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올해로91주년을맞는3·1절의의미를되새길수있는뜻깊은책《노블일지1892~1934》가출간되었다.구한말에서일제강점기까지42년간이땅에서살다간미국인여선교사매티윌콕스노블여사?는매일매일자신이보고들은것을일지로기록하였다.이육필일지는그녀의사후유족들에의해보관되다가80년대후반에야문서로정리되었으며,90년대에국내일부기독교계와사학자들에의해연구․소개되었으나책으로번역출간되기는이번이처음이다.
꽃다운스물살의나이에갓결혼한새신부가코리아라는머나먼...
올해로91주년을맞는3·1절의의미를되새길수있는뜻깊은책《노블일지1892~1934》가출간되었다.구한말에서일제강점기까지42년간이땅에서살다간미국인여선교사매티윌콕스노블여사는매일매일자신이보고들은것을일지로기록하였다.이육필일지는그녀의사후유족들에의해보관되다가80년대후반에야문서로정리되었으며,90년대에국내일부기독교계와사학자들에의해연구․소개되었으나책으로번역출간되기는이번이처음이다.
꽃다운스물살의나이에갓결혼한새신부가코리아라는머나먼낯선땅에선교사로부임하여,복음이라고는한번도들어본적이없는이들을열성적으로전도하고,칠남매를낳아기르고(그중둘은아기때숨져평양에묻힌다),병들고가난한이웃들을돕고,차별받는여성과어린이들을가르치다가환갑이넘어미국으로돌아가운명을맞이하는지난한여정은그자체로지난세기범상치않은한여성의삶을감동적으로보여준다.하지만우리가《노블일지》를주목하는것은단순한개인적차원을넘어서는그역사적기록으로서의가치때문이다.
3ㆍ1운동,그때그곳의생생한모습
《노블일지》에서가장압권이자그사료로서의의의를가장잘보여주는대목이3·1운동에대한생생한관찰과묘사다.1919년3월1일노블여사는사방에서갑자기들려오는기쁨에찬만세소리에깜짝놀란다.
“오늘은한국의위대한날이다.한국인들의기쁨이얼마나이어질수있을까?오후2시,중학교를비롯한각급학교들이일본의한국지배에항거하는시위를벌였고,거리로나가양손을위로올리고모자를흔들며‘대한독립만세’를외치며행진을하기시작했다.거리의사람들역시이대열에합류했고,도시전역에기쁨의외침소리들이울려퍼졌다.나는긴행렬하나가궁궐[덕수궁]담장의모서리를지나는광경을우리집창문을통해볼수있었다.”
그러나만세의환희는곧일본경찰과헌병들의잔혹한탄압으로이어진다.
“오늘아침9시에남녀학생들이인파가모여있던남대문역전에서시위를벌였다.학생들은해방가를불렀다.……학생들이이동을하여덕수궁앞에다다르자경찰들이진압에들어갔다.사복차림의이들이가게에서쏟아져나와서는몽둥이로학생들을때리기시작했다.많은학생들이무자비하게구타당했다.이화학당의한여학생이몽둥이로등을맞는것을보고우리비서인김봉율군이다가가말리려했다.그러자신분을위장한경찰로의심되는사복차림의일본인들이김봉율군을때리기시작했다.그의머리를때린몽둥이가세동강으로부러지자그들은그의목을주먹으로때리고고개를뒤로꺾어서는감옥에집어넣었다.”(1919년3월5일자)
“어제저녁일요일,서울서부의몇몇동네와종로에서동대문에이르는서울시가에서수백명의사람들이한국의독립을외치는데모가있었다.많은사람들이경찰과헌병들에의해베임을당했고,몇몇은죽임을당했다.토요일아침에는다섯명이살해됐다.”(1919년3월24일자)“평양에있는우리기홀병원과서울의세브란스병원에는처참하게칼로베어진환자들이매일이송되고있다.……현재병원의병실과복도는부상자로득실거린다.어제세브란스에서60장의침대시트와많은붕대를요청하는비상전화가왔다.……그들은맨손으로단지‘자유,우리에게자유를!’을외쳤던사람들이다.”(1919년3월28일자)
“요즘은밤에한국인이거리를걷기만해도경찰에게매를맞는다.……어젯밤거리를걷던사람들은만세를부르지않았음에도불구하고세명이살해됐으며많은사람들이다쳤다.”(1919년3월30일자)“3월31일저녁한한국인남성이시골에서올라와남대문에서기차를내려집으로걸어가고있었다.그는정부에고용된소위일본재향군인들(순전한악당들)에게잡혀서매를맞았다.어떠한구실도없었다.다만공포체제를조성하는것이었다.그남자는너무심하게맞아서밤사이에죽었다.이것은하나의예외적사건이아니다.이러한경우가수도없이많고증거도확실하다.”(1919년4월2일자)
노블여사는시위를하다붙잡힌이들이겪은심문과고문,감옥의열악한환경과불공평한재판과정등도상세히소개하고있다.그중에서도가장충격적인것은일본경찰들이여학생들을벌거벗겨고문하는장면이다.
“경찰서에서그들은몸수색을위해옷을벗으라는명령을받았다.그것은굴욕감을주기위한것이었다.잠시라도머뭇거리면금줄세개를단네다섯명의남자들로부터매를맞았다.감옥에서도그들은벌거벗겨진채지내며간부들의사무실로불려가서심문을당하고매를맞았으며,다시알몸으로감방으로돌아와야했다.……감옥에아직도남아있는두소녀는고문을당해야했다(출옥한소녀들의증언이다).한소녀는양쪽엄지손가락을한데묶여매달렸다.다른소녀는이화학당에서가장총명하고예쁜여학생으로진남포에서내가시작한최초의여학교출신인박인덕이다.그녀는옷을벗기우고심한채찍질을당했다.그녀는또한무릎을꿇고앉아무거운의자를들고있어야하는고문도당했다.만일떨려서손이내려오면팔을맞아야했다.”(1919년3월28일자)
《노블일지》는이러한공포분위기에서도용감하게진행된한국인들의동맹파업과동맹휴교,일본상품들에대한불매운동등당시서울의모습과항일운동의전개양상을세밀히그리고있다.
제암리학살사건에대한새로운증언
3월1일이후전국으로들불처럼번진만세시위가특히활발했던곳이수원일대였다.일본군은기독교와천도교세력이배후에있다고보고,이에대한계획적토벌의일환으로1919년4월15일제암리와고주리의예배당에신자들을모으고총살한뒤불태운다.이것이바로‘제암리학살사건’이라고알려진사건의개요다.하지만당시수원지역감리사였던남편과함께직접학살현장을둘러보고생존자들을만나증언을들은노블여사의기록에의하면,당시일본군의방화와살육이더폭넓은지역에서이루어졌으며희생자도알려진29인보다훨씬많았음을알수있다.먼저노블여사는사건의발단을다음과같이설명한다.
“최근일본정부는소위‘역도들’을제압할수있는더‘근본적인대책’을마련했다고한다.우리는맨손으로단순히‘독립만세’를외치는사람들에게얼마나더가혹할수있을지에대해상상할수없었다.그러나보병대2사단,포병대1사단,기병대2사단이일본으로부터파병되고난후우리가처음알게된사실은마을들이불타고있다는소문이무성하다는것이다.그리고특정마을들이불타버렸다는결정적소식은그곳에서서울로도피해온사람들에의해전해졌다.”(1919년4월2일자)
당시미부영사를위시한선교사들이제암리의피해상황을조사하기위해방문했을때“그들은실상이전해들은그어떠한소문들보다도훨씬참혹하다는것을알게됐다.그들은재가되어버린교회와숯덩이가된시신들을보았으며,살이타면서나는냄새를맡고병이날지경이었다.곡물창고와가축들도모두불에탔다.군인들은가정을방문하면서남자들을교회로모이라고했는데,그들이다모이자교회에불을붙이고안에있던사람들을모두불살라버렸다.누군가도망을치려고하면그들은총으로쏴죽였다.남편들이어떻게됐는지교회로보러왔던두여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