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화된현대사회를살아가는우리에게족보란무엇인가
--족보의탄생에서부터변천의과정,그리고그허구와실체를추적한다
우리의‘조상과족보’에관한태도는일정한역사성의틀을넘어고유의심성으로까지깊이파고들어있다.예컨대다원화된현대사회를살아가는오늘날에도혼사나집안대소사에빠지지않는것이조상이요,족보다.그리하여시조할배를비롯한조상의뿌리찾기와위선사업에혼신의힘을쏟아붓는것은물론이고,때로는조상의실체에대해제대로밝히려는학자들의연구결과에개입하려고도한다.이렇듯우리에게조상과족보는과거가아니라현재진행형이며,부정적인요소와긍정적인요소가병존하고있다.조선전기까지만해도보이지않던조상에대한무조건적인관념이한국인특유의정서로자리잡아현재에까지이르게된이유는무엇일까.
따라서조상과족보에대한실상을제대로파악하고,그바탕위에서조상과족보에대한새로운전통가꾸기를시도할필요가있는것이다.이책에서는족보가만들어지는초기족보의형태부터그이후시대상의변화에따라족보들이진화해가는모습,족보를둘러싼다양한사회문화현상,족보의허상과실재들을살펴보며,족보가단순한생물학적계보를추적한것이아니라당대의사회현상을반영한결과물이었다는것을짚어본다.이렇게족보의역사적배경과형태를추적하여살펴본다고하여이책이고리타분한전통살리기식으로접근한것은아니다.물론지금의관점에서야부질없어보여도당시로서는심각하기이를데없었을명분에싸인다양한시비문화나웃음을자아내는에피소드들,천방지축마골피와같은어처구니없는도시전설등의이야기를통해,족보를둘러싼우리조상들이살아온치열한삶의이야기들이라할수있다.
더불어서양에서만들어지는족보들과,사람족보보다더철저히관리되는개족보나말족보도들여다보고우리의족보가갖는의미를짚어본다.
한편150여컷의컬러도판을실어우리족보에대한풍부한이해를돕고있다.
이책의내용과구성은
제1부우리족보변천사
제1장족보의발달단계와그특징
족보란‘한성씨의시조를기점으로하여,그로부터출생한자손을일정한형식과범위로망라한집단적가계기록’이라정의할수있다.따라서우리가족보를만들기시작한것은15세기부터지만실제적인기점은17세기후반이되고,우리가일반적으로생각하는족보는18세기에완성된형태로자리잡는다.초기족보에는외손당대만이아니라외손의외손의외손으로한없이이어지는외후손을족보에차별없이등재하여,내외손을구분하지않고동등하게가족의지위를인정했다.그리고양자를들여가계를잇는다는개념도없어서가계가단절된경우도많았다.
실질적인족보는합동계보로서‘창시보’를드는데,이는인쇄물로간행된족보를말하며,공동발의와공동노력에의해편찬,간행됐다.구체적으로족보에수록할명단및관련기사의작성과제출,편찬과간행에들어가는경비역시공동으로부담하는것이원칙이었다.
족보의형태는개인단위의조상을밝힌가승(家乘)류나본인을기준으로종적인조상세계를계보화한세계도(世系圖),횡적인자녀와내ㆍ외손의파계를정리한것이족도(族圖)등의초기족보에서그다음단계인8촌이내에드는내ㆍ외손모두를형식에구애받지않고수록한내외자손록,내ㆍ외손을동일하게추적해수록한내외종합보등의형태로변화해갔고,,이것이다시오늘날의족보형태인합동계보로이행해갔으며,다시수록범위를성관(姓貫)전체로포괄하는‘대동보(大同譜)’로진화해갔다.
제2장특수한족보와생뚱맞은족보
족보에는여러성씨를망라한족보의백과사전인‘만성보(萬姓譜)’부류와《선원록(璿源錄)》,《종친록(宗親錄)》등의왕실족보가있으며,내시도가계의족보인《양세계보(養世系譜)》,관직에진출한사람의계보를밝힌《진신보(搢紳譜)》나《잠영보(簪纓譜)》등이있다.그리고문과급제자에관한인명록이나일반문사록에해당하는문보(文譜),무관출신집안의가계를정리한무보(武譜),그리고음직으로진출한인물의가계를수록한음보(蔭譜)가있었다.
또한만성보로는19세기후반부터20세기초반까지는이창현의《성원록(姓源錄)》,《백씨통보》,해남윤씨종가에소장된《만가보》등이전해진다.20세기에접어들면활자본으로만성보를간행하기시작해1916년에목활자본으로간행된《동국만성잠영보》,1924년윤창현에의해편찬된《조선씨족통보》,1925년송윤식등에의해편찬된《청구씨보》,1931년윤직구에의해간행된종합씨족보의결정판이라할《만성대동보》등이있었다.
한편,고성이씨가문에서편찬한《사성강목(四姓綱目)》이나《선세외가족보(先世外家族譜)》처럼다소특이한족보도있었다.16세기말송암이노에의해편찬된《사성강목》은보기드문독특한보첩양식으로,족보작성자이노를기점으로부의내ㆍ외변과모의내ㆍ외변에네개의성씨와혼인으로연결된가문의선계(先系)와후손을인물전기형식으로정리하여주목할만한데,특히입양제도나적서문제에대한인식의변화상이나타나있다.《선세외가족보》는외가의계보를추적한외보(外譜)로,대개외보는역대직계조상의배우자를대상으로그종족의시조부터배우자당대까지계보를수록했다는데,이족보는마치팔고조도처럼외가뿐아니라외가의외가까지수록하는방식을취했다.
제2부성씨와본관그리고조상찾기
제1장성씨와본관의이중주
우리성씨가본격적으로사용되기시작한시기는신라말에서고려초기다.당시제작된각종금석문을비롯해《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등장하는인물을보면고유인명이많은데,이는아직중국식한자성을받아들이는초기단계였다.간혹한자식성명이나오기는하지만,고구려와백제계통의성은그계보가후대에까지연결되지않았다.따라서통일신라이전에는중국과달리고유명만사용하다가그후점차중국식한자로된성을받아들이면서성과이름이조합된것으로봐야한다.
신라에는글자수가일정치않은즉거칠부,이사부,비지부,급진부등과같은이두식이름만있었다.그러다가신라가통일한이후중후기에이르러중국에서한자식두글자로된세련된이름이도입되고,아울러이시기에박ㆍ석ㆍ김을비롯한고유성씨까지출현하게됐다.따라서박ㆍ석ㆍ김은신라건국당시부터있었던것이아니라,후대에소급해붙였다고본다.
우리나라최초의성씨는7세기후반금석문인문무왕릉비에서부터나타났다.6세기중반에세워진진흥왕순수비에는수많은수행인원이나오지만성을사용한예는없다.그러다가9세기에접어들어당나라에유학을갔다왔거나,대외무역과정에서중국의유명성씨를도입하는사례가늘어났다.
오늘날본관의의미는크게세가지다.첫째는시조가살았던거주지이거나출신지요,둘째는동일한본관을사용하는사람모두피를나눈혈족집단의일원이라는것,셋째는문벌의식을드러내는기호로서의역할이다.우리는오랜동안성과본관이실과바늘처럼따라다니는관습속에서살아왔지만,실은7세기이후성이사용되고보급됐다면본관은적어도10세기중엽이후에나타났다고본다.
우리가흔히사용하는‘성씨’라는어휘는성과씨를합성한것인데,성은부계를중심으로한혈통계보를,씨는촌락또는지역단위의공동체를의미한다.따라서혈연적요소와지연적요소가합쳐진말이성씨다.전통사회에서이런두가지요소를합쳐부르던용어가‘토성(土姓)’인데,《세종실록지리지》의각군현조를보면당시행정구역별로토착하고있던전국의토성을잘정리해놓고있어,그지역을본관으로하는성씨가무엇인지파악하는데도움이된다.
이렇듯토성이바로본관을나타내주므로,그성립시기가바로본관제도가시작된시점일것이나정확한시기는알수없다.다만당시의고려영토가후삼국통일당시에확정됐던대동강에서원산만이남지역으로한정되어있었고,그결과에따라이지역에만토성이존재하여,오늘날모든본관이이지역에존재했던행정구역단위다.
당시의본관제도는지역단위별로호구를파악하고세금을부과하는국가정책을실현하기위해시행됐기때문에우리가일반적으로알고있는본관제도와는다르다.그러니‘경주김씨’‘전주이씨’하듯이,성과연관된본관이아니라거주지나본적지라는의미에불과하다.따라서성을갖지못한천민에게도본관만은국가에서지정해주어,고려초에정착된본관제도가조선시대까지는양수척(楊水尺.백정)과같은특수한천민을제외하고는모두본관이있었다.이렇듯본관이거주지라는의미를가지면서단독으로사용되다가고려후기에접어들면서성과연칭됐는데,이것이바로우리가아는일반적인본관제도다.
고려시대에우리의민족의식이형성됐다고볼때그이전에귀화한백성은이미우리민족에동화되어언어와문화를공유하는사람들일것이다.따라서귀화성씨라고할때는우리의성과본관을바탕으로혈연적계보의식으로살아갔던고려중기이후에귀화해사성(賜姓)혹은창성(創姓)으로본관지에정착한경우로봐야것이다.《세종실록지리지》에따르면귀화성씨로는경주설씨,상주이씨,임천이씨등이있으며,중국에서온소씨와변씨도있다.그리고1127년,1226년에고려로이주해온베트남왕자들의정선이씨와화산이씨나함경북도북청을본관으로하는청해이씨도귀화성씨다.
한편,우리인물기록에는출신지가없는데,이는조선시대부터당시사람들이먼조상의출신지에불과한본관만을내세웠기때문이다.이는본관으로양반임을자랑하려는풍토에서빚어진것이다.
한국인중에족보가없는사람은거의없고,족보상양반이아닌경우도거의없지만,전근대신분제도하에서는절반이넘는사람이성씨조차없었고,성씨가있었다할지라도양반일수없었다.결국가계위조방법등이나타난것인데,아버지를바꾸고할아버지를갈아치우는환부역조(換父易祖)행위로특정가계를통째로어느인물의후손으로연접해감쪽같이둔갑시키는가하면,가계를이어야한다는양자제도에대한관념이없었던조선전기에무후로끝난인물에후손으로연접하거나한세대를더끼워넣는등의첨간(添刊)방법등이있었다.
제2장시조와조상만들기
시조는중국의경우두부만드는사람이나돗자리짜는사람들도많은데,한국에서는씨족제도가유명인물의후손임을자처하는이들에의해형성발전했기때문에후손들이일정한세월이흐른뒤추대해넣어모두가이름난인물들이다.
18세기중반이후부터조상의연원을엄청나게올려잡는한때의풍조로말미암아본관을달리해도성만같으면동일한조상에서갈라져나왔다는조상동원설(祖上同源說)이난무했다.심지어다른성씨까지도같은형제로갈라졌다는설까지나타났다.여러본관으로나누어진안씨가모두한뿌리에서출발했다는동원설과함께급기야1700년대후반에는안씨ㆍ이씨동원설까지제기됐다.
그가문을명문의반석으로올려놓은실질적인시조가있었다.명목상의시조와실질적인시조를구분해서,그가문을있게한중흥조(中興祖)에해당하는인물들이그가문을세상에드러내게한기가조(起家祖)였다.대개는본관지에정착해살아가다급제를하거나국가에큰공을세운후서울로올라간첫번째인물이기가조인셈이다.
또한특정한종족이일정공간에오랜기간세거해왔던동족마을이전국에있었다.그리하여양반가문을지칭할때그들의성앞에세거해온마을이름을연칭해불렀다.안동을예로들면,본관인풍산이나의성을버리고하회류씨,내앞김씨등으로불렀다.그리고남원지방둔덕리와그일대에거주하는전주이씨를둔덕이씨라하고,사립안마을과인근에사는광주이씨를사립안이씨라했다.둔덕이씨는효령대군을현조로하고,사립안이씨는명종과선조때정승을지낸이준경을현조로내세운다.현조가마을에처음들어온입향조(入鄕祖)와동일한경우도있지만,입향한인물의후예중에뛰어난인물을현조로모실때도있었다.
우리가조상을적당히미화하거나전거나출처가확실하지않은두찬(杜撰)이많은것은서열병과경쟁심리에기인하며,신분제도에도그원인이있었다.모두가갈망했던양반이라는것이법제적인개념이아니라상대적이고주관적이었기때문이다.갑족양반이라면상대적으로심하지않았겠지만,신흥양반이나권력에서멀어진가문일수록조상에대한두찬이심할수밖에없었다.
제3부집단기억과족보의문화사
제1장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