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편 4 : 번역과 주해 (양장)

황극편 4 : 번역과 주해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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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정조의 명령으로 선조에서 영조까지의 조선후기 당쟁을 정리하여 편찬한 당론서!
「황극편(皇極編)」은 조선후기 정조(正祖)의 명으로 선조(宣祖)에서 영조(英祖)까지의 조선후기 당쟁을 정리하여 편찬한 당론서(黨論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선조대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이후 당쟁이 격화되어 분당(分黨)과 반정(反正)이 일어나고, 환국(換局)과 처분(處分)이 반복되었다. 특히 17세기 숙종(肅宗)대 이후에는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정치적 숙청이 반복되었는데, 이에 각 당파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당론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동소만록(桐巢漫錄)」은 남인, 「형감(衡鑑)」은 노론, 「갑을록(甲乙錄)」은 소론의 입장을 대표하는 당론서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조정안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서 가까스로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탕평책을 적극 천명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선조대 이래 각 당파의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정조가 직접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편찬한 것이 바로 「황극편」이다. 따라서 이것은 국왕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당론서와 구별되며, 정조 탕평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론 박세채는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유교의 대표적 경전인 「서경(書經)」을 끌어들였다. 그 「홍범(洪範)」편에 보이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인 ‘황극(皇極)’을 인용하여 황극탕평론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수용하여, 오직 ‘황극’을 통해서만 붕당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붕당론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송대와는 다른 조선의 현실에 근거하여 황극을 내세우면서, 구양수 붕당론을 계승한 주자학 정치론을 완곡하게 부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본서가 ‘황극편’이라는 제목을 채택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극편」은 1572~1772년까지 국왕대별로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전체가 13권인데, 각 권별로 맨 앞에 주요 당색을 밝혔다. 권1~3은 ‘동서’, 권4~6은 ‘서남’, 권7~13은 ‘노소’라고 세로쓰기로 표제를 붙이고, 권3에는 ‘남북’, 권4에는 ‘대북ㆍ소북’, 권6에는 ‘노소’, 권13에는 ‘준탕(峻蕩)’이라고 쓴 작은 글씨를 괄호쓰기로 붙여 놓았다. 이로써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본서에서 거론되는 주요 당색임을 알 수 있다. 왕대별로 보면 권1~권3은 선조, 권4는 선조~현종, 권5~권8은 숙종, 권9~권11은 경종, 권12~권13은 영조대 사건을 수록하였다.

「황극편 4」는 「황극편」 권10과 권11을 번역하고 주해한 책이다. 권10은 1722년(경종2)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권11은 1723년에서 1724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1724년은 영조가 즉위한 해이기도 하여 국왕이 바뀌는 가운데 발생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1722년을 주도한 소론은 1721년에 이어서 노론에 대한 탄핵을 이어갔으며,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에 대한 추보(追報)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어서 장희빈을 신원하려는 주장이 이어지면서 송시열ㆍ김춘택 등에 대한 공격이 쇄도하였고, 자연스럽게 윤증을 모함한 김창집 등 4흉과 신구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졌다.
임인옥사는 목호룡(睦虎龍) 고변에서 비롯되었다. 목호룡은 노론의 경종 시해 음모를 폭로하였고, 김일경을 위시한 소론에서는 서둘러 국청을 설치하고 수사에 착수하였다. 본서에서는 정인중ㆍ심상길ㆍ이정식 등의 공초를 수록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반역을 모의한 정상을 자백하였다. 김용택ㆍ이천기·백망 등의 경우 문목과 공초가 함께 수록되었는데, 김용택과 이천기는 반역 사실을 승복하면서도 지만(遲晩)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었다.
이때 밝혀진 사실이 이른바 삼수(三手)였다. 즉 경종을 칼로써 시해하려는 대급수(大急手)와 독살하려는 소급수(小急手), 그리고 숙종의 유서를 위조하여 폐출하려는 평지수(平地手)가 그것이었다. 이들이 범행에 사용하려 한 칼과 독약을 구하기 위한 은전을 증거물로 확보하고 나서 처벌을 논의하였다. 이후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에 대한 엄벌 요청이 쇄도하였다.
임인옥사를 계기로 소론의 노론에 대한 공세는 더욱 격화되었다. 그것은 우선 노론에 대한 처벌의 수위와 범위를 확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와중에 노론이 소론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켰던 1712년(숙종38) 임진과옥(壬辰科獄)이 번복되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역시 격화되어, 그해 가을에 윤증 부자에 대한 신원(伸冤)을 주장하는 상소가 나왔다. 어유귀 등이 숙종의 병신처분(1716)을 근거로 반대했지만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과 시호를 회복하고 서원의 사액을 돌려주며 문집 간행을 허락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겨울이 되어 옥사가 마무리되자 소론 내 분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일경은 대제학에 오르지 못하자 이광좌와 조태억을 비난하였고, 대사간 김동필은 김일경이 1721년에 지은 반교문(頒敎文)을 거론하며 그가 문형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723년과 1724년을 기록한 권11에서는 소론 우위의 정국에서 다시 한번 회니시비가 중요한 정치 쟁점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생 김범갑 등은 송시열의 도봉서원 배향 철회를 주장하였고, 경기 유생 김홍석 등은 송시열이 성혼을 폄하하여 문묘종사에서 배제하려 했다고 비난하며,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청하였다. 이처럼 회니시비를 둘러싼 갈등은 1724년 여름내 지속되었다.
가을에는 또다시 노론에 대한 처벌을 두고 소론 내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간 갈등이 재점화되었다. 이것은 소론 우위의 정국이 소론 탕평파의 정국 주도로 바로 이어지지 못한 정치 현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바로 이때 본서에서는 대사헌 이명언이 붕당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를 소개하였다. 그는 당쟁이 지속된다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탕평을 지향하는 군주에게 부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경종 서거 직전에 나온 이명언의 상소는 본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료이다.
그해 8월 경종의 죽음은 정국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본서에 따르면 영조는 즉위하자 맨 먼저 민진원을 특별히 석방하였고, 겨울에는 이의연이 경종대 소론 정권의 행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반발한 소론은 대사간 권익관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여 마침내 외딴 섬에 유배 보냈다. 그렇지만 영조는 자신이 본래 임금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면서 ‘고죽청풍(孤竹淸風)’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다고 말하고, 처벌받은 노론 당인들을 등용할 뜻을 내비쳤다.
이후 정국에서 가장 큰 대립 요소는 김일경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노론에서 교문(敎文) 문제를 들어 공세를 강화하자, 소론은 적극 방어하였다. 영조는 김일경의 교문이 나왔을 때 삼사(三司)에서 죄를 청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책망하였다. 이에 정동후는 김일경을 비호하는 소론을 탄핵하였다. 마침내 김일경이 친국 받다가 죽자, 그를 비호한 소론들을 정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쇄도하였다.
이처럼 정국운영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론이 노론의 파상적인 공세에 무력화되는 상황에서 본서에서는 남인 출신 전 정언 나학천의 상소를 길게 인용하였다. 그는 1721년 이후 소론 정권에서도 세력 있는 집안이 과거와 관직을 독점하였으며, 그것은 당론에서 나온 사(私)라고 비판하고, 오직 군주가 황극을 세우고 탕평을 시도하면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기사 남인들을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몰아서 그 자손들마저 폐고시켰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숙종의 하교를 인용하여 기사 남인이 명의죄인이라는 낙인이 잘못임을 보이고, 소론이 당론에 치우쳐서 노론에게 부당한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쥐를 잡다가 그릇이 깨질까 염려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앞서 이명언의 상소와 함께 영조 즉위 직후에 나온 나학천의 상소는 붕당의 폐단을 극복하고 탕평을 추구하는 본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사이다. 이어지는 「황극편 5」에선 이러한 당쟁을 극복하려는 영조대 탕평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본격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저자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김용흠

서울대학교국사학과학사,연세대학교대학원문학석사·박사.현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연구교수

주요논저|《조선후기정치사연구Ⅰ-인조대정치론의분화와변통론》(2006),《목민고·목민대방》(역서,2012),《조선의정치에서무엇을볼것인가-탕평론·탕평책·탕평정치》(2016),《형감》(역서,2019),《대백록》(역서,2020),《조선후기실학과다산정약용》(2020),《동남소사》(역서,2021),《수문록》1·2(역서,2021·2022),《황극편》1(역서,·2022),〈조선후기노론당론서와당론의특징-《형감(衡鑑)》을중심으로〉(2016),〈《경세유표》를통해서본복지국가의전통〉(2017)



역주:원재린

성균관대학교사학과학사.연세대학교대학원문학석사·박사.현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연구교수

주요논저|《조선후기성호학파의학통연구》(2002),《임관정요》(역서,2012),《동소만록》(역서,2017),《형감》(역서,2019),《대백록》(역서,2020),《동남소사》(역서,2021),《수문록》1·2(역서,2021·2022),《황극편》1(역서,·2022),〈조선후기남인당론서편찬의제특징〉(2016),〈성호사설과당쟁사이해〉(2018)



역주:김정신

덕성여자대학교사학과학사.연세대학교대학원문학석사·박사.현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연구교수

주요논저|《형감》(역서,2019),《대백록》(역서,2020),《동남소사》(역서,2021),《수문록》1·2(역서,2021·2022),《황극편》1(역서,·2022),〈주희의묘수론과종묘제개혁론〉(2015),〈주희의소목론과종묘제개혁론〉(2015),〈기축옥사와조선후기서인당론의구성·전개·분열〉(2016),〈16-7세기조선학계의중국사상사이해와중국문헌〉(2018)

목차

책머리에

『황극편4』해제

번역

황극편(皇極編)권10노소(老少)
임인년(1722,경종2)봄/여름/가을/겨울

황극편(皇極編)권11노소(老少)
계묘년(1723,경종3)봄/여름/가을/겨울
갑진년(1724,경종4)봄/가을/8월/겨울

皇極編四校勘標點

출판사 서평

소론박세채는탕평론의정당성을천명하기위해유교의대표적경전인『서경(書經)』을끌어들였다.그홍범(洪範)편에보이는‘홍범구주(洪範九疇)’가운데하나인‘황극(皇極)’을인용하여황극탕평론을제출하였던것이다.정조는이러한박세채의황극탕평론을수용하여,오직‘황극’을통해서만붕당을타파할수있다고주장하면서파붕당론의당위성을거듭강조하였다.즉송대와는다른조선의현실에근거하여황극을내세우면서,구양수붕당론을계승한주자학정치론을완곡하게부정하였다.이를통해서본서가‘황극편’이라는제목을채택한이유를짐작해볼수있다.

『황극편』은1572~1772년까지국왕대별로편년체로편찬되었다.전체가13권인데,각권별로맨앞에주요당색을밝혔다.권1~3은‘동서’,권4~6은‘서남’,권7~13은‘노소’라고세로쓰기로표제를붙이고,권3에는‘남북’,권4에는‘대북소북’,권6에는‘노소’,권13에는‘준탕(峻蕩)’이라고쓴작은글씨를괄호쓰기로붙여놓았다.이로써동인과서인,남인과북인,대북과소북,서인과남인,노론과소론이본서에서거론되는주요당색임을알수있다.왕대별로보면권1~권3은선조,권4는선조~현종,권5~권8은숙종,권9~권11은경종,권12~권13은영조대사건을수록하였다.

『황극편4』는『황극편』권10과권11을번역하고주해한책이다.권10은1722년(경종2)임인옥사(壬寅獄事)를중점적으로다루고있으며,권11은1723년에서1724년까지를포함하고있다.특히1724년은영조가즉위한해이기도하여국왕이바뀌는가운데발생한정치적소용돌이를보여준다.

1722년을주도한소론은1721년에이어서노론에대한탄핵을이어갔으며,경종의생모인장희빈에대한추보(追報)방안을논의하였다.이어서장희빈을신원하려는주장이이어지면서송시열,김춘택등에대한공격이쇄도하였고,자연스럽게윤증을모함한김창집등4흉과신구에대한탄핵으로이어졌다.

임인옥사는목호룡(睦虎龍)고변에서비롯되었다.목호룡은노론의경종시해음모를폭로하였고,김일경을위시한소론에서는서둘러국청을설치하고수사에착수하였다.본서에서는정인중,심상길,이정식등의공초를수록하였는데,이들은모두반역을모의한정상을자백하였다.김용택,이천기·백망등의경우문목과공초가함께수록되었는데,김용택과이천기는반역사실을승복하면서도지만(遲晩)을끝까지거부하다가죽었다.

이때밝혀진사실이이른바삼수(三手)였다.즉경종을칼로써시해하려는대급수(大急手)와독살하려는소급수(小急手),그리고숙종의유서를위조하여폐출하려는평지수(平地手)가그것이었다.이들이범행에사용하려한칼과독약을구하기위한은전을증거물로확보하고나서처벌을논의하였다.이후김창집등노론4대신에대한엄벌요청이쇄도하였다.

임인옥사를계기로소론의노론에대한공세는더욱격화되었다.그것은우선노론에대한처벌의수위와범위를확대시키는것으로나타났으며,그와중에노론이소론을제거하기위해일으켰던1712년(숙종38)임진과옥(壬辰科獄)이번복되었다.회니시비(懷尼是非)역시격화되어,그해가을에윤증부자에대한신원을주장하는상소가나왔다.어유귀등이숙종의병신처분(1716)을근거로반대했지만윤선거와윤증의관작과시호를회복하고서원의사액을돌려주며문집간행을허락하는것으로귀결되었다.

겨울이되어옥사가마무리되자소론내분열이다시수면위로떠올랐다.김일경은대제학에오르지못하자이광좌와조태억을비난하였고,대사간김동필은김일경이1721년에지은반교문(頒敎文)을거론하며그가문형에적임자가아니라고주장하였다.

1723년과1724년을기록한권11에서는소론우위의정국에서다시한번회니시비가중요한정치쟁점이되고있음을보여준다.유생김범갑등은송시열의도봉서원배향철회를주장하였고,경기유생김홍석등은송시열이성혼을폄하하여문묘종사에서배제하려했다고비난하며,송시열의관작을삭탈하라고청하였다.이처럼회니시비를둘러싼갈등은1724년여름내지속되었다.

가을에는또다시노론에대한처벌을두고소론내에서강경파와온건파간갈등이재점화되었다.이것은소론우위의정국이소론탕평파의정국주도로바로이어지지못한정치현실을드러낸것이었다.바로이때본서에서는대사헌이명언이붕당의폐해를지적한상소를소개하였다.그는당쟁이지속된다면나라가망할것이라며탕평을지향하는군주에게부응해야한다고역설하였다.경종서거직전에나온이명언의상소는본서의특징을잘보여주는대표적인사료이다.

그해8월경종의죽음은정국에큰변화를초래하였다.본서에따르면영조는즉위하자맨먼저민진원을특별히석방하였고,겨울에는이의연이경종대소론정권의행태를비판하는상소를올렸다.이에반발한소론은대사간권익관을중심으로그에대한처벌을요구하여마침내외딴섬에유배보냈다.그렇지만영조는자신이본래임금자리를탐하지않았다면서‘고죽청풍(孤竹淸風)’이라는네글자를좌우명으로삼고있었다고말하고,처벌받은노론당인들을등용할뜻을내비쳤다.

이후정국에서가장큰대립요소는김일경에대한처벌문제였다.노론에서교문(敎文)문제를들어공세를강화하자,소론은적극방어하였다.영조는김일경의교문이나왔을때삼사(三司)에서죄를청한사람이한사람도없었다고책망하였다.이에정동후는김일경을비호하는소론을탄핵하였다.마침내김일경이친국받다가죽자,그를비호한소론들을정배해야한다는주장이쇄도하였다.

이처럼정국운영의한축을담당했던소론이노론의파상적인공세에무력화되는상황에서본서에서는남인출신전정언나학천의상소를길게인용하였다.그는1721년이후소론정권에서도세력있는집안이과거와관직을독점하였으며,그것은당론에서나온사(私)라고비판하고,오직군주가황극을세우고탕평을시도하면그것이야말로올바른노선이라고주장하였다.

이어서기사남인들을‘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몰아서그자손들마저폐고시켰다고비판하였다.그는숙종의하교를인용하여기사남인이명의죄인이라는낙인이잘못임을보이고,소론이당론에치우쳐서노론에게부당한죄를덮어씌우는것은쥐를잡다가그릇이깨질까염려하는마음이없는것이라고주장하였다.앞서이명언의상소와함께영조즉위직후에나온나학천의상소는붕당의폐단을극복하고탕평을추구하는본서의특징을잘보여주는기사이다.이어지는『황극편5』에선이러한당쟁을극복하려는영조대탕평책이어떻게전개되었는지를본격적으로보게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