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그건 골치아프고 말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지. 난 관심없어. 페미니스트? 피해의식 투성이에 목소리 큰, 못 생긴 여자들 아냐?
21세기에 이게 웬 시대착오냐고? 당신이 만약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길. 혹시 혼자 있을 때면 마음 저 밑바닥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었는지? 여성의 권익이 높아졌으며, 이제는 남자들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고, 아내에게 맞고 산다는 남편도 있는 세상인데.....왜 페미니즘이 아직도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왜 페미니스트란 여자들은 걸핏하면 목소리를 높여서 시끄럽게 여성해방 운운 하는 것일까? 하지만 당신이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을 읽어본다면, 그리고 이 글이 처음 나온 시기가 1983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세상은 옛날에 비해 그렇게 나아지거나 바뀌진 않았구나...특히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의 공동 창간인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사실 별도의 설명이 없는, 가히 전설적인 페미니스트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전설이라는 구태의연한 말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1934년 생으로 올해 68세인 그녀는 아직도 열정적으로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후배 페미니스트들의 귀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낸 여러 권의 저서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 바로 1983년에 처음 나왔던 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이다. 이 책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 그 자체로 사회현상이 되며 고전으로 자리잡았고, 1995년 개정된 제2판도 변함없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을 패러디한 책도 출간되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선 결코 즐겁기만 한 소식은 아니다. 이 책이 인기가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여성을 둘러싼 상황이 그리 나아지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자신은 이 책의 제2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후 10년 넘게 계속 출판되고 있다는 사실에 작가로서 보람을 느낀다.(...) 게다가 처음 이 책이 나온 때로부터 12년 전에 쓴 글(1970년대 초를 말한다-편집자 주)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놀랄 일이다. (...) 그러나 운동가로서의 나는 이 책이 아직도 읽히고 있는 데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독자들 대부분이 이 책의 내용이 아주 시대에 뒤떨어 진 것이라 느낀다면 더 큰 보람을 느낄 것 같다.(저자 서문 중에서)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권의 책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일상의 반란은 2002년을 살아가는 한국의 우리 독자에게도 충분히 유용하다. 이 책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오랜 시간에 걸쳐 쓴 여러 편의 글들을 모아서 만들었다. 현실문화연구에서는 지난 1995년 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에 실린 글 몇 편을 뽑아서 『여성망명정부에 대한 공상』을 펴낸 바 있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일상의 반란은 원저를 새롭게 완역하여 두 권으로 펴낸 것이다. 보다 대중적이며 쉽게 읽힐 수 있는 글들을 모은 것이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이고, 그보다는 조금 무겁게 읽힐 수 있는 글들이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일상의 반란으로 묶였다. 후자도 그 내용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글은 아니다. 다만, 후자의 글들은 여성 운동가로서의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좀 더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묶였을 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모종의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당연히 딱딱하고 골치 아픈 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은 내용으로뿐 아니라 문장으로서도 매우 감동적이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그녀의 글은 매우 설득력 있고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 그 글의 힘은 진실과 신념에서 오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헌신. 부끄러울 수 있는 개인사적인 부분도 과감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용기. 그녀는 르포를 쓰기 위해 플레이 보이 클럽의 바니걸로 잠입해 일하기도 하고, 우울한 성장과정과 어머니에 대해 고백한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치유하며 다른 여성들을 뜨겁게 끌어안는다. 그녀의 이런 헌신과 열정은 전염력이 너무나 강해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을 읽다 보면 때로는 분노에 몸이 떨리기도 하며 때로는 연민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또 평소 자신이 고민해왔거나 의아했던 문제가 그녀의 글에서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한다.
당신이 여성으로 태어나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 수많은 유형 무형의 차별을 경험하며 살아왔다면 그런 공감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났다 해도, 당신이 사랑하는 주변의 수많은 여성들(어머니, 누이, 아내, 연인, 딸...)의 삶을 되새기면서 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리고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이 책은 반드시 한번은 읽어야 한다. 그건, 너무나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며, 한 쪽의 절반 없이는 다른 절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