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편 5 : 번역과 주해 (양장)

황극편 5 : 번역과 주해 (양장)

$30.73
저자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김용흠

서울대학교국사학과학사,연세대학교대학원문학석사·박사.현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연구교수

주요논저|《조선후기정치사연구Ⅰ-인조대정치론의분화와변통론》(2006),《목민고·목민대방》(역서,2012),《조선의정치에서무엇을볼것인가-탕평론·탕평책·탕평정치》(2016),《형감》(역서,2019),《대백록》(역서,2020),《조선후기실학과다산정약용》(2020),《동남소사》(역서,2021),《수문록》1·2(역서,2021·2022),《황극편》1(역서,·2022),〈조선후기노론당론서와당론의특징-《형감(衡鑑)》을중심으로〉(2016),〈《경세유표》를통해서본복지국가의전통〉(2017)



역주:원재린

성균관대학교사학과학사.연세대학교대학원문학석사·박사.현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연구교수

주요논저|《조선후기성호학파의학통연구》(2002),《임관정요》(역서,2012),《동소만록》(역서,2017),《형감》(역서,2019),《대백록》(역서,2020),《동남소사》(역서,2021),《수문록》1·2(역서,2021·2022),《황극편》1(역서,·2022),〈조선후기남인당론서편찬의제특징〉(2016),〈성호사설과당쟁사이해〉(2018)



역주:김정신

덕성여자대학교사학과학사.연세대학교대학원문학석사·박사.현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연구교수

주요논저|《형감》(역서,2019),《대백록》(역서,2020),《동남소사》(역서,2021),《수문록》1·2(역서,2021·2022),《황극편》1(역서,·2022),〈주희의묘수론과종묘제개혁론〉(2015),〈주희의소목론과종묘제개혁론〉(2015),〈기축옥사와조선후기서인당론의구성·전개·분열〉(2016),〈16-7세기조선학계의중국사상사이해와중국문헌〉(2018)

목차

책머리에

황극편5해제

번역

황극편(皇極編)권12노소(老少)
을사년(1725,영조1)봄/겨울
병오년(1726,영조2)봄
정미년(1727,영조3)봄/여름

황극편(皇極編)권13노소(老少)-준파(峻派)와탕파(蕩派)
무신년(1728,영조4)봄
기유년(1729,영조5)여름/가을
경술년(1730,영조6)봄/가을/겨울
임자년(1732,영조8)여름
을묘년(1735,영조11)봄
병진년(1736,영조12)가을
기미년(1739,영조15)봄/겨울
경신년(1740,영조16)봄/여름
신유년(1741,영조17)
병인년(1746,영조22)여름
을해년(1755,영조31)봄
갑신년(1764,영조40)여름
임진년(1772,영조48)

皇極編五校勘標點

출판사 서평

소론박세채는탕평론의정당성을천명하기위해유교의대표적경전인『서경(書經)』을끌어들였다.그「홍범(洪範)」편에보이는‘홍범구주(洪範九疇)’가운데하나인‘황극(皇極)’을인용하여황극탕평론을제출하였던것이다.정조는이러한박세채의황극탕평론을수용하여,오직‘황극’을통해서만붕당을타파할수있다고주장하면서파붕당론의당위성을거듭강조하였다.즉송대와는다른조선의현실에근거하여황극을내세우면서,구양수붕당론을계승한주자학정치론을완곡하게부정하였다.이를통해서본서가‘황극편’이라는제목을채택한이유를짐작해볼수있다.

『황극편』은1572~1772년까지국왕대별로편년체로편찬되었다.전체가13권인데,각권별로맨앞에주요당색을밝혔다.권1~3은‘동서’,권4~6은‘서남’,권7~13은‘노소’라고세로쓰기로표제를붙이고,권3에는‘남북’,권4에는‘대북·소북’,권6에는‘노소’,권13에는‘준탕(峻蕩)’이라고쓴작은글씨를괄호쓰기로붙여놓았다.이로써동인과서인,남인과북인,대북과소북,서인과남인,노론과소론이본서에서거론되는주요당색임을알수있다.왕대별로보면권1~권3은선조,권4는선조~현종,권5~권8은숙종,권9~권11은경종,권12~권13은영조대사건을수록하였다.

『황극편5』는『황극편』권12와권13을번역하고주해한책이다.권12는1725년(영조1)부터1727년까지의정치적사건들이수록되어있고,권13에는1728년에서1772년(영조48)까지를포괄하고있다.대체로영조대탕평을통해집권국가체제를안정시키려는노력을부각시켰는데,그것이얼마나지난한과정을거쳐서진행되었는지를잘보여주고있다.탕평정치는영조즉위초소론에대한노론의압박이거세지는와중에거중조정자로서국왕의정치적역할이보다절실해진시점에본격등장하였다.

영조는도사(都事)유응환(柳應煥)이백망(白望)의초사에서거론된조태구·유봉휘(柳鳳輝)등을모두국문하라고청하자이를거부하였지만노론은공세를멈추지않았다.이에영조는노론의요구를마냥거부할수없었다.당시복잡한영조의심경은방만규(方萬規)와이삼(李森)을처결하는과정에서잘드러났다.방만규는임인옥사에서이른바소급수에는인원왕후가관여한것처럼보이게하려는소론의불순한의도가담겨있다고공격하였다.이에영조는신하가거론할말이아니라고하면서처벌을명하면서도이를계기로노론으로정국주도세력을교체하려는의도를분명히드러냈다.그와중에도영조는김일경의심복이라는혐의를받는이삼에대한처벌은허용하지않았다.

이같이영조의소론보호노력이탕평의차원에서나왔음은이기진(李箕鎭)의상소를처리하는과정에서잘나타난다.이기진이역적에대한토죄가느슨하다고비판하자영조는수괴이외에는불문에부치겠다고받아쳤다.이때보기드물게,영조의뜻이화평과관대함을위주로하였기때문에이기진의상소가나왔다고짧은논평이덧붙여졌다.

이같은영조의탕평시도에도불구하고1725년겨울이후소론에대한공세는더욱강화되었다.노론은유봉휘·이광좌·조태억·조태구·최석항등을줄기차게탄핵하였다.1726년(영조2)에는임징하가경종대정치가어지러웠고,이를담당한조태구와유봉휘의무리는역적이라고주장하였다.이는소론과남인의거센반발을불러왔다.

1727년(영조3)에는노론의공격이더욱거세게전개되었다.삼사에서는조태구와최석항을노적하라고청하였으며,양사에서는심지어숙종묘정에배향된남구만·윤지완·최석정을출향하라고주장하였다.이에영조는정미환국(1727)을단행하여소론에게힘을실어주었다.김일경상소에연명한이른바소하(疏下)5적(五賊)에대한처벌을둘러싸고노론중신과논쟁을벌이다가신하들이군부를농락하고있다고화를내면서삼사를모두삭출하였다.이어서하교와비망기를내려전격적으로노론을몰아내고소론을등용하였다.영조는비망기에서노론의당파적행태를비판하고송인명(宋寅明)이주장한탕평에깨달은바있어서행한것이라고다시한번자신의의지를피력하였다.여기서는특히파붕당(破朋黨)의당위성을천명하고,남인들을등용해야한다고역설한송인명의발언을길게소개하였다.

이시기영조의탕평책은정치현안뿐만이아니라사문시비(斯文是非)에까지미치고있었다.영조는탕평책이숙종대이래의가법(家法)이라고천명하고,그핵심이파붕당에있다는사실을분명히밝혔다.그리고소론이병신처분(1716)을수정한것이나1725년이후소론을내친일을모두탕평의도리를넓히기위한것이라고주장하였다.

다음으로노론이세제(世弟)책봉에공이있다고내세우는것을비판하였고,이어서이광좌와조태억을역적이아니라고밝히면서도김일경소에연명한5인은엄히다스리지않을수없다고명시하였다.마지막으로민진원·정호등이당습만일삼았다고비판하면서과도한소론처벌을“임금을농락”한것으로규정하고,이를대경장한것에환국의의미가있다고그정당성을부여하였다.그뒤에탕평책에동조하는조현명(趙顯命)과오광운(吳光運)의주장을실어두었다.
권13에는1728년(영조4)부터1772년(영조48)까지영조탕평책관련주요사건을대략적으로소개하였다.대표적인사건으로기유처분(1729),경신처분(1740)과신유대훈(1741)등을들수있다.기유처분은탕평정치가본격적으로시작되었음을알리는국왕의대처분이었고,경신처분과신유대훈은노론4대신에대한사면과함께4색당파를모두등용하겠다는대탕평이제창되던사건이었다.먼저1729년에임인옥사로죽은노론4대신에대한처벌을달리해야한다는분등(分等)논의가제기되었다.이문제에대해영조는무신란(1728)이후노론·소론·남인에서모두역적이나왔다고하면서,건저와대리청정을주장한것은당론이아니라고주장하였다.결국세제의대리청정을청한연명차자는반역이아니며,김창집과이이명은그자손의이름이임인년옥사에서거론되었으므로관작을추탈하고,이건명과조태채는복관시키되서원을세우고시호를내리는일은허용하지말자고제안하였다.이는4대신을등급을나누어서처벌하여노론에게출사의명분을제공하려는시도였다.

1730년(영조6)봄에는영조가이광좌와민진원의손을잡고서로협력하여국정운영에참여해주기를부탁하였지만실패하는,유명한장면을길게기록하였다.이러한탕평노력에도불구하고이를둘러싼노·소론내찬반대립은지속되었다.거센노론의반발에1740년영조가이이명과김창집의관작을복구하라고하교하자이번엔송인명과조현명이반대하였다.그렇지만이사안은1741년김일경과목호룡의죄와함께김용택·이천기·이희지·심상길·정인중등의죄를기록한대훈(大訓)이반포되면서종결되었다.

『신유대훈』을기점으로본궤도에오른탕평정치는나주괘서사건(1755)으로극심한반발을사기도했지만영조말년에이르도록지속되었다.1764년영조는다시탕평론의정당성을천명하고,그것을처음주장했던박세채를문묘에종사하라하였다.1772년에는이광좌·최석항·조태억의관작을회복하라고특별히명하여이들의관작을복구한사실만을기록으로남겼다.

『황극편5』는영조탕평책이얼마나어려운우여곡절을거치면서진행되었는지를보여주기에손색이없다.조선후기정치가당쟁으로점철된혼란만있었던것이아니라탕평을통해서이를극복하려는노력도있었다는것을본서는시사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