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의 금석문과 목간 (양장)

한국 고대의 금석문과 목간 (양장)

$42.00
Description
‘문헌자료의 한계를 넘어 금석문과 목간을 통해 한국 고대의 역사상을 해명한다!

저자

김창호

저자:김창호
1950년경북구미출생,경북대학교대학원사학과수료,문학박사
경주대학교문화재학부교수,문화재청문화재전문위원,울산광역시문화재위원,경상북도문화재전문위원.
주요저서로『고신라금석문의연구』,『한국고대불교고고학의연구』,『삼국시대금석문연구』,『고신라금석문과목간』,『한국고대목간』,『신라금석문』,『고구려와백제의금석문』,『한국고대와전명문』,『고신라목간』등이있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고구려문자자료
제1절고구려금석문에보이는월경지한예
제2절삼국시대금동소형불의조상기특징-고구려의금동소형불조상기를중심으로-

제2장백제문자자료
제1절인각와로본백제미륵사의창건연대
제2절백제인각와가사비성시대에유행한까닭
제3절백제사택지적비에대하여

제3장고신라문자자료
제1절봉평비의이른바岑喙部의존부
제2절경산소월리透彫三面人物文甕의소유자
제3절1차사료를통해본신라의奴人
제4절4자이상으로된신라거울文字기와명문

제4장고신라목간
제1절대구팔거산성목간의私자에대하여-함안성산산성의목간의私자와함께-
제2절대구팔거산성출토목간3론
제3절대구팔거산성출토목간의石私해석-이수훈박사의비판에답함-
제4절함안성산산성목간의阿那와末那의의미
제5절함안성산산성출토목간의의미
제6절함안성산산성목간의제작연대
제7절함안성산산성출토역역관련목간
제8절부산배산산성목간의재검토-하시모토시게루박사의비판에답함-

제5장통일신라목간
제1절경주전인용사지출토龍王목간에대하여
제2절월지목간의洗宅에관등명이없는까닭
제3절월지출토목간의洗宅

제6장기타
제1절포항냉수리비의沙喙(部)至都盧葛文王은智證王인가?
제2절한국고대목간에보이는逆書-백제목간을중심으로-
제3절한국고대國字·失·丑·奴에대하여
제4절한국고대금석문에보이는越境地
제5절고신라문자와의출현가능성여부
제6절調露二年銘雙鹿寶相華文塼의銘文
제7절隅田八幡神社人物畵像鏡의진짜여부
제8절壬申誓記石의제작연대
제9절고고자료로본신라六部의위치비정문제
제10절고려시대기와명문의曆年代해설

책을맺으며

출판사 서평

‘문헌자료의한계를넘어
금석문과목간을통해한국고대의역사상을해명한다!

이책은40년간한국고대금석문과목간연구에매진해온저자김창호교수가연구공력을기울인역작이다.
우리삼국시대에문자사용을보여주는예는고구려가4세기수막새에중국의연호등을새긴것이최초다.이후414년의광개토태왕비,458년경의충주고구려비,491~500년사이에세워진집안고구려비등이있다.반면백제는4~5세기의금석문은없고,503년경의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와512년의무령왕릉연도폐쇄석전편(閉鎖石塼片)이있을뿐이다.백제칠지도(七支刀)의연대는일본학계의주장처럼369년이아닌5세기후반으로보아야한다.신라는5세기의황남대총북분의부인대명(夫人帶銘),441년의포항중성리비,443년의포항냉수리비,458년의경주금관총명문등이있다.
지금까지고구려에서는금석문만있고,목간은한점도출토되지않았다.백제에서는금석문과목간이모두출토되고있지만,목간은한성시대나웅진시대의예는없고,사비시대예가있을뿐이다.사비성에서출토된것은100점이상이나되어경주의목간수를넘어서며,앞으로도목간은더출토될가능성이있다.고신라시대왕경의목간수는통일신라시대의월지를합치면사비시대와거의비슷하다.경주의경우왕경에서목간이출토될가능성은거의없다.고신라의금석문수는고구려나백제보다많다는것이저자의결론이다.
우리고대의목간하면지방목간으로는함안성산산성목간을들수있다.그수가253점에달해백제나고신라의어느유적보다많다.그제작연대와사용용도등은학계에서도의견일치를보지못하고있는데,저자는7쌍의쌍둥이목간글씨체가다달라서하찰로사용된것외에1부를도착지인성산산성에서더만들었고,역역용과하찰용모두를장부로사용했다고보았다.
대구팔거산성목간은목간자체로볼때,6세기로보면초축때에는목간이없고,60년이지나목조집수지를만든것이다.금석문으로미루어보건대,팔거산성목간의연대는480년대로보았다.
백제의인각와는보통암키와혹은수키와의凸면에방형혹은원형의도장을눌러서만든것인데,현재까지2,857점이나확인되었고,주로사비시대의것이다.이것은고구려나고신라의문자자료에서는찾아볼수없는것으로,백제의토착신앙과관련된것으로보았다.
금석문자료는백제의경우6세기들어와서야보이는데,광개토태왕비같은국가차원의금석문은없다.반면신라는중성리비,냉수리비,봉평비,적성비,창녕비,북한산비,마운령비,황초령비까지8기나된다.백제비석으로는사택지적비가유명한데,도교사상을내포한글로문장은대단히어렵다.이것외에는비석이라부를만한것이없다.
신라의금석문을5세기로보는전거가되는것으로경주금관총출토이사지왕이란명문이있다.‘斯智王’은훈독과반절로넛지왕(458년사망)이되고,이는마립간시대왕들가운데눌지마립간과같다.따라서금관총의제작연대를458년,포항중성리비와포항냉수리비의연대도각각441년,443년으로보았다.통일신라가가까워지던567년북한산순수비부터불기시작한어려운한문열풍은568년마운령비와황초령비를거쳐서662년태종무열왕릉비,682년문무왕릉비에이르면절정에달한다.이비문들은내용이너무어렵고,역사적인생활사의복원에는한계가있다.
저자는신라금석문연구에서또다른큰문제로냉수리비의‘沙喙部至都盧葛文王’에근거해신라중고대의왕가운데실성왕과눌지왕의출신을탁부로보고,법흥왕역시탁부로보면서지증왕은사탁부출신으로본다는점을들었는데,왕이갈문왕을칭한유일한예다.원래탁부는왕족,사탁부는왕비족이다.종래문헌사학자들은모량부를왕비족으로보아왔다.그런데지증왕이사탁부출신이라면그의아들인법흥왕역시사탁부출신이되어야마땅하다.그런데봉평비에는탁부출신으로나온다.봉평비에는법흥왕의동생이라는입종갈문왕까지사탁부로나온다.봉평비의사부지갈문왕은울주천전리서석추명에서의입종갈문왕이아니라는사실이밝혀져지증왕의사탁부출신설은문제가있다는것이저자의결론이다.이문제는앞으로새로운자료의출현을기다릴수밖에없다.
또한충남부여군규암면신리에위치한사적제427호부여왕흥사는백제의대표적인왕실사찰이다.2007년목탑터에서발견된왕흥사지사리기에는백제창왕이죽은왕자를위해‘丁酉年二月十五日’에절을창건했다는명문이새겨져있어학계의주목을받았다.이정유년이란간지로577년이라는절대연대를갖게되었다.종래왕흥사목탑은무왕즉위1년(600)~무왕35년(634)사이에건립되었다고알려져있었기때문에이절대연대는문헌기록을의심하게만들었다.이점은문헌을중심으로한연구의한계를밝혀주는것으로중요한의미를갖는다.
저자는금석문연구의가장큰장점으로문헌자료비판의잣대가된다는점을꼽는다.실제로광개토왕비,냉수리비,적성비,진흥왕순수비등에대해서는문헌자료어디에도언급이없다.문헌자료의한계로여기저기틈이나있는한국고대의역사상을금석문과목간같은당시의자료가보완해줌으로써새롭게맞추는데이책이크게기여할수있을것이라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