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통일전쟁의 종식 후 신라 승려들은 어떠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불교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분석하다!
이 책은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7세기 들어 늘어난 사찰 수만큼이나 출가자 수가 증가하였던 점에서 출발하여 전쟁의 종식 후 출가자들은 어떠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신라 불교계를 어떻게 변화시켜갔을까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 연구서이다.
한국고대사 및 불교사 연구의 중견인 박광연 동국대 교수는 이처럼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에 이어지는 신라 사회와 불교계의 변화, 역사의 이면을 이 책에서 밝혀본다.
전쟁의 종식은 전쟁, 이와 함께 하던 굶주림과 전염병, 이로 인한 고통과 죽음, 죽음보다 더 무서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이러한 전쟁의 트라우마를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나라, 왕족이 석가족인 나라라 자처하던 신라에서 불교에 귀의했던 지배층과 지식인인 승려들은 전쟁 와중에,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무엇을 고민하였을까.
전쟁이 종식된 문무왕 후반부터 성덕왕이 통치하던 시기까지, 서기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이르는 이 시기는 뜻밖에도 신라 불교사 연구의 공백기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 금석문도 이 시기 자료가 부족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경덕왕대 불국사ㆍ석불사의 창건은 어떻게 갑자기 가능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의 신라 사회를 불교문화의 신라다운 색깔을 찾아가던 시기라고 정의하고, 찬술문헌, 의례, 신앙대상 등을 통해 이를 설명하였다. 불교 공인 초창기부터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출가승들은 신라 사회의 최고엘리트층이기에 왕실과 정부에서 거기에 부합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고기, 특히 선덕왕 때는 불교계 지식인에 대한 국왕의 의존도가 높았고 그만큼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그렇지만 전쟁 이후에 국가 정책에 따라 출가승의 정치적 위상이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자와 사찰의 수는 차츰 증가하였고, 승려들은 주요한 사회 구성원이었으므로, 이들이 수행한 역할을 파악함으로써 7세기 후반~8세기 전반 신라 불교계의 ‘문화적 지역성’을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신라에는 천재 원효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장안에서 당의 승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불교를 연구하던 많은 승려들이 장안에 남거나 신라로 귀국하여 자신들이 이해한 불교를 설명하는 책을 찬술하였고,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이를 신라찬술문헌이라 명명하고, 그 생산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찬술문헌에서 신라 학승들이 강조한 ‘정불국토(淨佛國土)’가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던 신라인들에게 내려준 처방전이라 해석하였다.
이 시기 신라는 당의 불교문화 유행에 매우 민감하였지만, 유행을 쫓아가진 않았다. 신라다운 방식으로 변용할 수 있는 지적ㆍ정신적 여유가 있었다. 저자는 변화관음에 대한 태도를 예시로 ‘선택적 수용’을 설명하였는데, 신라에서 왜 변화관음의 수용이 늦었고, 현존하는 유물이나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인가 대해 7세기 후반~8세기 전반 국가와 불교계의 관계 및 불교계의 사회적 역할 속에서 찾았다. 아울러 당과 달리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납입하거나 소탑을 새긴 탑들이 적지 않다. 신라 중대의 것으로 황복사지 삼층석탑(중수, 706) 이후 나원리 오층석탑(8세기), 불국사 삼층석탑(8세기 중반)이 있고, 하대의 것으로 법광사지 삼층석탑(중수, 846), 창림사지 삼층석탑(855),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863) 등 수많은 탑과 불상의 명문에서 무구정광다라니가 등장한 점을 특색으로 꼽는다. 저자는 그 이유를 신라에서는 당에서처럼 유교ㆍ도교와 불교가 경쟁하는 양상은 없었으며 공인 이후에 불교계를 사태하는 사건도 없었다는 점과, 8세기 이후 신라가 불국토라는 관념이 형성되고 정착된 데에는 7세기 중반 수용되어 확산되고 있던 정토왕생 신앙과 더불어 정불국토 인식의 영향이 미쳤던 점 등에서 찾는다. 또한 저자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금동사리함」의 명문보다 먼저 작성된 신라의 불교금석문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전륜성왕ㆍ석가족 인식 등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활용했기에 불교식 왕명시대라 불리는 중고기에 왜 신라인들은 금석(金石)에 불교적 서원을 담지 않았을까’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불교에서 유교로, 호국에서 추선으로, 승관제와 종파라는 틀에서 신라 중대의 불교를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이들 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 시기 신라의 불교문화의 실상을 들추어봄으로써 한국 문화의 글로컬리티를 함께 찾아보았으면 한다.
한국고대사 및 불교사 연구의 중견인 박광연 동국대 교수는 이처럼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에 이어지는 신라 사회와 불교계의 변화, 역사의 이면을 이 책에서 밝혀본다.
전쟁의 종식은 전쟁, 이와 함께 하던 굶주림과 전염병, 이로 인한 고통과 죽음, 죽음보다 더 무서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이러한 전쟁의 트라우마를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나라, 왕족이 석가족인 나라라 자처하던 신라에서 불교에 귀의했던 지배층과 지식인인 승려들은 전쟁 와중에,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무엇을 고민하였을까.
전쟁이 종식된 문무왕 후반부터 성덕왕이 통치하던 시기까지, 서기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이르는 이 시기는 뜻밖에도 신라 불교사 연구의 공백기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 금석문도 이 시기 자료가 부족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경덕왕대 불국사ㆍ석불사의 창건은 어떻게 갑자기 가능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의 신라 사회를 불교문화의 신라다운 색깔을 찾아가던 시기라고 정의하고, 찬술문헌, 의례, 신앙대상 등을 통해 이를 설명하였다. 불교 공인 초창기부터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출가승들은 신라 사회의 최고엘리트층이기에 왕실과 정부에서 거기에 부합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고기, 특히 선덕왕 때는 불교계 지식인에 대한 국왕의 의존도가 높았고 그만큼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그렇지만 전쟁 이후에 국가 정책에 따라 출가승의 정치적 위상이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자와 사찰의 수는 차츰 증가하였고, 승려들은 주요한 사회 구성원이었으므로, 이들이 수행한 역할을 파악함으로써 7세기 후반~8세기 전반 신라 불교계의 ‘문화적 지역성’을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신라에는 천재 원효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장안에서 당의 승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불교를 연구하던 많은 승려들이 장안에 남거나 신라로 귀국하여 자신들이 이해한 불교를 설명하는 책을 찬술하였고,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이를 신라찬술문헌이라 명명하고, 그 생산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찬술문헌에서 신라 학승들이 강조한 ‘정불국토(淨佛國土)’가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던 신라인들에게 내려준 처방전이라 해석하였다.
이 시기 신라는 당의 불교문화 유행에 매우 민감하였지만, 유행을 쫓아가진 않았다. 신라다운 방식으로 변용할 수 있는 지적ㆍ정신적 여유가 있었다. 저자는 변화관음에 대한 태도를 예시로 ‘선택적 수용’을 설명하였는데, 신라에서 왜 변화관음의 수용이 늦었고, 현존하는 유물이나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인가 대해 7세기 후반~8세기 전반 국가와 불교계의 관계 및 불교계의 사회적 역할 속에서 찾았다. 아울러 당과 달리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납입하거나 소탑을 새긴 탑들이 적지 않다. 신라 중대의 것으로 황복사지 삼층석탑(중수, 706) 이후 나원리 오층석탑(8세기), 불국사 삼층석탑(8세기 중반)이 있고, 하대의 것으로 법광사지 삼층석탑(중수, 846), 창림사지 삼층석탑(855),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863) 등 수많은 탑과 불상의 명문에서 무구정광다라니가 등장한 점을 특색으로 꼽는다. 저자는 그 이유를 신라에서는 당에서처럼 유교ㆍ도교와 불교가 경쟁하는 양상은 없었으며 공인 이후에 불교계를 사태하는 사건도 없었다는 점과, 8세기 이후 신라가 불국토라는 관념이 형성되고 정착된 데에는 7세기 중반 수용되어 확산되고 있던 정토왕생 신앙과 더불어 정불국토 인식의 영향이 미쳤던 점 등에서 찾는다. 또한 저자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금동사리함」의 명문보다 먼저 작성된 신라의 불교금석문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전륜성왕ㆍ석가족 인식 등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활용했기에 불교식 왕명시대라 불리는 중고기에 왜 신라인들은 금석(金石)에 불교적 서원을 담지 않았을까’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불교에서 유교로, 호국에서 추선으로, 승관제와 종파라는 틀에서 신라 중대의 불교를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이들 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 시기 신라의 불교문화의 실상을 들추어봄으로써 한국 문화의 글로컬리티를 함께 찾아보았으면 한다.
전쟁의 종식과 신라 불교계의 변화 (양장)
$2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