學) 분야에서 가장 풍부한 논의를 생산한 집단이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그의 방대한 저작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과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가학(家學)을 통해 그의 학문을 계승한 여주이씨(驪州李氏) 가문의 자제들, 그리고 성호학파의 일원으로서 그의 훈도를 받은 여러 학자들이 이익의 학문적 성과로부터 지적 자극을 받아 사유의 너비와 깊이를 더해 갔다. 조선후기 과학사상사는 성호학파로 인해 한층 풍요로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자연학에 대한 탐구는 조선후기 과학사상사의 전개 과정을 밝히는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의리(義理)란 천하의 공물(公物)이다!”, “스승을 섬기는 데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일찍이 이익은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후기 사회 현실을 ‘성인(聖人)의 도(道)가 끊어진 세상’이라고 비관하였다. 당시의 양반사대부들이 입으로는 성현(聖賢)의 학문을 담론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우러르거나 존경하는 뜻이 전혀 없고, 오로지 그에 가탁하여 사사로운 이욕(利慾)을 추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그와 같은 양반사대부들은 ‘양묵(楊墨)의 죄인’, 즉 양주(楊朱)나 묵적(墨翟)과 같은 ‘이단’만도 못한 존재였다.
이익을 비롯한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의리(義理)란 천하의 공물(公物)”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무릇 ‘의리’라면 그것은 옛날과 지금의 구분도 없고, 너와 나의 구분도 없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공재여야 했다. 그것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그들의 생각은 주자학 일변도로 흐르는 조선후기의 학문 경향, 이른바 주희와 주자학을 절대화하는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반기를 든 것이었고, 그와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면서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서인-노론 계열의 위선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 기초하여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기존의 경전 주석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기하였다. 주희의 주석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이와 같은 자신들의 학문적 자세가 “스승을 섬기는 데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사무은(事師無隱)’의 의리에 따른 것이지, 일부러 색다른 논의를 만들어 예전의 현인을 능가하려 함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치의(致疑: 의심을 둠)’를 통해 ‘자득(自得: 스스로 터득함)’을 추구하는 성호학파의 학문관은 이와 같은 인식의 기초 위에서 구축될 수 있었다.

“이미 그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옛날과 다르다고 하여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후기 자연학의 전개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핵심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서학(西學)’이다. 서학의 전래에 따라 유입된 새로운 자연지식은 조선후기 자연학의 전개에 지적 자극을 주었고 자연학의 내용과 질적 수준을 제고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서학과 서교(西敎)를 분리해서 사고하였다. 서학에 대해서는 적극적 긍정과 수용의 태도를 보인 반면 서교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서학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시헌력(時憲曆)을 비롯한 서양 과학의 우수성과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과학·기술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정밀해지며, 비록 성인(聖人)의 지혜라 할지라도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역사적 인식과 당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학문적 능력이 서양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적극적 서학수용론을 개진하였다. “이미 그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옛날과 다르다고 하여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이익의 발언은 서학을 비롯한 이단의 학문에 대한 성호학파의 학문적 개방성과 포용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학서를 통해 지구설(地球說), 중천설(重天說), ‘지영지설(地影之說)’[월식론], 세차설(歲差說), 조석설(潮汐說), 수리론(水利論) 등 서양 과학의 여러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주자학적 자연학의 각론(各論)에 대해 심층적 비판을 가했고, 서학의 학문적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였다. 이를 통해 주자학 일변도로 경색되어 가던 당시의 학계 풍토를 비판하였고, 중국 중심의 세계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열었다. 이는 주자학적 자연관을 내재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자연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요컨대 성호학파의 자연학은 자연 사물과 현상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자연인식을 도출할 수 있는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구만옥

연세대학교이과대학천문기상학과와문과대학사학과를졸업하고,같은대학의사학과대학원에서조선후기과학사상사연구로박사학위를받았다.2004년부터경희대학교문과대학사학과교수로재직하고있다.조선후기자연관,자연인식,자연학관련담론을탐구하여조선후기사상사를체계화하는작업에학문적관심을두고있다.
저서로「조선후기과학사상사연구Ⅰ-주자학적우주론의변동-」(혜안,2004),「영조대과학의발전」(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2015),「세종시대의과학기술」(도서출판들녘,2016),「조선후기의상개수론과의상정책」(혜안,2019)등이있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서론
제2장성호학파자연학의사상적ㆍ학문적기초
1.도리(道理)와물리(物理)의분리
2.천관(天觀)의분화와자연천(自然天)의탐구
3.치의(致疑)와자득(自得)의학문관
4.명물도수(名物度數)와불치하문(不恥下問)
제3장서학(西學)에대한인식과수용의논리
1.조선후기서학수용의문제
2.성호학파의서학인식과수용의논리
3.‘존사위도(尊師衛道)’를위한변론(辨論)
제4장전통적자연지식에관한성호학파내부의담론‘기삼백론(朞三百論)’과‘칠윤지설(七閏之說)’에대한논의
1.이익의기삼백론(朞三百論)
2.이익과이병휴의‘칠윤지설(七閏之說)’에대한논의
제5장 새로운자연지식에관한성호학파내부의담론윤동규와안정복의자연학논의
1.세차법(歲差法)
2.서양역법(西洋曆法)과일전표(日躔表)
3.조석설(潮汐說)
제6장전통적자연학에대한비판과새로운학설의전개(1)
1.중천설(重天說)
2.일월식론(日月蝕論)
3.「방성도(方星圖)」와‘수간미곤(首艮尾坤)’론의전개
제7장전통적자연학에대한비판과새로운학설의전개(2)
1.‘지리(地理)’에대한관심과담론
2.지구설(地球說)과봉침설(縫針說)
3.조석설(潮汐說)과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
4.수리론(水利論)
제8장성호학파자연학의특징과학문적지향
1.유자(儒者)의실학(實學):자연학에대한인식의전환
2.물리(物理)에대한관심과박학(博學)
3.수학(數學)과실측(實測)의강조
제9장성호학파자연학의계승과굴절(屈折)
1.성호학파의분기(分岐)와보수화(保守化)
2.성호학파자연학의계승:정약용(丁若鏞)의경우
3.허전(許傳)의천지관(天地觀)과재이설(災異說)
제10장결론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성호학파자연학의특징적요소
성호학파자연학의특징으로다음과같은세가지요소를추출할수있다.첫째,성호학파의학자들은‘명물도수지학’을비롯한자연학분야를유자(儒者)의필수적학문,즉유자의실학(實學)으로파악하였다.둘째,물리(物理)에대한새로운인식에기초하여학문적탐구대상을자연물로확장하였다.물리에대한새로운인식은기존의세계관과인식론의변화에따른결과물이었다.나아가그것은공부의대상과방법에도일단의변화를불러왔다.‘격물치지론’의재해석에따라자연법칙으로서의물리에대한탐구가적극적으로모색되었고,격물의대상역시유교의경전(經傳)에서벗어나자연물로확장되었다.그것은천지만물을포괄하는박학적(博學的)성격을띠게되었다.셋째,학문방법론의일환으로서‘수학(數學)과실측(實測)’의중요성에대한새로운인식의등장하였다.성호학파의학자들은당대천문역산학(天文曆算學)의문제를개혁하기위한방안으로수학의필요성과함께실측의중요성을강조했으며,그연장선에서실측을위한기구로서천문의기(天文儀器)에대해많은관심을기울였다.이와같은인식의전환을통해그들은기존의주자학적자연학의논리적문제점을‘실측’과‘실증(實證)’의차원에서지적하였고,그와는다른새로운자연학을모색하게되었던것이다.

“성대한연회는다시만나기어렵다[盛筵難再].”
뛰어난글재주를지녔던왕발(王勃)은20대초에그유명한「등왕각서(滕王閣序)」를지었다.그가운데“아,명승지는항상있는것이아니요,성대한연회는다시만나기어렵다[嗚呼,勝地不常,盛筵難再]”라는대목이있다.정약용은권철신(權哲身)의묘지명을지으면서정조3년(1779)겨울의이른바‘천진암(天眞菴)주어사(走魚士)강학회’를회상하면서이대목을거론하였다.그것은비단주어사강학회와같은성대한학술모임이두번다시열리지않았다는아쉬움을토로한것만은아니었을것이다.
권철신은이기양(李基讓)과함께장래의성호학파를이끌어갈인재로일찍부터선배들이기대해마지않았던학자였다.그러나권철신과이기양은천주교신앙문제에발목이잡혀선진들의기대에부응하지못했다.정약용이“그또한신유년(辛酉年:1801)봄에죽으니드디어학맥(學脈)이단절되어성호의문하에다시그아름다움을이을만한이가없게되었으니,이세운(世運)은다만한집안의슬픔이아니었다”고한것은권철신의죽음에따른성호학파의조락(凋落)을묘사한것이었다.
이와같은상황속에서성호학파의학맥은안정복(安鼎福)-황덕길(黃德吉)-허전(許傳)으로이어지는계보를통해전승되었으며일련의보수화과정을거쳤다.자연학의측면에서보면성호학파의관련논의는이전의참신성을잃고선배들의담론을답습하는수준에머물렀고창조적활력을보여주지못했다.그것은일종의굴절(屈折)내지변주의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