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죽음과 좀비신학 (창세기 1장 읽기)

신죽음과 좀비신학 (창세기 1장 읽기)

$16.00
Description
창세기 1장 읽기의 기존 전통은 어거스틴과 토마스아퀴나스의 신학 토대 위의 가톨릭은 물론이요, 개신교의 초조인 루터의 이신칭의론 및 칼뱅의 기독교강요의 신학 체계가 창세기 1장 읽기의 상징질서 저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학적 기표와 기의의 연쇄 사슬의 바탕에서 창세기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종교 시스템의 연쇄 사슬을 이루고 있는 기존 언어의 틈새가 수없이 보입니다. 본서는 전통의 상징 체계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 개념들, 기존의 전통적 해석 체계에서의 일탈과 해체를 시도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신학 아래서 형성된 해석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비록 창세기 1장 읽기이지만 기존의 성서 읽기 방식에 대한 전면 재검토 요청을 담고 있습니다. 궤변과 터무니없는 몽상의 창세기 읽기로 치부되겠지만, 어느 시대나 기존 체계에 대한 강력한 이의 제기는 있게 마련입니다. 벌거숭이 임금님의 우화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허위의 해석 체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팩트로 읽는 독자가 있던가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창세기 1장은 신화적 이야기로 읽는 것이 타당한가. 벌거숭이 임금님 주변의 간신들은 펄쩍 뛸 것입니다. 이야기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면, 무궁무진합니다. 영감의 보물 창고입니다. 해석의 다양성은 혼란의 부추김이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다양한 색깔이 드러나게 하려면 전통적 해석의 감옥에서 풀어 놓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영감의 원형적 보고寶庫입니다.

법정의 판사 앞에서 천동설이 맞다고 증언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갈릴레오의 유명한 일화! 성서무오설과 유기적 영감설로 중무장한 근본주의 법정에 서게 되면, 창조 설화, 신화적 이야기는 목 베임 당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이야기이지 뭐란 말인가요. 이야기를 팩트로 믿어야 한다는 저 무지막지한 근본주의 폭력에 인류가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립니다.

본 창세기 1장 읽기는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벗어나 강론 화법으로 서술하였습니다. 본서의 내용은 수년 전 영상으로 제작된 바 있습니다. 녹취 후 교열 교정 형태로 다시 정돈하였습니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동영상을 참고하면 의도하는 바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읽기는 성서의 첫 단추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단추입니다. 창세기가 성서 이야기의 알파라면 요한계시록은 오메가인 셈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도 엇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읽기가 요한계시록 읽기의 성격을 결정짓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도 매한가지입니다.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는 물음은 예수가 어느 율법사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먼저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본문 비평의 영역입니다. 반면에 어떻게 읽느냐는 해석 영역입니다. 키다חִידָה 와 마샬מָשָׁ֣ל! 키다는 감춘 것이고 마샬은 비유라는 뜻입니다. 비유는 감춘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시편 78편 참조

어떻게 읽느냐는 감춘 것,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여전히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또한 비유를 동원하게 마련입니다.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비유가 발화시에는 서로 자명하게 소통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명한 진리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비유 자체가 수수께끼가 되고 더 깊이 은장隱葬됩니다. 칠일 창조 서사의 이야기로 감춘 것을 드러내려는 자명한 이치는 숨어버리고 “천지창조공사” 창업주의 홍보 책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서사를 우주 만물 창조로 읽고 역사적 팩트로 읽으면 요한계시록은 자연스럽게 우주의 소멸과 우주 종말론으로 읽게 됩니다. 거기에는 위대한 우주의 창업자인 전지전능한 초월 신을 전제하게 됩니다. 예수는 이를 전복시킵니다. 그렇게 있는 초월 신은 거짓이고 미움이고 사람의 영혼을 살해하는 살인의 신이라고 유대교의 신을 탄핵하고 해체해 버립니다.요 8장 참조 작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전면에 내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종주宗主로 세우고 있지만,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유대교의 전통을 좇고 있습니다. 첫 단추인 창세기 1장 읽기에서 판가름 되고 있습니다.

본서는 전통적인 창세기 1장 읽기의 도그마를 해체합니다. 창세기 1장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들의 제1 원형입니다. 아르 키 타입archetype입니다. 본서는 반복하여 제1 원형인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에덴 이야기는 제2 원형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이 두 이야기에 수렴되고 변주變奏 됩니다. 창조 서사를 해설하면서 때로는 논리적 서술보다는 문학적 상징의 비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장점이자 단점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고 근본주의 시각에서는 매우 불편한 지점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본서를 출간합니다. 이 같은 독법이 과연 가능한가. 성서를 이렇게 읽어도 될 것인가. 대답은 독자 각각의 몫이 될 것이고, 어떤 비판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 이야기에 이어 ‘야훼와 하야 그리고 아바’, ‘신 죽음과 좀비 신학’, ‘메타노에오와 회개의 본래 의미’의 주제 글을 덧붙였습니다. 창세기 1장 읽기는 신 죽음과 새로 복권된 신의 관점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저자

김창호

저자:김창호
총신대학교를졸업하고한국외국어대학교교육대학원에서철학교육을전공하였다.수도침례신학교와중부대학교에서기독교철학과헬라어,히브리어를강의하였다.저서로는『베드로의고백그허와실』(1994)『그것이나를위한것이냐』(1998)『예수의믿음』(2018)『에덴의뮈토스와로고스』(2021)『유대신비주의카발라와생명나무』(2021)『성서그리고도마복음Vol1,2,3』(2024-25)『신죽음과좀비신학』(2025)등이있다.원어성서원刊『스테판원어성경』데이터작업과편집에참여하였으며격월간지『형상과글』을창간하기도했다.

현재유튜브방송
김창호TV를운영하고있으며,원어성경을토대로한해설요한계시록과창세기,산상수훈,주기도문,카발리즘,도마복음,로마서,히브리서등동영상약700여편이업로드중이다.

목차

들어가는말6
하늘과땅의창조13
성서가말하는땅32
바람이분다40
2절의중요개념들53
빛이있으라-첫째날61
윗물과아랫물-둘째날68
뭍이드러나는이야기-셋째날75

86위를비추는마음의하늘-넷째날
100빛,φ과바람,πνεμα의서사-다섯째날
113말문-여섯째날1
129형상과모양그리고‘씨알’의양식-여섯째날2
142남자와여자그리고안식-일곱째날
151야훼와하야,그리고아바
161신죽음과좀비신학
176메타노에오와회개의본래의미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창세기1장의창조서사를비롯하여에덴,노아,아브라함,모세의출애굽이야기,사사들의이야기,가나안땅이야기,바벨론과귀환이야기,그리고사복음서와사도행전,요한계시록에이르기까지,바울서신을비롯한일부서신서를제외한모든부분이‘이야기’의형태를띠고있습니다.이들은이야기들이모여집대성된서적입니다.이야기의형태를지니지않은것을찾아보기어려울정도로성서는서사적구조를깊이내재하고있습니다.

이야기는이야기입니다.그러나그이야기는결코하찮은것이아닙니다.사람들이모여사는곳이라면어디든이야기가존재하며,이야기가없는사회는없습니다.

창세기칠일창조이야기가성서모든이야기의‘제1원형’이라고하지않았습니까?이창세기1장이야기의구조는요한계시록까지를이해하는‘핵심’입니다.요한계시록에나오는‘일곱영’,‘일곱인’을떼는이야기등이모두창세기1장의원형적구조를반영하고있습니다.이원형적이야기가우리삶속에서다양한형태로‘변주變奏’되는것입니다.아브라함이야기속에도,출애굽과모세이야기속에도창세기1장의이야기구조가다양한언어와진술방식,서사적구조속에서원형적으로들어가있습니다.

요컨대‘에레츠’라는단어하나에단일한정의를고정시키는것은성서적맥락을손상시킬위험이있습니다.성서는이야기의흐름속에서‘에레츠’의의미를층위적으로드러냅니다.창세기의원형서사,에덴의개념분화,모세의역사,그리고예수의비유에비추어보면,‘에레츠’는동일한명칭아래다른상태와기능을담는그릇이며,언약의귀환과결실이일어나는‘가장적합한땅’으로수렴한다고하겠습니다.천지를‘바라’했다는것을광활한우주를창조했다는기존의전통적해석을내려놓고성서의전체맥락에서보면땅의창조가어떻게이뤄지는지를조망해볼수있습니다.창세기1장1절을놓고창조론과진화론의프레임에갇혀논쟁하는동안,성서가말하고자하는땅의창조에대해놓치게됩니다.

‘영’처럼어려운말이어디있습니까.그런데왜이를‘성령’이라부르는지이해하셔야합니다.‘거룩한영’이라하는까닭은,이전엔더러운영,곧이기심과욕망의바람에휘둘렸기때문입니다.사방에서바람이붑니다.네바람이붑니다.우리는그바람에휘말려농락당했다는걸한참지나알지요.그바람이모두끝나야합니다.

창세기1장2절,토후·보후·호쉐크는그바람이끝나는지점입니다.보십시오.네바람과하나님의루아흐는다릅니다.하나님의루아흐는외부에서몰아치는바람이아닙니다.네바람은밖에서불어오는바람,공중권세의바람입니다.풍요의바람(애굽고센땅의바람),권력의바람,명예의바람,무섭고두려운짐승의바람(권력과재물의결합)―그바람에안빠진인생이어디있습니까.그러나루아흐엘로힘은그바람과다릅니다.

‘토후’는보통‘혼돈’으로옮기되,사전적의미로는‘황폐함,가치없음’을내포합니다.이사야40장15-17절은열방과섬,레바논의삼림과짐승들까지도야훼앞에서‘아무것도아님(아인)’으로드러난다고말합니다.영어로는“lessthannothing”으로번역되는데,‘없는것처럼여김’이라는뉘앙스입니다.현대철학자슬라보예지젝의역작으로알려진“lessthannothing”이여기서가져온책명입니다.슬라보예지젝의“LessthanNothing”은헤겔의철학유산을현대사회에적용한독특한개념입니다.

결국‘창세부터감추인것’을드러내는창조사건은,우주의물질적기원을설명하는데있지않고,내안의지성소에계신하나님이내마음에씨를뿌려빛을내고,그빛이자라고열매를맺는생명의사건에있습니다.이것이곧구원이요,‘내가나되는’존재의회복입니다.말씀과내가하나되는사건,곧진리의사건입니다.이것이창세기1장3절“빛이있으라”의깊은뜻입니다.

창세기1장은이야기입니다.이야기는이야기로보아야합니다.그런데많은분이창세기1장을이야기로보지않습니다.이야기를이야기로읽지않고역사적사실로팩트체크하듯읽고있습니다.단군신화의곰이야기를역사적사실로읽으면어떤일이벌어질까요?유독창세기1장은역사적사실로믿어야한다고주장합니다.이야기로읽어야한다는주장은불경중불경이어서입에올리기조차두려워합니다.

셋째날의비밀은분명합니다.내배에서흐르는생수의강이마음의바다를고요하게하고,그고요위로마음의땅이드러나며,그땅에서생명의씨알이자라난다는것입니다.광야의만나에만머물지않고,가나안의양식으로옮겨가듯,바깥에서들은말만되뇌지않고내마음밭에서길러진언어로살아갑니다.그때비로소“보시기에좋았더라”는말씀이추상이아니라현재형이됩니다.오늘우리의여정도그장면을향해열려있습니다.

마음이동할때,우물물에천사가내려오는것처럼,자연의원리가마음의세계에도그대로적용됩니다.우리안의해와달과별,즉소망들은이기적인소망이아니라,인생의길을잃었을때나침반이되어주는존재들입니다.밤하늘의별을보며길을찾아앞으로나아가듯,우리마음의세계에도방향을잡을수있는‘일곱별’이있습니다.계시록에나오는일곱에클레시아즉,마음의성전안에있는일곱등대와촛대들은바로밤하늘의별들을상징합니다.

다스림의현장이바깥자연이아니라,우리내면의세계에해당한다는통찰입니다.인간의마음속에는무의식의깊은바다,사유의하늘,본능과감정이라는다양한‘생물들’이살아움직입니다.때로는통제할수없는분노,두려움,슬픔,과도한지식의교만등,우리를사로잡는힘들이꿈틀거립니다.본문을내면의비유로읽을때,다스림은자기세계의질서를세우고,파괴적충동을길들이며,유익한자원을적절히불러와생명을살리는방향으로활용하는역량을가리킨다는독법이가능합니다.우리가주목해서읽어야할대목은바로이러한관점입니다.

창조동사들의결,곧‘바라,야차르,아사’의진행을함께보아야합니다.이세동사는각각창조의다른층위를암시합니다.바라가근원적‘불러냄/낳음’이라면,야차르는‘형성/조성’,아사는‘만듦/운용/실행’의결을가집니다.본문은이단계를엮어,창조가단번의사건이아니라점층적과정임을보여줍니다.

성경곳곳에서‘땅’은마음의비유로작동합니다.가나안,광야,바빌론,고토의회복등은모두바깥공간의서술인동시에마음의상태를가리키는상징적언어로읽을수있습니다.이관점에서“땅에충만하고,땅을정복하며,생물을다스리라”는말씀은내마음의땅,황폐하고굳어있는그내면을생명으로가득채우고질서있게다스리라는뜻을담고있습니다.그래야경전이고,그래야성서입니다.

“인자는안식의주인”이라는말씀을마음성전의관점으로다시생각해볼필요가있습니다.성전의주인은바깥어딘가의절대타자가아니라,거룩의상태에들어선나자신의내면중심,곧통합된자아입니다.아브라함이백세에이르러비로소삶의주체로서듯,우리역시내안의성소와지성소가하나가되는통합의경지에서내삶의주인으로깨어납니다.이때는바깥에서어떤바람이불어도,내면은함께휩쓸리지않습니다.타인의오해와비방이들려도,그것을그사람의문제로식별하고,내속에서불필요한전쟁을더이상일으키지않습니다.왜냐하면안식의주권,내면의홀리스피릿이이미내안에좌정했기때문입니다.

칸트의인식론전환,그리고예수의내면전환과같은무늬를지닙니다.방향이‘밖’에서‘안’으로,‘사물’에서‘주체’로돌려지는것입니다.이점에서는하이데거도현존재로눈을돌리게됩니다.창세기의창조서사도우주창조의시선에서현존재의존재이해로옮겨읽어야합니다.그리스신화나,로마신화도신의이름을빌려인간의이야기를하는것이듯,창조서사도우주창조의이야기로인간을이야기하는것입니다.모든판타지소설,시나각종예술작품은결국인간의이야기입니다.놀랍게도이땅에서는동학에서천지개벽의시선전환이이뤄집니다.시천주(侍天主)의동학(東學)에서코페르니쿠스의대전환과같은문양의사상이최재우(1824-1864)에의해선포됩니다.동학은선교사들이전한서학과는정반대의사상이나,예수의정신,곧하나님은여기있거나저기있는것이아니라네안에있다(시천주)는말씀과본질에서맞닿아있습니다.시천주는결국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이어지듯예수의사상은사람을하늘처럼여기는개벽의길을열어갑니다.

존재가자기자신으로드러나면,말은타자의복제에서벗어나“자기말”이됩니다.자기말은독단이나고집과다릅니다.오히려영의사유에서비롯된말은타자를살리고관계를회복시키며,현실에생명과평안을불러옵니다.그러한말하기는“거룩함”의표현이며,그자체가하나님나라의징후입니다.그러므로“회개하라”는요청은“이제네가너의말로말하라”는것이기도합니다.타자의대본에서벗어나,영의사유로전환된존재가자기언어를시작할때,그순간이바로“천국이가까이온”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