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중): 인조반정 (선조ㆍ광해ㆍ인조 시대 균형외교 설계자 | 이계홍 역사소설)

장만(중): 인조반정 (선조ㆍ광해ㆍ인조 시대 균형외교 설계자 | 이계홍 역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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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선조·광해·인조 시대 균형외교 설계자이자 이를 집행한 군사 전략가로 일세를 풍미한 낙서(洛西) 장만(張晩) 장군에 대한 장편 역사소설이다. 상권 ‘균형외교전쟁’(총 296쪽), 중권 ‘인조반정’(총 232쪽), 하권 ‘호란의 격랑 속으로’(총 240쪽) 등 총 3권으로 이뤄진 이 소설은 “이 시대 왜 장만 장군이어야 하나?”라는 화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역사소설 ‘장만’의 저자인 이계홍 작가는 “장만 장군은 조선조의 대표적 국방전문가로서 임진왜란-정유재란-심하전투-이괄의 난-정묘호란(1627)-사후의 병자호란(1636)을 경고한 난세의 위기를 극복한 위인이다. 장군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라며 “조선·명나라·후금·일본의 동양 4국 각축전에서 중립외교와 균형외교를 설파한 장군의 군사외교 철학을 오늘날의 현실에서 더욱 반추해볼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주지하다시피 선조-광해-인조로 이어지는 조선조 중·후반기는 이른바 ‘난세의 시기’였다. 선조대의 기축옥사(1589)를 기점으로 지식인 사회의 한 축이 무너져 국가적으로 좌절감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3년이 지난 후 불행히도 임진왜란(1592)이라는 우리 민족 최대의 국난을 겪어야 했다. 이어서 정유재란(1597)으로 우리의 산하는 초토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광해대에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고,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이괄의 난(1624)-정묘호란(1627)과 그의 사후 뒤이어 병자호란(1636)으로 이어지는 처절한 역사적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50년 가까이 조선은 외침(外侵)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신음해야 했다.

이때 무장으로 전장 최일선에서 맹활약한 장군이 바로 장만(1566-1629)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선조-광해-인조, 즉 세 왕이 나라를 경영하던 시기로 어쩌면 조선이 한반도에서 사라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이계홍 작가가 장만 장군의 실체를 간파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 난 발발 당시 야전군사령관(팔도부원수)으로 활약한 충무공 금남군 정충신 장군 이야기를 소설로 집필하면서다. 정충신 장군의 군인 정신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상관인 장만 장군에게서 물려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장만 장군을 알게 된 작가는 장만 장군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장만 장군은 병조판서, 형조판서, 팔도도원수, 팔도도체찰사, 팔도도원수를 지낸 조선조 최고의 문·무관으로서 단순히 싸움만 하는 장군이 아니었다. 무장에게서 보기 드문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지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어서 국가 존립과 발전을 위한 균형·중립외교를 설파했다. 조선조·명나라·후금·일본 등 동북아 4국의 격변하는 전환기에 그가 주장하고 설파한 길을 따라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물줄기는 상당 부분 달라졌을 것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그의 사위 최명길과 김신국, 정충신, 남이흥, 이시백, 장유 등 당대 실천적 지성 인맥이 활동 영역을 확장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초라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저자가 이 역사소설을 쓰면서 절감한 교훈이다.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권율 장군을 꼽으면서, 동시대에 활약한 장만 장군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박하다는 것이 장만을 연구한 학자들의 중론이다.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도 장만 장군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다. 이는 조선 시대 정치 및 인물 연구가 학문적 계보 중심이거나 문벌과 당쟁사 중심으로 엮인 영향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성리학적 예론에 충실한 문신이나 당파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을 주로 다룬 결과, 비당파적이자 비주류의 무계보인 그가 역사적 평가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다고 작가는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장만 장군이 개혁파로서 비주류로 살아오다 보니 주류 사회에서 배척받은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성리학이 지배하는 국가 체제에서 개혁은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곤 했다. 물론 그 역시 문과 무를 겸비한 사대부로서의 한계가 분명 있었지만, 당대 꽉 막힌 나라에서 국방 개혁과 균형외교를 주장한 것은 획기적이었으나, 주류 사회에는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명나라 사대만을 주장하는 사대부에 반기를 든 비주류의 삶은 고단할 뿐이었다. 수구적 경쟁으로 체제를 이끌어가는 풍조였으니 나라를 개조하자거나 균형외교를 펼치자는 주장은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만은 광해의 소년 시절 왕도를 가르친 스승이고, 중립외교를 설계해준 사부였다. 동시에 임금이 된 광해가 전쟁 후유증을 수습하지 않고, 무리한 궁궐 공사 진행과 미신에 의존한 국사 운영, 계모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하고, 그 어린 아들 영창대군과 형제들을 죽이는 패덕을 자행하자 19차례나 상소문을 올려 부당함을 지적한 인물이다. 임금의 스승이었지만, 사사로운 사제지정(師弟之情)의 관계를 버리고 시대의 양심으로서 소명을 다했다.

장만 장군의 무장으로서의 행적은 이순신 장군이나 권율 장군 못지않다고 평가되나 그의 국방철학과 업적이 묻힌 것은 위와 같은 양심적 행적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조선조가 멸망할 때까지 그는 사위 최명길, 수하 무장 정충신, 남이흥과 함께 역사에서 소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런데 오늘날 중립·균형외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그가 소환되었다. 새삼 그의 국방철학을 음미해볼 때다.

이계홍 작가는 “장만 장군의 개혁적 행적이 묻혀선 안 된다는 작가적 소명이 있었다”라며 “그는 문신의 신분이었지만 무인이 되어 현실에 맞는 국방 전략으로 국난 극복을 위해 헌신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뚜렷했다”라고 밝힌다. 작가가 장만 장군에 빠져든 것은 현실묵수적이거나 체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현실타파적 개혁정신이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

이계홍

전남무안출생
동국대문리대국문학과졸업,동대학원석사졸업,동대학원박사과정수료

동아일보문화부기자문화부차장,문화일보문화부장체육부장사회2부장,특집부장,서울신문논설위원수석편집부국장,통일문제연구소장(국장급)

서울여대강사(사고와표현,인간과문학),용인대겸임교수(언어와문학),동국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객원교수(매스컴문장연습,고급기사작성법),한국보건사회연구원연구기획팀전문위원역임.

1974월간문학신인상소설부문당선으로문단데뷔

☞창작집
소설집‘틈만나면자살하는남자’(1992.책나라),중편집‘비껴앉은남자’(1993.신원문화사),소설집‘밑천’(1994.문학아카데미),장편소설‘초록빛파도’(1994.아사달의꽃),소설집‘서울노마드’(2016.문학나무),역사장편소설‘깃발’5권(2021.1범우사),장편소설‘고독한행군’4권(2022.8범우사).역사장편소설‘격랑시대’3권(2023.3글로벌마인드지엠)

☞인물평전
‘이계홍의휴먼스토리’(2004.모아드림·‘신동아’기획연재물‘이사람의삶’을묶은인터뷰집),인물전기‘장군이된이등병최갑석’(2005.화남출판사·국방일보연재이등병이장군이된최갑석이야기),인물전기‘빨간마후라하늘에등불켜고’(2006.6이미지북ㆍ국방일보연재물.전공군참모총장장지량장군이야기),인물전기‘시대를넘어역사를넘어’-전주월한국군사령관채명신장군일대기(2007.1-2007.10국방일보연재),인물전기‘광부30년,끝없는그리움’-채탄부오정균이야기(2021.한국인물연구소)

목차

6장병조판서장만
(1)궁궐공사
(2)상소문
(3)위태로운왕
(4)파직된스승
(5)설득과설득

7장뜨거운정사,광해와김개시
(1)권력의실체
(2)김개시의역할
(3)광해와김개시
(4)수상한동태
(5)마룻장아래의흉계
(6)자중하라
(7)장만의철학
(8)최명길과장만
(9)거사직전

8장가장긴하루,인조반정
(1)이상한소문
(2)북이울리고
(3)궁문돌파
(4)왕의눈물
(5)벼랑끝으로
(6)인목대비
(7)장수의일념
(8)후금의상황
(9)장수의질투심

9장팔도도원수
(1)여전히시끄러운조정
(2)팔도도원수장만
(3)출정식
(4)반갑지못한실태
(5)후금의막영지
(6)다이샨의생각
(7)조선장수들의대면
(8)우리는우리의

10장이괄의난
(1)부원수이괄
(2)꿈을꾸미다
(3)한숨
(4)부추기는자
(5)내응하는자
(6)하늘로칼을쳐들다
(7)밀서
(8)이윤서의선택

출판사 서평

선조·광해·인조시대균형외교설계자이자이를집행한군사전략가로일세를풍미한낙서(洛西)장만(張晩)장군에대한장편역사소설이다.이소설은“이시대왜장만장군이어야하나?”라는화두에대한해답을제시해준다.

역사소설‘장만’의저자인이계홍작가는“장만장군은조선조의대표적국방전문가로서임진왜란-정유재란-심하전투-이괄의난-정묘호란(1627)-사후의병자호란(1636)을경고한난세의위기를극복한위인이다.장군이우리곁에있다는것은우리에게축복”이라며“조선·명나라·후금·일본의동양4국각축전에서중립외교와균형외교를설파한장군의군사외교철학을오늘날의현실에서더욱반추해볼인물이다”라고평가했다.

주지하다시피선조-광해-인조로이어지는조선조중·후반기는이른바‘난세의시기’였다.선조대의기축옥사(1589)를기점으로지식인사회의한축이무너져국가적으로좌절감이팽배하던시기였다.3년이지난후불행히도임진왜란(1592)이라는우리민족최대의국난을겪어야했다.이어서정유재란(1597)으로우리의산하는초토화되었다.설상가상으로광해대에인조반정(1623)이일어나고,인조대에이르러서는이괄의난(1624)-정묘호란(1627)과그의사후뒤이어병자호란(1636)으로이어지는처절한역사적격랑속으로빨려들어갔다.50년가까이조선은외침(外侵)의소용돌이에휘말려신음해야했다.

이때무장으로전장최일선에서맹활약한장군이바로장만(1566-1629)이다.그가활동했던시기는선조-광해-인조,즉세왕이나라를경영하던시기로어쩌면조선이한반도에서사라질수있는절체절명의위기에직면했던시기였다.

이계홍작가가장만장군의실체를간파하게된것은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난발발당시야전군사령관(팔도부원수)으로활약한충무공금남군정충신장군이야기를소설로집필하면서다.정충신장군의군인정신은바로그의스승이자상관인장만장군에게서물려받았음을확인할수있었다.이렇게장만장군을알게된작가는장만장군관련한방대한자료를수집하고,분석했다.

장만장군은병조판서,형조판서,팔도도원수,팔도도체찰사,팔도도원수를지낸조선조최고의문·무관으로서단순히싸움만하는장군이아니었다.무장에게서보기드문시대를꿰뚫어보는예지력과통찰력을지니고있어서국가존립과발전을위한균형·중립외교를설파했다.조선조·명나라·후금·일본등동북아4국의격변하는전환기에그가주장하고설파한길을따라갔다면우리나라역사의물줄기는상당부분달라졌을것이라고작가는주장한다.그의사위최명길과김신국,정충신,남이흥,이시백,장유등당대실천적지성인맥이활동영역을확장했더라면우리나라역사가초라하진않았을것이라는게저자가이역사소설을쓰면서절감한교훈이다.

임진왜란하면이순신·권율장군을꼽으면서,동시대에활약한장만장군에대해서는그평가가박하다는것이장만을연구한학자들의중론이다.중고교국사교과서에도장만장군에대한언급이많지않다.이는조선시대정치및인물연구가학문적계보중심이거나문벌과당쟁사중심으로엮인영향때문이라는게저자의생각이다.성리학적예론에충실한문신이나당파의중심에섰던인물들을주로다룬결과,비당파적이자비주류의무계보인그가역사적평가에서소외된측면이있다고작가는지적한다.

한편으로는장만장군이개혁파로서비주류로살아오다보니주류사회에서배척받은측면이없지않다.당시성리학이지배하는국가체제에서개혁은국가에대한도전으로인식되곤했다.물론그역시문과무를겸비한사대부로서의한계가분명있었지만,당대꽉막힌나라에서국방개혁과균형외교를주장한것은획기적이었으나,주류사회에는먹히지않았다.그래서명나라사대만을주장하는사대부에반기를든비주류의삶은고단할뿐이었다.수구적경쟁으로체제를이끌어가는풍조였으니나라를개조하자거나균형외교를펼치자는주장은배척받을수밖에없었다.

장만은광해의소년시절왕도를가르친스승이고,중립외교를설계해준사부였다.동시에임금이된광해가전쟁후유증을수습하지않고,무리한궁궐공사진행과미신에의존한국사운영,계모인목대비를폐서인(廢庶人)하고,그어린아들영창대군과형제들을죽이는패덕을자행하자19차례나상소문을올려부당함을지적한인물이다.임금의스승이었지만,사사로운사제지정(師弟之情)의관계를버리고시대의양심으로서소명을다했다.

장만장군의무장으로서의행적은이순신장군이나권율장군못지않다고평가되나그의국방철학과업적이묻힌것은위와같은양심적행적때문이었다고본다.그래서조선조가멸망할때까지그는사위최명길,수하무장정충신,남이흥과함께역사에서소외되는불운을겪었다.그런데오늘날중립·균형외교가절실히요구되는시점에그가소환되었다.새삼그의국방철학을음미해볼때다.

이계홍작가는“장만장군의개혁적행적이묻혀선안된다는작가적소명이있었다”라며“그는문신의신분이었지만무인이되어현실에맞는국방전략으로국난극복을위해헌신한군사전략가로서의면모가뚜렷했다”라고밝힌다.작가가장만장군에빠져든것은현실묵수적이거나체제에안주하는것이아니라끊임없는현실타파적개혁정신이중심이되었던인물이었기때문이라고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