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
‘자본주의 아바타’는 자본주의 문명의 성공작이었다. 자본주의 아바타(avatar)는 자본주의와 한 몸(동일체)이 되어 자본주의를 작동시키고 확대재생산하면서 그 문명의 힘을 스스로 발현하는 인간이었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메커니즘에 부응하는 생존전략을 습득하고 수행하면서 자본주의 문명의 영속을 위해 도구화되는 인생을 감내하는 인간이었다. 자본주의 문명이 안겨주는 유혹, 쾌락, 모험, 불안, 고통 등이 몸에 새겨질수록 자본주의의 히드라적 본성과 변신에 능숙한 존재로 거듭났다. 자본주의는 그 아바타들 덕분에 놀라운 생명력과 원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아바타는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라틴어로 Homo Capitalisticus, 자본주의적 인간)의 분신이다.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는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체화되고 내면화되어온 인간의 특질과 행위양식을 종합적으로 드러내는 전형(典型)으로 자본주의 문명이 어떠한 인간형을 배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정착되어온 사회구조, 시스템, 문화적 환경 등의 복합적 산물로 탄생한 인간의 역사적 특수성을 드러내는 인간으로 자본주의 문명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 변질시키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는 또한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인간의 요건과 행동방식에 걸맞는 인간의 전형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표준화되고 보편화되고 이상화되는 인간형이다. 그 대표적인 인간형은 자본주의에 가장 필수적인 ‘경제적 인간’이다.
호모 카피탈리스쿠스로부터 파생되는 분신인 아바타는 자본주의 체제로 조건이 지워진 현실과 시대적, 환경적 변화 속에서 다양한 개인적, 집단적 경험들을 통해 다양한 양태와 유형으로 생성된다. 자본주의 아바타는 자본주의 문명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생존조건에 어떻게 적응, 대응하며 살아왔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과 특성을 보이는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의 아류다. 아바타는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의 전형적 특성들 중에서 어느 부분을 어떻게 특화시키고 새롭게 변화시키는가에 따라 저마다 색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자본주의 아바타는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열망하든, 아니면 불신하고 반대하든, 자본주의 체제에 포획당한 채 생존 자체가 자본주의와 운명을 같이 하는 인간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수혜자로 선택받은 인간도, 피해자의 인생을 감내하는 인간도, 자본주의 문명을 예찬하며 즐기는 인간도, 자본주의 문명을 숙명과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인간도 다 같이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의 분신들이다.
이 글은 자본주의 아바타로 살아가는, 또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바타의 운명은 인간의 위기, 인류의 위기를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기는 지구의 위기를 불러오고 지구의 위기는 인간의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아바타들은 인간의 위기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알면서도 방치하거나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인간 위기의 위험수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이 글은 바로 이 물음을 던지고 그 실마리를 풀어가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주의 문명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며 다층적이고 누적적이다. 자본주의는 상업자본주의로부터 디지털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상대로 자본, 시장, 기술의 지배력을 확장시키면서 자연, 사회, 인간을 정복하고 변질시켜왔기 때문이다. 그 정복의 역사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에 따르면, 지구의 모든 것을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 집어삼키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의 폭식과 무차별 파괴로 치닫는 것이었다.
노예무역으로부터 성장한 상업자본주의, 인류문명을 물질문명과 쓰레기문명으로 뒤덮은 산업자본주의와 소비자본주의, 자본주의 제국을 건설한 식민자본주의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글로벌 자본과 글로벌 시스템으로 인류를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신자유와 노동착취의 자유를 극대화시킨 신자유주의, 인간의 문화를 상품과 산업으로 변질시킨 문화자본주의, 인간을 자본과 돈의 노예로 만드는 투기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 전 인류를 기술에 굴복시키는 감시자본주의와 디지털 자본주의 등이 인간의 위기를 심화시켜온 자본주의 문명의 핵심이었다. 자본주의의 많은 이름만큼이나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의 유형들은 다채롭고 그 아바타들의 모습도 천태만상이었다.
자본주의 아바타는 자본주의를 추종하며 배우고 닮아가고 재생산하는 존재였다. 이 과정에서 자본의 탐욕은 아바타의 탐욕으로 전이되고 증폭되었다. 자본의 무도덕성은 도덕 불감증의 아바타를 배양했다. 자본의 인간착취 역사는 착취 생존법에 유능한 아바타를 육성했다. 시장의 상품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면서 오직 시장승리에만 매달리는 아바타들이 양산되었다. 시장은 인간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동원하고, 아바타는 마케팅을 생존방식으로 터득하고 실천하면서 자신마저도 마케팅 상품으로 거래하는 마케터로 변모했다. 시장의 문법과 용어는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문법과 언어로 확산되고, 인간사회는 시장에 포섭되어 그 전유물로 전락했다. 자본은 기술과 합세하여 초권력으로 인간을 압도했다.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고 똑똑해지는 만큼 아바타는 학습도 두뇌활동도 점점 기계에 외주화하는 습관에 길들여졌다. 기계의 전능은 아바타의 무능을 촉진시켰다. 아바타의 운명은 이처럼 속절없이 자본과 시장과 기술의 초권력에 맡겨졌다. 이는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를 인간의 표준형으로 보편화해온 자본주의 전체주의의 결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아바타는 자본주의의 ‘히드라적 변신’과 그 괴물성을 따르고 모방하는 인간이었다. 자본주의 괴물성은 인간의 괴물성으로 확장하면서 그 동력을 배가했다. 자본주의 아바타는 자본주의의 카오스적 변신에 기여하는 자가 발전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생물체가 되었다. 그 히드라적 괴물성이 빚어내는 폐해들은 인류와 지구의 존재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치명적 대가는 자본주의 문명의 전체주의를 의식하지도, 비판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하는 아바타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자본주의의 히드라적 괴물성에 포획되고, 매혹당하고, 도취되면서 그 괴물성을 자신의 것으로 주체화하는 아바타들이 늘어날수록 인간성 자체가 함몰되는 위험이 가중되었다. 자본주의 아바타들은 괴물성으로 무장한 변종들로 거듭나면서 더 강한 생존본능으로 치열한 생존싸움을 벌여야 했다. 인간성을 괴물성으로 도치시키는 자본주의 문명은 인간의 자기파괴를 불러오는 반인간적 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문명의 전체주의 하에서 태어난 세대일수록 아바타의 숙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들이 태어난 시점부터 지배해온 문명은 점점 더 불가항력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인간과 사회와 자연이 왜, 어떻게, 자본주의 전체주의 철창 속에 갇히게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그 철창까지도 문명의 불가피한 산물로 받아들이도록 종용당하고 훈육되지 않겠는가? 그 훈육과 희생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인간의 자기 파괴는 심화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본주의의 카오스적 변신과 그 속도전에 따라 개인별, 집단별, 세대별 격차가 커질수록 카오스적 상황은 점점 더 강화되지 않겠는가? 인종, 지역, 국가 간 격차가 심해질수록 자본주의 아바타들은 극심한 난국에 처할 것이 아닌가?
특히 한국은 반세기 이상 경제전쟁의 열기로 고전 분투한 끝에 이른바 ‘선진국 클럽’에 가입했고, 그 유례없는 속도전과 그 압박으로 초래된 갈등적 환경 속에서 자본주의 아바타들이 양산되어왔다. 서구 자본주의 문명으로부터 물밀듯이 수입된 문물의 홍수와 함께 자본주의의 카오스적 변신은 선진국 ‘따라잡기’ 경쟁을 가열시켰다. 자본주의 아바타들은 그 현란한 변신을 좇아가기에 숨가쁜 막장의 일상과 각박한 인생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선진국의 아바타들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여유나 자기성찰은 사치와도 같았다. 한국인은 오로지 모범적 아바타로 거듭나기 위해 온갖 고통과 인내와 자기착취를 당연한 생존전략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닥쳐온 이른바 ‘선진’문명의 ‘쓰나미’ 덕분이었다.
서구 자본주의 문명을 국가와 개인의 이상적 모델로 삼아 한국적 자본주의 성장역사를 만들어온 지난한 여정은 바로 인간 자체의 재구성, 즉 아바타로의 재사회화와 자기변신의 과정이었다. 자본주의 후발국의 아바타들은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는 충격과 고행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면, 한국의 아바타들은 바로 후발국의 도약으로 일구어낸 자본주의 성장과정의 카오스적 경험으로부터 생성된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의 한국적 분신들이었다. 이들은 ‘서구’, ‘선진’, ‘자본주의’, ‘문명’, 이 4가지의 생소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국의 전통문화와 이념대립과 분단냉전의 역사적 특수성과 접목되면서 생성된 화학적 변이의 산물이었다. 한국의 아바타들은 자본주의의 히드라적 변신과 그 괴물성이 한층 더 큰 혼란과 불안, 모순과 갈등을 빚어내는 토양에서 물불 안 가리고 그 모든 것을 격렬하게 몸과 마음에 새겨온 자본주의 후발국 아바타의 특성과 한국적 특이성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 은퇴자의 목소리가 가슴에 울려온다. 〈“나는 거의 늘 나 아닌 것들이나 나 밖의 것들을 찾아다니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나는 거의 늘 그 어딘가로 묻혀서 가지 않았던가. 나는 거의 늘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그 어딘가로 묻어서 가거나 파묻혀 지내지 않았던가. 그러다가도 아주 가끔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해도 스스로에게 너무 낯설어 쩔쩔매지 않았던가. 이게 나인가? 그래서 다시 급하게 자신 밖으로 나와 자신이 아닌 것에 침몰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나를 찾는 순간의 나는 꿈꾸는 나도 아니고, 술 취한 나도 아니고, 속고 있는 나도 아니고, 속은 거 같아서 안달하는 나도 아니고, 사소한 일에 억울한 나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더 잘나고 싶고 더 있어 보이고 싶은 나도 아니고, 죽고 싶어 하는 나도 아니고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나도 아니다.”〉
이 세상에 맞추어 숨가쁜 일상에 허덕이며 열심히 살아온 인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