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정조의 명령으로 선조에서 영조까지의 조선후기 당쟁을 정리하여 편찬한 당론서!
「황극편(皇極編)」은 조선후기 정조(正祖)의 명으로 선조(宣祖)에서 영조(英祖)까지의 조선후기 당쟁을 정리하여 편찬한 당론서(黨論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선조대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이후 당쟁이 격화되어 분당(分黨)과 반정(反正)이 일어나고, 환국(換局)과 처분(處分)이 반복되었다. 특히 17세기 숙종(肅宗)대 이후에는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정치적 숙청이 반복되었는데, 이에 각 당파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당론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동소만록(桐巢漫錄)」은 남인, 「형감(衡鑑)」은 노론, 「갑을록(甲乙錄)」은 소론의 입장을 대표하는 당론서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조정안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서 가까스로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탕평책을 적극 천명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선조대 이래 각 당파의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정조가 직접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편찬한 것이 바로 「황극편」이다. 따라서 이것은 국왕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당론서와 구별되며, 정조 탕평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론 박세채는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유교의 대표적 경전인 「서경(書經)」을 끌어들였다. 그 「홍범(洪範)」편에 보이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인 ‘황극(皇極)’을 인용하여 황극탕평론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수용하여, 오직 ‘황극’을 통해서만 붕당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붕당론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송대와는 다른 조선의 현실에 근거하여 황극을 내세우면서, 구양수 붕당론을 계승한 주자학 정치론을 완곡하게 부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본서가 ‘황극편’이라는 제목을 채택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극편」은 1572~1772년까지 국왕대별로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전체가 13권인데, 각 권별로 맨 앞에 주요 당색을 밝혔다. 권1~3은 ‘동서’, 권4~6은 ‘서남’, 권7~13은 ‘노소’라고 세로쓰기로 표제를 붙이고, 권3에는 ‘남북’, 권4에는 ‘대북ㆍ소북’, 권6에는 ‘노소’, 권13에는 ‘준탕(峻蕩)’이라고 쓴 작은 글씨를 괄호쓰기로 붙여 놓았다. 이로써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본서에서 거론되는 주요 당색임을 알 수 있다. 왕대별로 보면 권1~권3은 선조, 권4는 선조~현종, 권5~권8은 숙종, 권9~권11은 경종, 권12~권13은 영조대 사건을 수록하였다.
「황극편 4」는 「황극편」 권10과 권11을 번역하고 주해한 책이다. 권10은 1722년(경종2)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권11은 1723년에서 1724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1724년은 영조가 즉위한 해이기도 하여 국왕이 바뀌는 가운데 발생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1722년을 주도한 소론은 1721년에 이어서 노론에 대한 탄핵을 이어갔으며,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에 대한 추보(追報)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어서 장희빈을 신원하려는 주장이 이어지면서 송시열ㆍ김춘택 등에 대한 공격이 쇄도하였고, 자연스럽게 윤증을 모함한 김창집 등 4흉과 신구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졌다.
임인옥사는 목호룡(睦虎龍) 고변에서 비롯되었다. 목호룡은 노론의 경종 시해 음모를 폭로하였고, 김일경을 위시한 소론에서는 서둘러 국청을 설치하고 수사에 착수하였다. 본서에서는 정인중ㆍ심상길ㆍ이정식 등의 공초를 수록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반역을 모의한 정상을 자백하였다. 김용택ㆍ이천기·백망 등의 경우 문목과 공초가 함께 수록되었는데, 김용택과 이천기는 반역 사실을 승복하면서도 지만(遲晩)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었다.
이때 밝혀진 사실이 이른바 삼수(三手)였다. 즉 경종을 칼로써 시해하려는 대급수(大急手)와 독살하려는 소급수(小急手), 그리고 숙종의 유서를 위조하여 폐출하려는 평지수(平地手)가 그것이었다. 이들이 범행에 사용하려 한 칼과 독약을 구하기 위한 은전을 증거물로 확보하고 나서 처벌을 논의하였다. 이후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에 대한 엄벌 요청이 쇄도하였다.
임인옥사를 계기로 소론의 노론에 대한 공세는 더욱 격화되었다. 그것은 우선 노론에 대한 처벌의 수위와 범위를 확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와중에 노론이 소론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켰던 1712년(숙종38) 임진과옥(壬辰科獄)이 번복되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역시 격화되어, 그해 가을에 윤증 부자에 대한 신원(伸冤)을 주장하는 상소가 나왔다. 어유귀 등이 숙종의 병신처분(1716)을 근거로 반대했지만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과 시호를 회복하고 서원의 사액을 돌려주며 문집 간행을 허락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겨울이 되어 옥사가 마무리되자 소론 내 분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일경은 대제학에 오르지 못하자 이광좌와 조태억을 비난하였고, 대사간 김동필은 김일경이 1721년에 지은 반교문(頒敎文)을 거론하며 그가 문형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723년과 1724년을 기록한 권11에서는 소론 우위의 정국에서 다시 한번 회니시비가 중요한 정치 쟁점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생 김범갑 등은 송시열의 도봉서원 배향 철회를 주장하였고, 경기 유생 김홍석 등은 송시열이 성혼을 폄하하여 문묘종사에서 배제하려 했다고 비난하며,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청하였다. 이처럼 회니시비를 둘러싼 갈등은 1724년 여름내 지속되었다.
가을에는 또다시 노론에 대한 처벌을 두고 소론 내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간 갈등이 재점화되었다. 이것은 소론 우위의 정국이 소론 탕평파의 정국 주도로 바로 이어지지 못한 정치 현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바로 이때 본서에서는 대사헌 이명언이 붕당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를 소개하였다. 그는 당쟁이 지속된다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탕평을 지향하는 군주에게 부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경종 서거 직전에 나온 이명언의 상소는 본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료이다.
그해 8월 경종의 죽음은 정국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본서에 따르면 영조는 즉위하자 맨 먼저 민진원을 특별히 석방하였고, 겨울에는 이의연이 경종대 소론 정권의 행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반발한 소론은 대사간 권익관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여 마침내 외딴 섬에 유배 보냈다. 그렇지만 영조는 자신이 본래 임금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면서 ‘고죽청풍(孤竹淸風)’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다고 말하고, 처벌받은 노론 당인들을 등용할 뜻을 내비쳤다.
이후 정국에서 가장 큰 대립 요소는 김일경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노론에서 교문(敎文) 문제를 들어 공세를 강화하자, 소론은 적극 방어하였다. 영조는 김일경의 교문이 나왔을 때 삼사(三司)에서 죄를 청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책망하였다. 이에 정동후는 김일경을 비호하는 소론을 탄핵하였다. 마침내 김일경이 친국 받다가 죽자, 그를 비호한 소론들을 정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쇄도하였다.
이처럼 정국운영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론이 노론의 파상적인 공세에 무력화되는 상황에서 본서에서는 남인 출신 전 정언 나학천의 상소를 길게 인용하였다. 그는 1721년 이후 소론 정권에서도 세력 있는 집안이 과거와 관직을 독점하였으며, 그것은 당론에서 나온 사(私)라고 비판하고, 오직 군주가 황극을 세우고 탕평을 시도하면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기사 남인들을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몰아서 그 자손들마저 폐고시켰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숙종의 하교를 인용하여 기사 남인이 명의죄인이라는 낙인이 잘못임을 보이고, 소론이 당론에 치우쳐서 노론에게 부당한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쥐를 잡다가 그릇이 깨질까 염려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앞서 이명언의 상소와 함께 영조 즉위 직후에 나온 나학천의 상소는 붕당의 폐단을 극복하고 탕평을 추구하는 본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사이다. 이어지는 「황극편 5」에선 이러한 당쟁을 극복하려는 영조대 탕평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본격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조정안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서 가까스로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탕평책을 적극 천명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선조대 이래 각 당파의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정조가 직접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편찬한 것이 바로 「황극편」이다. 따라서 이것은 국왕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당론서와 구별되며, 정조 탕평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론 박세채는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유교의 대표적 경전인 「서경(書經)」을 끌어들였다. 그 「홍범(洪範)」편에 보이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인 ‘황극(皇極)’을 인용하여 황극탕평론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수용하여, 오직 ‘황극’을 통해서만 붕당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붕당론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송대와는 다른 조선의 현실에 근거하여 황극을 내세우면서, 구양수 붕당론을 계승한 주자학 정치론을 완곡하게 부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본서가 ‘황극편’이라는 제목을 채택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극편」은 1572~1772년까지 국왕대별로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전체가 13권인데, 각 권별로 맨 앞에 주요 당색을 밝혔다. 권1~3은 ‘동서’, 권4~6은 ‘서남’, 권7~13은 ‘노소’라고 세로쓰기로 표제를 붙이고, 권3에는 ‘남북’, 권4에는 ‘대북ㆍ소북’, 권6에는 ‘노소’, 권13에는 ‘준탕(峻蕩)’이라고 쓴 작은 글씨를 괄호쓰기로 붙여 놓았다. 이로써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본서에서 거론되는 주요 당색임을 알 수 있다. 왕대별로 보면 권1~권3은 선조, 권4는 선조~현종, 권5~권8은 숙종, 권9~권11은 경종, 권12~권13은 영조대 사건을 수록하였다.
「황극편 4」는 「황극편」 권10과 권11을 번역하고 주해한 책이다. 권10은 1722년(경종2)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권11은 1723년에서 1724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1724년은 영조가 즉위한 해이기도 하여 국왕이 바뀌는 가운데 발생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1722년을 주도한 소론은 1721년에 이어서 노론에 대한 탄핵을 이어갔으며,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에 대한 추보(追報)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어서 장희빈을 신원하려는 주장이 이어지면서 송시열ㆍ김춘택 등에 대한 공격이 쇄도하였고, 자연스럽게 윤증을 모함한 김창집 등 4흉과 신구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졌다.
임인옥사는 목호룡(睦虎龍) 고변에서 비롯되었다. 목호룡은 노론의 경종 시해 음모를 폭로하였고, 김일경을 위시한 소론에서는 서둘러 국청을 설치하고 수사에 착수하였다. 본서에서는 정인중ㆍ심상길ㆍ이정식 등의 공초를 수록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반역을 모의한 정상을 자백하였다. 김용택ㆍ이천기·백망 등의 경우 문목과 공초가 함께 수록되었는데, 김용택과 이천기는 반역 사실을 승복하면서도 지만(遲晩)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었다.
이때 밝혀진 사실이 이른바 삼수(三手)였다. 즉 경종을 칼로써 시해하려는 대급수(大急手)와 독살하려는 소급수(小急手), 그리고 숙종의 유서를 위조하여 폐출하려는 평지수(平地手)가 그것이었다. 이들이 범행에 사용하려 한 칼과 독약을 구하기 위한 은전을 증거물로 확보하고 나서 처벌을 논의하였다. 이후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에 대한 엄벌 요청이 쇄도하였다.
임인옥사를 계기로 소론의 노론에 대한 공세는 더욱 격화되었다. 그것은 우선 노론에 대한 처벌의 수위와 범위를 확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와중에 노론이 소론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켰던 1712년(숙종38) 임진과옥(壬辰科獄)이 번복되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역시 격화되어, 그해 가을에 윤증 부자에 대한 신원(伸冤)을 주장하는 상소가 나왔다. 어유귀 등이 숙종의 병신처분(1716)을 근거로 반대했지만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과 시호를 회복하고 서원의 사액을 돌려주며 문집 간행을 허락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겨울이 되어 옥사가 마무리되자 소론 내 분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일경은 대제학에 오르지 못하자 이광좌와 조태억을 비난하였고, 대사간 김동필은 김일경이 1721년에 지은 반교문(頒敎文)을 거론하며 그가 문형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723년과 1724년을 기록한 권11에서는 소론 우위의 정국에서 다시 한번 회니시비가 중요한 정치 쟁점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생 김범갑 등은 송시열의 도봉서원 배향 철회를 주장하였고, 경기 유생 김홍석 등은 송시열이 성혼을 폄하하여 문묘종사에서 배제하려 했다고 비난하며,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청하였다. 이처럼 회니시비를 둘러싼 갈등은 1724년 여름내 지속되었다.
가을에는 또다시 노론에 대한 처벌을 두고 소론 내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간 갈등이 재점화되었다. 이것은 소론 우위의 정국이 소론 탕평파의 정국 주도로 바로 이어지지 못한 정치 현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바로 이때 본서에서는 대사헌 이명언이 붕당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를 소개하였다. 그는 당쟁이 지속된다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탕평을 지향하는 군주에게 부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경종 서거 직전에 나온 이명언의 상소는 본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료이다.
그해 8월 경종의 죽음은 정국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본서에 따르면 영조는 즉위하자 맨 먼저 민진원을 특별히 석방하였고, 겨울에는 이의연이 경종대 소론 정권의 행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반발한 소론은 대사간 권익관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여 마침내 외딴 섬에 유배 보냈다. 그렇지만 영조는 자신이 본래 임금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면서 ‘고죽청풍(孤竹淸風)’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다고 말하고, 처벌받은 노론 당인들을 등용할 뜻을 내비쳤다.
이후 정국에서 가장 큰 대립 요소는 김일경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노론에서 교문(敎文) 문제를 들어 공세를 강화하자, 소론은 적극 방어하였다. 영조는 김일경의 교문이 나왔을 때 삼사(三司)에서 죄를 청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책망하였다. 이에 정동후는 김일경을 비호하는 소론을 탄핵하였다. 마침내 김일경이 친국 받다가 죽자, 그를 비호한 소론들을 정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쇄도하였다.
이처럼 정국운영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론이 노론의 파상적인 공세에 무력화되는 상황에서 본서에서는 남인 출신 전 정언 나학천의 상소를 길게 인용하였다. 그는 1721년 이후 소론 정권에서도 세력 있는 집안이 과거와 관직을 독점하였으며, 그것은 당론에서 나온 사(私)라고 비판하고, 오직 군주가 황극을 세우고 탕평을 시도하면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기사 남인들을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몰아서 그 자손들마저 폐고시켰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숙종의 하교를 인용하여 기사 남인이 명의죄인이라는 낙인이 잘못임을 보이고, 소론이 당론에 치우쳐서 노론에게 부당한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쥐를 잡다가 그릇이 깨질까 염려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앞서 이명언의 상소와 함께 영조 즉위 직후에 나온 나학천의 상소는 붕당의 폐단을 극복하고 탕평을 추구하는 본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사이다. 이어지는 「황극편 5」에선 이러한 당쟁을 극복하려는 영조대 탕평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본격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황극편 4 : 번역과 주해 (양장)
$2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