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사명대사-이에야스의 길, 그 길을 걷다)는 2007년에 처음 시작한 행사인 (21세기 조선통신사 한·일 우정 걷기)의 열 번째 걷기 대장정의 동행기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도쿄까지 1,200km(3,000리)를 53일간에 걸쳐 조선통신사 선조들의 옛길을 걸어가는 이 행사가 열린 2025년은 을사늑약 120주년이자 해방 80주년에 한·일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6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사명대사와 일본 이에야스의 이니셔티브로 시작된 외교 문화 사절이기에 조선통신사의 길은 다름 아닌 ‘사명대사(泗溟大師)-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길이기도 하다.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 마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 올이라도 탐하지 말라”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사명대사는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승려의 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의승(義僧: 의로운 승려 즉 ‘승병·僧兵’을 이르는 말)을 이끌고 전공(戰功: 전투에서 세운 공로)을 세운 그는 전후의 대일(對日) 강화 조약 등 공훈을 세워 한반도의 평화 시대를 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 시대 16세기 후반에 일세를 풍미한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는 당대의 고승이자 도승으로 그의 법력에 관한 무수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명대사는 훗날 일본에 특사로 가서 갖가지 도술을 부려 왜인들을 놀라게 하고 생불(生佛: 살아있는 부처)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의 스승 서산대사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 중에서 그중 4대 제자로 알려진 사명대사 유정(惟政)을 비롯해 언기(彦機)·태능(太能)·일선(一禪) 중 편양선사 언기에게 그의 법통을 물려줬다. 수제자였던 사명에게 법통을 전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비록 백척간두에 처한 조국을 국난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할지라도 임진왜란 중 불교에서 금하는 살생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명대사는 그후 임진왜란 당시 존망(存亡: 존속과 멸망)의 기로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앞장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적진 일본으로 들어가 이에야스와 일대일 담판 협상을 벌여 그에게 인격적인 감동·감화를 주어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조선의 국익 증진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일(朝日) 양국 사이 평화 시대를 연 불세출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 열도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선 이에야스는 1599년 이미 쓰시마 번주를 통해 조선과 화평을 맺고 싶다는 전갈을 조선 조정에 보냈다. 그는 1603년 쇼군에 취임한 후 정식으로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 특사로 파견한 사명대사는 공식적으로 조선통신사 사절단을 파견하기 2년 전인 1605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쇼군 이에야스를 만났다.
당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전쟁에 자신은 관동 지역에 머물러 전쟁에 일체 간여한 바 없어서 조선과 원수진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양국 사이 외교적 교류를 재개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사명대사에게 강력하게 피력했다. 양국을 대표한 두 영웅이 서로를 알아보고 흉금을 터놓고 당당하게 대좌한 이 자리에서 통 큰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야스는 ① 일본은 조선을 다시는 침략하지 않을 것이며 ② 일본에 끌려온 피로인(被擄人: 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을 모두 송환하고 ③ 전란 중 선릉·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조선에 인도하겠다고 약속하고 상호 화평의 상징으로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포로 3,000여 명을 사명대사와 함께 귀국하도록 통 크게 배려했고 그 후 총 7천여 명의 피로인들을 추가로 송환하는 등 총 1만여 명의 포로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조선으로서도 북으로는 만주족이 발흥해 명나라와 조선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라 남해 일대를 안정시키는 것은 급선무였다. 이에야스로서도 국교 재개에 응하지 않는 명나라 대신 조선과의 국교 회복으로 후방을 안정시키는 성과를 바랐다. 아울러 통신사를 초청함으로써 막 출범한 에도막부의 권위를 세우고 7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 열도 경제 재건에 매진해 나가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에야스는 100년에 걸친 혼란의 센코쿠(戦国)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로운 통일국가를 만들어 그의 꿈이자 대망을 이루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오랜 전쟁으로 삭막해진 ’칼의 사회‘, ’약육강식·하극상의 사회‘를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질서를 준수하는 평화의 나라 그 토대를 세우기 위한 통치 철학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이런 평화 국가의 모델이 이웃 조선이었고 그들의 국정 철학인 성리학을 염두에 두고 조선을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조선의 성리학에 오래전부터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참고로 전남 영광 출신의 유학자인 강항은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이후 포로로 있는 동안에 후지와라(藤原)에게 주자학을 전수해 그 후 일본에 퇴계학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유학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크게 미쳤다.
이에야스는 에도막부의 국정 이념을 조선의 퇴계가 확립한 성리학으로 삼아 성리학의 본고장에서 파견하는 수준 높은 통신사 일행들과의 교류를 통해 불모지에 가까운 일본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올려 일본 민중의 의식개혁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하지 않은 이에야스에 대해 조선 조정은 호의적이었다. 일본과의 화친과 국교 정상화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1607년 조선 조정이 첫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함으로 성사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607년 철천지원수의 나라 일본에 여우길을 정사로 하는 467명의 외교사절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조선 백성들의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1차부터 3차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피로인 송환을 위한 회답 겸 쇄환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4회부터 정식으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은 시기에 국교 재개를 의미하는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심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1차 통신사의 정사 여우길은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당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에야스가 거처하는 순푸성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이후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양국 간에는 평화 시대가 펼쳐졌다.
인접한 국가끼리 3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전쟁 없이 지낸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에도막부의 쇄국정책 아래에서도 조선과 국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최고 권력자끼리 소통하며 다양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짐으로 일본은 번영과 평화의 에도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21세기 조선통신사 서울-도쿄 우정 걷기‘ 행사는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이 되는 2007년 한국체육진흥회와 사단법인 일본걷기협회가 공동으로 기획해서 2년마다 실시해 왔다. 우리의 옛 조상들이 한·일 선린 우호 관계를 이루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그 정신과 문화적 유산을 계승·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이 책의 저자는 20대 후반에 당시 베스트셀러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 壯八)의 20권짜리 〈대망〉에 도전한 적이 있는데 일본인의 긴 이름에 질려서 한 권을 채 읽지 못하고 덮은 적이 있었다. 그 책을 70세에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너무 재미가 있어서 32권짜리 대하소설을 단숨에 읽었다고 한다. 아울러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매력에 푹 빠져 그의 흔적을 찾아 일본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염원했을 정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1543~1616)으로 처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밑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뒤 도요토미 일족을 진멸하고 전국(戰國)을 제패하여 에도 막부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일본은 물론 중국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2023년에 우리나라의 1인당 GDP가 일본을 추월했다. 필자가 현역에서 일본 관련 일을 하던 1980~90년대만 해도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가 일본과 동일한 라인에 서 있을뿐만 아니라 일본을 크게 앞지른 분야도 나타났다.
저자는 지난 2019년에 60여 일에 걸쳐 일본 열도 1,111km를 도보로 종단한 이후 그해 11월에 출간된 책 [일본은 원수인가, 이웃인가]를 일본의 지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오사카와 도쿄를 방문했다. 그 직후 바로 엄습해온 코로나 사태로 무려 5년 넘게 일본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평생을 일본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그로서, 한번 새로운 각오로 일본의 영웅 이에야스의 대망(大望)이 서려 있던 그 길을 걸으며 오늘날 일본 열도의 현주소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조금 여유 있게 시간을 잡아 일본을 찾아 현장을 둘러보고 시민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을 새롭게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2024년 12월경 ‘제10차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서울-도쿄 우정 걷기 행사’에 추가 회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신청했다.
그리고 저자는 제10회 조선통신사 대장정의 출발을 앞두고 선상규 회장으로부터 정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수락했다. 한국 측 참가자 가운데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지난 세월 일본과 경제협력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왔다는 게 지명된 이유였다. 그런데 출국 임박해 선 회장의 건강 악화로 결국 단장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이번 걷기 행사에 참가한 양측 대원은 구간 참가자를 포함 총 69명에 이르렀는데 일본 측 대원들의 고령화와 물가 인상 등 여러 사정으로 이번 10회 조선통신사 우정 걷기가 사실상 마지막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하고 있었다.
이번 우정 걷기 행사에 함께한 대원들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었고 10회 연속해서 참가한 엔도 야스오 대장이 걷는 내내 완벽하게 선도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씨가 도와주었고 우리 대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일본 대원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힘입어 사고 없이 목적지 도쿄 히비야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1,200km(3,000리)의 길을 걷는 동안 조선통신사 선조들의 노고는 물론 조선통신사를 초청함으로 조선과의 평화와 번영의 에도시대를 활짝 연 이에야스의 인생 여정을 여러 측면에서 목도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라는 그 의미와 함께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라며 당시 거센 국민의 반대 속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라는 결단을 내렸던 박정희 대통령의 고뇌에 공감하고 그 후 대한민국의 오늘날 경제 기적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그동안 수백 회나 일본 열도를 다녀왔으나 장장 53일이라는 긴 기간을 일본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걷고 교류하는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고. 24시간을 함께하며 일본과 일본인들의 속살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대원들을 인솔하고 일본 측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양국의 각종 환영 행사에서 단장으로서 혹은 정사로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완수할 수 있었다.
이번에 도쿄까지 무사히 완보한 데에는 일본측 엔도 대장의 도움이 컸다. 아사히신문 간부 출신인 그는 술을 매개로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교류하는 것을 즐긴다. 술을 통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남다른 그의 소탈한 성격에 힘입어 즐겁게 걸으며 우리는 흉금을 터놓는 친구가 되었다.
저자는 지난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았고 다가올 새로운 60년도 앙국이 조선통신사의 성신교린 정신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공존공영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우리들이 흘린 땀방울이 그 여정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사명대사와 일본 이에야스의 이니셔티브로 시작된 외교 문화 사절이기에 조선통신사의 길은 다름 아닌 ‘사명대사(泗溟大師)-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길이기도 하다.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 마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 올이라도 탐하지 말라”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사명대사는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승려의 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의승(義僧: 의로운 승려 즉 ‘승병·僧兵’을 이르는 말)을 이끌고 전공(戰功: 전투에서 세운 공로)을 세운 그는 전후의 대일(對日) 강화 조약 등 공훈을 세워 한반도의 평화 시대를 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 시대 16세기 후반에 일세를 풍미한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는 당대의 고승이자 도승으로 그의 법력에 관한 무수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명대사는 훗날 일본에 특사로 가서 갖가지 도술을 부려 왜인들을 놀라게 하고 생불(生佛: 살아있는 부처)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의 스승 서산대사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 중에서 그중 4대 제자로 알려진 사명대사 유정(惟政)을 비롯해 언기(彦機)·태능(太能)·일선(一禪) 중 편양선사 언기에게 그의 법통을 물려줬다. 수제자였던 사명에게 법통을 전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비록 백척간두에 처한 조국을 국난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할지라도 임진왜란 중 불교에서 금하는 살생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명대사는 그후 임진왜란 당시 존망(存亡: 존속과 멸망)의 기로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앞장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적진 일본으로 들어가 이에야스와 일대일 담판 협상을 벌여 그에게 인격적인 감동·감화를 주어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조선의 국익 증진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일(朝日) 양국 사이 평화 시대를 연 불세출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 열도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선 이에야스는 1599년 이미 쓰시마 번주를 통해 조선과 화평을 맺고 싶다는 전갈을 조선 조정에 보냈다. 그는 1603년 쇼군에 취임한 후 정식으로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 특사로 파견한 사명대사는 공식적으로 조선통신사 사절단을 파견하기 2년 전인 1605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쇼군 이에야스를 만났다.
당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전쟁에 자신은 관동 지역에 머물러 전쟁에 일체 간여한 바 없어서 조선과 원수진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양국 사이 외교적 교류를 재개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사명대사에게 강력하게 피력했다. 양국을 대표한 두 영웅이 서로를 알아보고 흉금을 터놓고 당당하게 대좌한 이 자리에서 통 큰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야스는 ① 일본은 조선을 다시는 침략하지 않을 것이며 ② 일본에 끌려온 피로인(被擄人: 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을 모두 송환하고 ③ 전란 중 선릉·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조선에 인도하겠다고 약속하고 상호 화평의 상징으로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포로 3,000여 명을 사명대사와 함께 귀국하도록 통 크게 배려했고 그 후 총 7천여 명의 피로인들을 추가로 송환하는 등 총 1만여 명의 포로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조선으로서도 북으로는 만주족이 발흥해 명나라와 조선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라 남해 일대를 안정시키는 것은 급선무였다. 이에야스로서도 국교 재개에 응하지 않는 명나라 대신 조선과의 국교 회복으로 후방을 안정시키는 성과를 바랐다. 아울러 통신사를 초청함으로써 막 출범한 에도막부의 권위를 세우고 7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 열도 경제 재건에 매진해 나가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에야스는 100년에 걸친 혼란의 센코쿠(戦国)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로운 통일국가를 만들어 그의 꿈이자 대망을 이루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오랜 전쟁으로 삭막해진 ’칼의 사회‘, ’약육강식·하극상의 사회‘를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질서를 준수하는 평화의 나라 그 토대를 세우기 위한 통치 철학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이런 평화 국가의 모델이 이웃 조선이었고 그들의 국정 철학인 성리학을 염두에 두고 조선을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조선의 성리학에 오래전부터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참고로 전남 영광 출신의 유학자인 강항은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이후 포로로 있는 동안에 후지와라(藤原)에게 주자학을 전수해 그 후 일본에 퇴계학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유학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크게 미쳤다.
이에야스는 에도막부의 국정 이념을 조선의 퇴계가 확립한 성리학으로 삼아 성리학의 본고장에서 파견하는 수준 높은 통신사 일행들과의 교류를 통해 불모지에 가까운 일본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올려 일본 민중의 의식개혁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하지 않은 이에야스에 대해 조선 조정은 호의적이었다. 일본과의 화친과 국교 정상화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1607년 조선 조정이 첫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함으로 성사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607년 철천지원수의 나라 일본에 여우길을 정사로 하는 467명의 외교사절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조선 백성들의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1차부터 3차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피로인 송환을 위한 회답 겸 쇄환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4회부터 정식으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은 시기에 국교 재개를 의미하는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심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1차 통신사의 정사 여우길은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당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에야스가 거처하는 순푸성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이후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양국 간에는 평화 시대가 펼쳐졌다.
인접한 국가끼리 3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전쟁 없이 지낸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에도막부의 쇄국정책 아래에서도 조선과 국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최고 권력자끼리 소통하며 다양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짐으로 일본은 번영과 평화의 에도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21세기 조선통신사 서울-도쿄 우정 걷기‘ 행사는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이 되는 2007년 한국체육진흥회와 사단법인 일본걷기협회가 공동으로 기획해서 2년마다 실시해 왔다. 우리의 옛 조상들이 한·일 선린 우호 관계를 이루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그 정신과 문화적 유산을 계승·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이 책의 저자는 20대 후반에 당시 베스트셀러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 壯八)의 20권짜리 〈대망〉에 도전한 적이 있는데 일본인의 긴 이름에 질려서 한 권을 채 읽지 못하고 덮은 적이 있었다. 그 책을 70세에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너무 재미가 있어서 32권짜리 대하소설을 단숨에 읽었다고 한다. 아울러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매력에 푹 빠져 그의 흔적을 찾아 일본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염원했을 정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1543~1616)으로 처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밑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뒤 도요토미 일족을 진멸하고 전국(戰國)을 제패하여 에도 막부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일본은 물론 중국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2023년에 우리나라의 1인당 GDP가 일본을 추월했다. 필자가 현역에서 일본 관련 일을 하던 1980~90년대만 해도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가 일본과 동일한 라인에 서 있을뿐만 아니라 일본을 크게 앞지른 분야도 나타났다.
저자는 지난 2019년에 60여 일에 걸쳐 일본 열도 1,111km를 도보로 종단한 이후 그해 11월에 출간된 책 [일본은 원수인가, 이웃인가]를 일본의 지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오사카와 도쿄를 방문했다. 그 직후 바로 엄습해온 코로나 사태로 무려 5년 넘게 일본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평생을 일본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그로서, 한번 새로운 각오로 일본의 영웅 이에야스의 대망(大望)이 서려 있던 그 길을 걸으며 오늘날 일본 열도의 현주소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조금 여유 있게 시간을 잡아 일본을 찾아 현장을 둘러보고 시민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을 새롭게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2024년 12월경 ‘제10차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서울-도쿄 우정 걷기 행사’에 추가 회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신청했다.
그리고 저자는 제10회 조선통신사 대장정의 출발을 앞두고 선상규 회장으로부터 정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수락했다. 한국 측 참가자 가운데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지난 세월 일본과 경제협력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왔다는 게 지명된 이유였다. 그런데 출국 임박해 선 회장의 건강 악화로 결국 단장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이번 걷기 행사에 참가한 양측 대원은 구간 참가자를 포함 총 69명에 이르렀는데 일본 측 대원들의 고령화와 물가 인상 등 여러 사정으로 이번 10회 조선통신사 우정 걷기가 사실상 마지막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하고 있었다.
이번 우정 걷기 행사에 함께한 대원들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었고 10회 연속해서 참가한 엔도 야스오 대장이 걷는 내내 완벽하게 선도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씨가 도와주었고 우리 대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일본 대원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힘입어 사고 없이 목적지 도쿄 히비야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1,200km(3,000리)의 길을 걷는 동안 조선통신사 선조들의 노고는 물론 조선통신사를 초청함으로 조선과의 평화와 번영의 에도시대를 활짝 연 이에야스의 인생 여정을 여러 측면에서 목도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라는 그 의미와 함께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라며 당시 거센 국민의 반대 속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라는 결단을 내렸던 박정희 대통령의 고뇌에 공감하고 그 후 대한민국의 오늘날 경제 기적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그동안 수백 회나 일본 열도를 다녀왔으나 장장 53일이라는 긴 기간을 일본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걷고 교류하는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고. 24시간을 함께하며 일본과 일본인들의 속살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대원들을 인솔하고 일본 측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양국의 각종 환영 행사에서 단장으로서 혹은 정사로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완수할 수 있었다.
이번에 도쿄까지 무사히 완보한 데에는 일본측 엔도 대장의 도움이 컸다. 아사히신문 간부 출신인 그는 술을 매개로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교류하는 것을 즐긴다. 술을 통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남다른 그의 소탈한 성격에 힘입어 즐겁게 걸으며 우리는 흉금을 터놓는 친구가 되었다.
저자는 지난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았고 다가올 새로운 60년도 앙국이 조선통신사의 성신교린 정신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공존공영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우리들이 흘린 땀방울이 그 여정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사명대사 이에야스의 길, 그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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