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정조의 명령으로 선조에서 영조까지의 조선후기 당쟁을 정리하여 편찬한 당론서!
「황극편(皇極編)」은 조선후기 정조(正祖)의 명으로 선조(宣祖)에서 영조(英祖)까지의 조선후기 당쟁을 정리하여 편찬한 당론서(黨論書)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조정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 가까스로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탕평책을 적극 천명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선조대 이래 각 당파의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정조가 직접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편찬한 것이 바로 「황극편」이다. 따라서 이것은 국왕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당론서와 구별되며, 정조 탕평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론 박세채는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유교의 대표적 경전인 「서경(書經)」을 끌어들였다. 그 「홍범(洪範)」편에 보이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인 ‘황극(皇極)’을 인용하여 황극탕평론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수용하여, 오직 ‘황극’을 통해서만 붕당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붕당론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송대와는 다른 조선의 현실에 근거하여 황극을 내세우면서, 구양수 붕당론을 계승한 주자학 정치론을 완곡하게 부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본서가 ‘황극편’이라는 제목을 채택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극편」은 1572~1772년까지 국왕대별로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전체가 13권인데, 각 권별로 맨 앞에 주요 당색을 밝혔다. 권1~3은 ‘동서’, 권4~6은 ‘서남’, 권7~13은 ‘노소’라고 세로쓰기로 표제를 붙이고, 권3에는 ‘남북’, 권4에는 ‘대북ㆍ소북’, 권6에는 ‘노소’, 권13에는 ‘준탕(峻蕩)’이라고 쓴 작은 글씨를 괄호쓰기로 붙여 놓았다. 이로써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본서에서 거론되는 주요 당색임을 알 수 있다. 왕대별로 보면 권1~권3은 선조, 권4는 선조~현종, 권5~권8은 숙종, 권9~권11은 경종, 권12~권13은 영조대 사건을 수록하였다.
「황극편 5」는 「황극편」 권12와 권13을 번역하고 주해한 책이다. 권12는 1725년(영조1)부터 1727년까지의 정치적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고, 권13에는 1728년에서 1772년(영조48)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대체로 영조대 탕평을 통해 집권국가 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부각시켰는데,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탕평정치는 영조 즉위 초 소론에 대한 노론의 압박이 거세지는 와중에 거중 조정자로서 국왕의 정치적 역할이 보다 절실해진 시점에 본격 등장하였다.
영조는 도사(都事) 유응환(柳應煥)이 백망(白望)의 초사에서 거론된 조태구(趙泰耈)ㆍ유봉휘(柳鳳輝) 등을 모두 국문하라고 청하자 이를 거부하였지만 노론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의 요구를 마냥 거부할 수 없었다. 당시 복잡한 영조의 심경은 방만규(方萬規)와 이삼(李森)을 처결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방만규는 임인옥사에서 이른바 소급수에는 인원왕후가 관여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소론의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영조는 신하가 거론할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처벌을 명하면서도 이를 계기로 노론으로 정국 주도세력을 교체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영조는 김일경의 심복이라는 혐의를 받는 이삼에 대한 처벌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같이 영조의 소론 보호 노력이 탕평의 차원에서 나왔음은 이기진(李箕鎭)의 상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이기진이 역적에 대한 토죄가 느슨하다고 비판하자 영조는 수괴 이외에는 불문에 부치겠다고 받아쳤다. 이때 보기 드물게, 영조의 뜻이 화평과 관대함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이기진의 상소가 나왔다고 짧은 논평이 덧붙여졌다.
이 같은 영조의 탕평 시도에도 불구하고 1725년 겨울 이후 소론에 대한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노론은 유봉휘ㆍ이광좌ㆍ조태억ㆍ조태구ㆍ최석항 등을 줄기차게 탄핵하였다. 1726년(영조2)에는 임징하가 경종대 정치가 어지러웠고, 이를 담당한 조태구와 유봉휘의 무리는 역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소론과 남인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1727년(영조3)에는 노론의 공격이 더욱 거세게 전개되었다. 삼사에서는 조태구와 최석항을 노적(孥籍)하라고 청하였으며, 양사에서는 심지어 숙종 묘정에 배향된 남구만ㆍ윤지완ㆍ최석정을 출향하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정미환국(1727)을 단행하여 소론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김일경 상소에 연명한 이른바 소하(疏下) 5적(五賊)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노론 중신과 논쟁을 벌이다가 신하들이 군부를 농락하고 있다고 화를 내면서 삼사를 모두 삭출하였다. 이어서 하교와 비망기를 내려 전격적으로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하였다. 영조는 비망기에서 노론의 당파적 행태를 비판하고 송인명(宋寅明)이 주장한 탕평에 깨달은 바 있어서 행한 것이라고 다시 한번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여기서는 특히 파붕당(破朋黨)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남인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역설한 송인명의 발언을 길게 소개하였다.
이 시기 영조의 탕평책은 정치 현안뿐만이 아니라 사문시비(斯文是非)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영조는 탕평책이 숙종대 이래의 가법(家法)이라고 천명하고, 그 핵심이 파붕당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소론이 병신처분(1716)을 수정한 것이나 1725년 이후 소론을 내친 일을 모두 탕평의 도리를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노론이 세제(世弟) 책봉에 공이 있다고 내세우는 것을 비판하였고, 이어서 이광좌와 조태억을 역적이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김일경 소에 연명한 5인은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진원ㆍ정호 등이 당습만 일삼았다고 비판하면서 과도한 소론 처벌을 “임금을 농락”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대경장한 것에 환국의 의미가 있다고 그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그 뒤에 탕평책에 동조하는 조현명(趙顯命)과 오광운(吳光運)의 주장을 실어두었다.
권13에는 1728년(영조4)부터 1772년(영조48)까지 영조 탕평책 관련 주요 사건을 대략적으로 소개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유처분(1729), 경신처분(1740)과 신유대훈(1741) 등을 들 수 있다. 기유처분은 탕평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국왕의 대처분이었고, 경신처분과 신유대훈은 노론 4대신에 대한 사면과 함께 4색 당파를 모두 등용하겠다는 대탕평이 제창되던 사건이었다. 먼저 1729년에 임인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에 대한 처벌을 달리해야 한다는 분등(分等)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영조는 무신란(1728) 이후 노론ㆍ소론ㆍ남인에서 모두 역적이 나왔다고 하면서, 건저와 대리청정을 주장한 것은 당론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한 연명 차자는 반역이 아니며, 김창집과 이이명은 그 자손의 이름이 임인년 옥사에서 거론되었으므로 관작을 추탈하고, 이건명과 조태채는 복관시키되 서원을 세우고 시호를 내리는 일은 허용하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이는 4대신을 등급을 나누어서 처벌하여 노론에게 출사의 명분을 제공하려는 시도였다.
1730년(영조6) 봄에는 영조가 이광좌와 민진원의 손을 잡고 서로 협력하여 국정운영에 참여해 주기를 부탁하였지만 실패하는, 유명한 장면을 길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탕평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둘러싼 노·소론 내 찬반 대립은 지속되었다. 거센 노론의 반발에 1740년 영조가 이이명과 김창집의 관작을 복구하라고 하교하자 이번엔 송인명과 조현명이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이 사안은 1741년 김일경과 목호룡의 죄와 함께 김용택·이천기·이희지·심상길·정인중 등의 죄를 기록한 대훈(大訓)이 반포되면서 종결되었다.
「신유대훈」을 기점으로 본궤도에 오른 탕평 정치는 나주 괘서 사건(1755)으로 극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영조 말년에 이르도록 지속되었다. 1764년 영조는 다시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그것을 처음 주장했던 박세채를 문묘에 종사하라 하였다. 1772년에는 이광좌ㆍ최석항ㆍ조태억의 관작을 회복하라고 특별히 명하여 이들의 관작을 복구한 사실만을 기록으로 남겼다.
「황극편 5」는 영조 탕평책이 얼마나 어려운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조선후기 정치가 당쟁으로 점철된 혼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탕평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있었다는 것을 본서는 시사하고 있다.
소론 박세채는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유교의 대표적 경전인 「서경(書經)」을 끌어들였다. 그 「홍범(洪範)」편에 보이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인 ‘황극(皇極)’을 인용하여 황극탕평론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수용하여, 오직 ‘황극’을 통해서만 붕당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붕당론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송대와는 다른 조선의 현실에 근거하여 황극을 내세우면서, 구양수 붕당론을 계승한 주자학 정치론을 완곡하게 부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본서가 ‘황극편’이라는 제목을 채택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극편」은 1572~1772년까지 국왕대별로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전체가 13권인데, 각 권별로 맨 앞에 주요 당색을 밝혔다. 권1~3은 ‘동서’, 권4~6은 ‘서남’, 권7~13은 ‘노소’라고 세로쓰기로 표제를 붙이고, 권3에는 ‘남북’, 권4에는 ‘대북ㆍ소북’, 권6에는 ‘노소’, 권13에는 ‘준탕(峻蕩)’이라고 쓴 작은 글씨를 괄호쓰기로 붙여 놓았다. 이로써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본서에서 거론되는 주요 당색임을 알 수 있다. 왕대별로 보면 권1~권3은 선조, 권4는 선조~현종, 권5~권8은 숙종, 권9~권11은 경종, 권12~권13은 영조대 사건을 수록하였다.
「황극편 5」는 「황극편」 권12와 권13을 번역하고 주해한 책이다. 권12는 1725년(영조1)부터 1727년까지의 정치적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고, 권13에는 1728년에서 1772년(영조48)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대체로 영조대 탕평을 통해 집권국가 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부각시켰는데,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탕평정치는 영조 즉위 초 소론에 대한 노론의 압박이 거세지는 와중에 거중 조정자로서 국왕의 정치적 역할이 보다 절실해진 시점에 본격 등장하였다.
영조는 도사(都事) 유응환(柳應煥)이 백망(白望)의 초사에서 거론된 조태구(趙泰耈)ㆍ유봉휘(柳鳳輝) 등을 모두 국문하라고 청하자 이를 거부하였지만 노론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의 요구를 마냥 거부할 수 없었다. 당시 복잡한 영조의 심경은 방만규(方萬規)와 이삼(李森)을 처결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방만규는 임인옥사에서 이른바 소급수에는 인원왕후가 관여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소론의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영조는 신하가 거론할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처벌을 명하면서도 이를 계기로 노론으로 정국 주도세력을 교체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영조는 김일경의 심복이라는 혐의를 받는 이삼에 대한 처벌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같이 영조의 소론 보호 노력이 탕평의 차원에서 나왔음은 이기진(李箕鎭)의 상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이기진이 역적에 대한 토죄가 느슨하다고 비판하자 영조는 수괴 이외에는 불문에 부치겠다고 받아쳤다. 이때 보기 드물게, 영조의 뜻이 화평과 관대함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이기진의 상소가 나왔다고 짧은 논평이 덧붙여졌다.
이 같은 영조의 탕평 시도에도 불구하고 1725년 겨울 이후 소론에 대한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노론은 유봉휘ㆍ이광좌ㆍ조태억ㆍ조태구ㆍ최석항 등을 줄기차게 탄핵하였다. 1726년(영조2)에는 임징하가 경종대 정치가 어지러웠고, 이를 담당한 조태구와 유봉휘의 무리는 역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소론과 남인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1727년(영조3)에는 노론의 공격이 더욱 거세게 전개되었다. 삼사에서는 조태구와 최석항을 노적(孥籍)하라고 청하였으며, 양사에서는 심지어 숙종 묘정에 배향된 남구만ㆍ윤지완ㆍ최석정을 출향하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정미환국(1727)을 단행하여 소론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김일경 상소에 연명한 이른바 소하(疏下) 5적(五賊)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노론 중신과 논쟁을 벌이다가 신하들이 군부를 농락하고 있다고 화를 내면서 삼사를 모두 삭출하였다. 이어서 하교와 비망기를 내려 전격적으로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하였다. 영조는 비망기에서 노론의 당파적 행태를 비판하고 송인명(宋寅明)이 주장한 탕평에 깨달은 바 있어서 행한 것이라고 다시 한번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여기서는 특히 파붕당(破朋黨)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남인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역설한 송인명의 발언을 길게 소개하였다.
이 시기 영조의 탕평책은 정치 현안뿐만이 아니라 사문시비(斯文是非)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영조는 탕평책이 숙종대 이래의 가법(家法)이라고 천명하고, 그 핵심이 파붕당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소론이 병신처분(1716)을 수정한 것이나 1725년 이후 소론을 내친 일을 모두 탕평의 도리를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노론이 세제(世弟) 책봉에 공이 있다고 내세우는 것을 비판하였고, 이어서 이광좌와 조태억을 역적이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김일경 소에 연명한 5인은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진원ㆍ정호 등이 당습만 일삼았다고 비판하면서 과도한 소론 처벌을 “임금을 농락”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대경장한 것에 환국의 의미가 있다고 그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그 뒤에 탕평책에 동조하는 조현명(趙顯命)과 오광운(吳光運)의 주장을 실어두었다.
권13에는 1728년(영조4)부터 1772년(영조48)까지 영조 탕평책 관련 주요 사건을 대략적으로 소개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유처분(1729), 경신처분(1740)과 신유대훈(1741) 등을 들 수 있다. 기유처분은 탕평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국왕의 대처분이었고, 경신처분과 신유대훈은 노론 4대신에 대한 사면과 함께 4색 당파를 모두 등용하겠다는 대탕평이 제창되던 사건이었다. 먼저 1729년에 임인옥사로 죽은 노론 4대신에 대한 처벌을 달리해야 한다는 분등(分等)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영조는 무신란(1728) 이후 노론ㆍ소론ㆍ남인에서 모두 역적이 나왔다고 하면서, 건저와 대리청정을 주장한 것은 당론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한 연명 차자는 반역이 아니며, 김창집과 이이명은 그 자손의 이름이 임인년 옥사에서 거론되었으므로 관작을 추탈하고, 이건명과 조태채는 복관시키되 서원을 세우고 시호를 내리는 일은 허용하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이는 4대신을 등급을 나누어서 처벌하여 노론에게 출사의 명분을 제공하려는 시도였다.
1730년(영조6) 봄에는 영조가 이광좌와 민진원의 손을 잡고 서로 협력하여 국정운영에 참여해 주기를 부탁하였지만 실패하는, 유명한 장면을 길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탕평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둘러싼 노·소론 내 찬반 대립은 지속되었다. 거센 노론의 반발에 1740년 영조가 이이명과 김창집의 관작을 복구하라고 하교하자 이번엔 송인명과 조현명이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이 사안은 1741년 김일경과 목호룡의 죄와 함께 김용택·이천기·이희지·심상길·정인중 등의 죄를 기록한 대훈(大訓)이 반포되면서 종결되었다.
「신유대훈」을 기점으로 본궤도에 오른 탕평 정치는 나주 괘서 사건(1755)으로 극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영조 말년에 이르도록 지속되었다. 1764년 영조는 다시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그것을 처음 주장했던 박세채를 문묘에 종사하라 하였다. 1772년에는 이광좌ㆍ최석항ㆍ조태억의 관작을 회복하라고 특별히 명하여 이들의 관작을 복구한 사실만을 기록으로 남겼다.
「황극편 5」는 영조 탕평책이 얼마나 어려운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조선후기 정치가 당쟁으로 점철된 혼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탕평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있었다는 것을 본서는 시사하고 있다.
황극편 5 : 번역과 주해 (양장)
$3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