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근대사 42년간의 기록)

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근대사 42년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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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미국인 여선교사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 근대사
『노블일지』는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42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미국인 여선교사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의 일지를 옮긴 것이다. 그녀가 겪은 동학혁명,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병합, 3ㆍ1 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기록은 그들만이 접할 수 있었던 역사적 현장과 사실들에 대한 희귀 증언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노블 여사 자신의 목격담은 물론 교인들의 단편적 전언, 당시의 풍문들이 일지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어 당시의 정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은 여선교사의 눈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블 여사는 집집마다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볼 수 있었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특히 같은 여성으로서 목격했던 당시 한국 여성들의 열악한 실상은 여성성경공부모임이 그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여성사와 생활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귀중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저자

매티윌콕스노블

저자매티윌콕스노블(MattieWilcoxNoble)은1872년펜실베이니아주윌크스배러에서태어났다.와이오밍신학교에서만난윌리엄아서노블과1892년결혼하였고,그해에한국선교사로부임하는남편을따라내한하였다.서울,평양,수원등지에서감리사로오랫동안일한남편과도와여성대상선교와교육사업에힘썼다.특히평양남산현교회를중심으로한국최초의여성성경공부모임,한국최초의유년주일학교를시작했다.1934년은퇴한남편과함께미국으로돌아갔으며,1941년북캘리포니아주를대표하는‘미국의어미니’로뽑혔다.남편은1945년캘리포니아주스톡턴에서사망했으며,노블여사는1956년스톡턴의한요양원에서숨졌다.
슬하에딸둘과아들다섯을두었는데,둘째와셋째는아기때병사하여평양에묻혔다.큰딸루스는배재학당을세운아펜젤러선교사의장남헨리다지와결혼하여한국에서의선교와교육사업을이어갔다.
생전에한국에서출간된저서로는《어머니에대한강도》(1916),《자모권면》(1921),《승리의생활》(1927)이있다.

목차

옮긴이의글_어느미국인여선교사의한국생활42년
머리말

제1권1892~1896태평양을건너코리아로
제2권1896~1905피난을떠나는사람들
제3권1904~1910빼앗긴땅의슬픔
제4권1911~1919그날의만세소리
제5권1919~1925불타버린마을에서
제6권1927~1934승리의생활

옮긴이주

출판사 서평

올해로91주년을맞는3·1절의의미를되새길수있는뜻깊은책《노블일지1892~1934》가출간되었다.구한말에서일제강점기까지42년간이땅에서살다간미국인여선교사매티윌콕스노블여사는매일매일자신이보고들은것을일지로기록하였다.이육필일지는그녀의사후유족들에의해보관되다가80년대후반에야문서로정리되었으며,90년대에국내일부기독교계와사학자들에의해연구․소개되었으나책으로번역출간되기는이번이처음이다.
꽃다운스물살의나이에갓결혼한새신부가코리아라는머나먼낯선땅에선교사로부임하여,복음이라고는한번도들어본적이없는이들을열성적으로전도하고,칠남매를낳아기르고(그중둘은아기때숨져평양에묻힌다),병들고가난한이웃들을돕고,차별받는여성과어린이들을가르치다가환갑이넘어미국으로돌아가운명을맞이하는지난한여정은그자체로지난세기범상치않은한여성의삶을감동적으로보여준다.하지만우리가《노블일지》를주목하는것은단순한개인적차원을넘어서는그역사적기록으로서의가치때문이다.

3ㆍ1운동,그때그곳의생생한모습

《노블일지》에서가장압권이자그사료로서의의의를가장잘보여주는대목이3·1운동에대한생생한관찰과묘사다.1919년3월1일노블여사는사방에서갑자기들려오는기쁨에찬만세소리에깜짝놀란다.

“오늘은한국의위대한날이다.한국인들의기쁨이얼마나이어질수있을까?오후2시,중학교를비롯한각급학교들이일본의한국지배에항거하는시위를벌였고,거리로나가양손을위로올리고모자를흔들며‘대한독립만세’를외치며행진을하기시작했다.거리의사람들역시이대열에합류했고,도시전역에기쁨의외침소리들이울려퍼졌다.나는긴행렬하나가궁궐[덕수궁]담장의모서리를지나는광경을우리집창문을통해볼수있었다.”

그러나만세의환희는곧일본경찰과헌병들의잔혹한탄압으로이어진다.

“오늘아침9시에남녀학생들이인파가모여있던남대문역전에서시위를벌였다.학생들은해방가를불렀다.……학생들이이동을하여덕수궁앞에다다르자경찰들이진압에들어갔다.사복차림의이들이가게에서쏟아져나와서는몽둥이로학생들을때리기시작했다.많은학생들이무자비하게구타당했다.이화학당의한여학생이몽둥이로등을맞는것을보고우리비서인김봉율군이다가가말리려했다.그러자신분을위장한경찰로의심되는사복차림의일본인들이김봉율군을때리기시작했다.그의머리를때린몽둥이가세동강으로부러지자그들은그의목을주먹으로때리고고개를뒤로꺾어서는감옥에집어넣었다.”(1919년3월5일자)

“어제저녁일요일,서울서부의몇몇동네와종로에서동대문에이르는서울시가에서수백명의사람들이한국의독립을외치는데모가있었다.많은사람들이경찰과헌병들에의해베임을당했고,몇몇은죽임을당했다.토요일아침에는다섯명이살해됐다.”(1919년3월24일자)“평양에있는우리기홀병원과서울의세브란스병원에는처참하게칼로베어진환자들이매일이송되고있다.……현재병원의병실과복도는부상자로득실거린다.어제세브란스에서60장의침대시트와많은붕대를요청하는비상전화가왔다.……그들은맨손으로단지‘자유,우리에게자유를!’을외쳤던사람들이다.”(1919년3월28일자)

“요즘은밤에한국인이거리를걷기만해도경찰에게매를맞는다.……어젯밤거리를걷던사람들은만세를부르지않았음에도불구하고세명이살해됐으며많은사람들이다쳤다.”(1919년3월30일자)“3월31일저녁한한국인남성이시골에서올라와남대문에서기차를내려집으로걸어가고있었다.그는정부에고용된소위일본재향군인들(순전한악당들)에게잡혀서매를맞았다.어떠한구실도없었다.다만공포체제를조성하는것이었다.그남자는너무심하게맞아서밤사이에죽었다.이것은하나의예외적사건이아니다.이러한경우가수도없이많고증거도확실하다.”(1919년4월2일자)

노블여사는시위를하다붙잡힌이들이겪은심문과고문,감옥의열악한환경과불공평한재판과정등도상세히소개하고있다.그중에서도가장충격적인것은일본경찰들이여학생들을벌거벗겨고문하는장면이다.

“경찰서에서그들은몸수색을위해옷을벗으라는명령을받았다.그것은굴욕감을주기위한것이었다.잠시라도머뭇거리면금줄세개를단네다섯명의남자들로부터매를맞았다.감옥에서도그들은벌거벗겨진채지내며간부들의사무실로불려가서심문을당하고매를맞았으며,다시알몸으로감방으로돌아와야했다.……감옥에아직도남아있는두소녀는고문을당해야했다(출옥한소녀들의증언이다).한소녀는양쪽엄지손가락을한데묶여매달렸다.다른소녀는이화학당에서가장총명하고예쁜여학생으로진남포에서내가시작한최초의여학교출신인박인덕이다.그녀는옷을벗기우고심한채찍질을당했다.그녀는또한무릎을꿇고앉아무거운의자를들고있어야하는고문도당했다.만일떨려서손이내려오면팔을맞아야했다.”(1919년3월28일자)

《노블일지》는이러한공포분위기에서도용감하게진행된한국인들의동맹파업과동맹휴교,일본상품들에대한불매운동등당시서울의모습과항일운동의전개양상을세밀히그리고있다.

제암리학살사건에대한새로운증언
3월1일이후전국으로들불처럼번진만세시위가특히활발했던곳이수원일대였다.일본군은기독교와천도교세력이배후에있다고보고,이에대한계획적토벌의일환으로1919년4월15일제암리와고주리의예배당에신자들을모으고총살한뒤불태운다.이것이바로‘제암리학살사건’이라고알려진사건의개요다.하지만당시수원지역감리사였던남편과함께직접학살현장을둘러보고생존자들을만나증언을들은노블여사의기록에의하면,당시일본군의방화와살육이더폭넓은지역에서이루어졌으며희생자도알려진29인보다훨씬많았음을알수있다.먼저노블여사는사건의발단을다음과같이설명한다.

“최근일본정부는소위‘역도들’을제압할수있는더‘근본적인대책’을마련했다고한다.우리는맨손으로단순히‘독립만세’를외치는사람들에게얼마나더가혹할수있을지에대해상상할수없었다.그러나보병대2사단,포병대1사단,기병대2사단이일본으로부터파병되고난후우리가처음알게된사실은마을들이불타고있다는소문이무성하다는것이다.그리고특정마을들이불타버렸다는결정적소식은그곳에서서울로도피해온사람들에의해전해졌다.”(1919년4월2일자)

당시미부영사를위시한선교사들이제암리의피해상황을조사하기위해방문했을때“그들은실상이전해들은그어떠한소문들보다도훨씬참혹하다는것을알게됐다.그들은재가되어버린교회와숯덩이가된시신들을보았으며,살이타면서나는냄새를맡고병이날지경이었다.곡물창고와가축들도모두불에탔다.군인들은가정을방문하면서남자들을교회로모이라고했는데,그들이다모이자교회에불을붙이고안에있던사람들을모두불살라버렸다.누군가도망을치려고하면그들은총으로쏴죽였다.남편들이어떻게됐는지교회로보러왔던두여성이있었는데,하나는19세였고다른하나는42세였다.군인들은그들도총살했다.나중에아들이죽은한여자가군인에게다가가서자신도죽여달라고하자그는그자리에서그녀를총살했다.”
학살과방화는제암리에서만행해진것이아니었다.조사단은“다른다섯마을의상황이시체들을매장한것만빼고는위에서이야기한제암리의상황과비슷하다는것을발견했다.……그들은그지역에서전멸된열여섯마을을알아냈다.”《노블일지》에는남양리,화수리,경대리,아찬리등의구체적피해지역이명시되어있으며,학살이교인남성들만이아니라마을주민남녀노소를가리지않고행해졌음을밝히고있다(“그곳[제암리]에서2킬로미터쯤떨어진곳에있는어느집의경우에는그때의사건으로노인과아들셋,손자셋과며느리한명이죽었다.한집에서여덟명이나희생된것이다.”-1919년7월12일자).당시에는매장을하려면일본측의허가를받아야했는데,사인에자상이나총상이라고적으면허가를내주지않았다.그래서“그들은매장에대한인가를받기위해‘자연사’라고써야했다.”(1919년4월2일자)이렇듯억울한‘자연사’가얼마나많았는지는앞으로더조사되어야할부분이다.
한편남편아서노블이하세가와총독을찾아가교회를방화한것에대해따지자“하세가와총독은재건축을위해한건물당500엔을보상하겠다고약속하면서그사실을알리지말아달라고부탁했다.”(1919년5월15일자)고한다.사건을축소은폐하려는일제의의도가엿보이는대목이다.

한국근대사의압축적증언:동학혁명에서광주학생운동까지
《노블일지》는노블여사자신의목격담이나교인들의단편적전언,당시의풍문들을통해한국근대사의주요사건들을직간접적으로전달하기도한다.그것은동학군의북상에따른외국인들에대한테러소문(1893년5월17일자)에서부터청일전쟁과갑오개혁으로이어진일본군의경복궁습격사건(1894년7월23일자),1904년4월15일일어난덕수궁의화재,광주에서시작된거국적학생운동의하나로1929년12월에서1930년1월사이배재학당과이화학당에서벌어진만세시위에이르기까지다양하다.그중특기할만한것을몇가지들면다음과같다.
1904년2월의일지에서노블여사는러일전쟁의발발로피난을떠나는평양시민들의모습을묘사하고있는데,이는당시의정황을알려주는보기드문자료다.

“일본영사가시내의주요대문들에방을붙였다.‘평양에4~5만명의군인들이들이닥쳐주둔을할터인데,이들로부터여성들을보호해줄수없으니모든젊은한국인부녀자들은서둘러집에서나와산이나먼곳으로피해있으라.’라는내용이었다.젊은부녀자들이피신을하니이들을보호하기위해몇몇남자들과나이든여자들도아기를업고짐들을지고따라갔다.아침부터밤까지각종살림살이들을보따리에싼이들이평양의주요대문들밖으로쏟아져나갔는데,그러한피난행렬이며칠동안이어졌다.……등에매달린아기들,지팡이에의지해가는노인들,옷가지며가재도구들을천에싸서머리에인이들,머리와손에짐을이고지고부모나조부모옆에서뛰어가는어린아이들의모습은참으로딱한광경이었다.”

한편1919년3월2일자의기록은3·1운동당시고종독살설이얼마나시중에팽배해있었는지를확인할수있는대목이다.

“일본과한국은함께움직일때더욱발전할수있으며,한국은일본으로부터분리되기를원치않는다는내용의문서에거의강제적으로서명이이루어졌다.고종황제가이에격노하며서명하기를거부하자,강제적으로서명을받아낸이들은그에따른파장이두려워고종황제를독살하고궁녀들도살해했다.바로윤덕영과호상학[당시전의였던안상호]의짓이었다.한국과일본의관계를담은문서에이완용,조중응,김윤식,송병준,임태영,신흥우가서명을했고,그내용을담은전단이온거리에뿌려졌다.”

《노블일지》는러일전쟁이후한일병합때까지일본군의강압적인수탈과폭력이어떻게자행되었는지도구체적인사례를들어밝히고있다.그중가장황당하고분노할만한것이1908년6월16일노블여사의평양집에서일어난사건이다.난데없이노블여사집에들이닥친일본군인에게한국인관리인이나가달라고하자일본군은그를구타하고칼을휘둘러죽이려한다.“우리가식당으로들어서는순간위쪽에서일격을가하는소리가들렸다.그군인이칼로관리인정씨를베었는데,관자놀이위쪽으로3센티미터정도되는상처는뼈까지드러날정도였다.그즉시두명다아래층으로내달렸는데,정씨의머리에서는피가흐르고있었고,옷은피범벅이되어있었으며,그가지나가는곳마다핏방울이떨어졌다.”노블여사가이를말리자일본군인은황급히도망치고만다.노블여사는이일을끝까지따져급기야그일본군인을체포하게하고일본헌병대장과평양지사에게사과를받아내지만자기집에서일하는사람조차제대로지켜낼수없는현실에자괴감을느낀다.“사람들은올드블랙조[정씨]가나에게너무도고마워한다고말하지만나는아무것도한것이없었다.할수있는것이아무것도없었다.”(1908년6월18일자)외국인의비호를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