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전을 탐험하는 든든한 지도
<이방인>, <그리스인 조르바>, <오만과 편견>, <햄릿>, <노인과 바다>, <달과 6펜스>, <1984>…….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학창시절 누구나 손에 잡아봤을 법한 고전들이다. 이런 작품들을 제대로 독해하는 것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예를 들어,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햄릿> 의 주인공 햄릿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유부단의 상징에 불과한 것인지, 나아가 몇십 년~몇백 년 전 작품들이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어떤 보편성을 획득하는지 등의 의문들이 꼬리를 물곤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믿을만한 누군가가 조금만 방향을 잡아준다면, 그리고 눈높이가 비슷한 누군가와 함께 작품을 읽고 소통할 수 있다면, 세계명작 읽기는 훨씬 더 신나고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깨기』는 세계 명작 소설을 혼자 읽어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든든한 길잡이다. 저자인 김태빈 교사는 한성여고에서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가슴 뛰는 삶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어 본인의 전공인 문학을 선택했다. 무기력증에 빠져들어가는 젊은이들이 <햄릿>을 통해 존재에 대한 번민을, <오만과 편견>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오뒷세이아>를 통해 자기성숙에의 열망을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저자는, 고전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을 좀더 깊게 들여다보는 한편 현실의 적나라함을 직시하고 닫힌 세상을 깨트릴 용기를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추천평
세계명작소설들은, 산으로 비유하자면, 아주 크고 높은 산과 같다. 의미의 길 찾기도 힘들고 내용 정복도 만만치 않다. 어느 골짜기에 어떤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이럴 때 신뢰할 만하고 자세한 지도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깨기』는 세계명작이라는 산들을 오르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지도와 같다. 이 지도를 통해서 고등학생들은 물론이고 대학생이나 일반인들도 멀고 어렵기만 했던 명작소설들로부터 많은 의미와 사유와 감동을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태빈 선생의 세계명작소설 읽기의 길안내는 친절하고 믿을 만하다.
이남호|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고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입니다. 하지만 해님과 달님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말없이 우리를 비춰주는 오랜 벗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새삼스레 그 벗과의 오래된 만남을 주선해 줍니다. 너무 뒤늦게 만난다고 어려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좋아요. 김태빈 선생님은 참 믿음직한 중매쟁이니까요. 자, 이젠 여러분이 껍질을 깰 차례입니다.
진웅용| 용화여고 국어교사
고전소설. 어감부터 딱딱한 이 장르엔 손을 대기가 쉽지 않다. 일단 거부감을 갖고 보니 그 속에 녹아 있는 삶의 지혜도, 의외로 익숙한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도 알기가 어렵다. 김태빈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고전작품들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이유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의 질문들은 딱딱한 편견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생각이 깨어날 수 있도록 지표가 되어준다.
신정희| 한성여고 학생
<책 속으로 추가>
햄릿은 행동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사고는 명백히 분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희극배우처럼 과장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독백 장면에서는 현실을 직시하는 사색가로서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는 ‘타인에 대한 사회적 역할놀이와 본래적 자아의 고독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인물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인간상이었습니다. 이전 시대 문학작품의 주인공은 거부할 수 없는 신의 명령이나 운명에 순응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단호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햄릿은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나 서양 중세의 로망에 등장하는 영웅보다 우리와 닮았습니다. 햄릿이 처한 모순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인척인 삼촌에게는 복수해야 합니다. 어머니이자 새 숙모는 증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수를 위해서는 냉철해야 하나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는 미치광이 짓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배신에 본심과는 달리 폭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위선과 기만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존재의 모순을 느끼는 것이, 물론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비단 햄릿뿐일까요?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혹은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통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삶의 모순으로 인한 갈등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입니다. 햄릿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은 신처럼 고귀하고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며, 용모는 준수하고 행동은 천사처럼 아름답습니다. 또한 동시에, 역시 햄릿의 말처럼, 인간은 ‘흙 중의 흙’과도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 존재의 불확정성만큼 우리의 삶 또한 모순투성이입니다.
(……) 『햄릿』을 읽는 우리는 과연 이 연극이라는 ‘농담’ 속에서 어떤 ‘독’을 건져 올려야 할까요?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이어야 할 것입니다. 김영랑은 ‘허무한듸!’라는 한 마디의 자조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올곧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를 노리고 할퀴려는 ‘이리 승냥이’가 앞뒤로 덤비는 상황에서, ‘내 외로운 혼(魂)’을 건져내기 위해 ‘독’을 차고 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연극을 포함한 예술이 주는 최고의 미덕은, 삶이 결코 무균실이 아니며, 설사 그것이 진창일지라도 기꺼이 수용해야 하며, 그것을 특별한 과장 없이 수용하는 의지를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햄릿은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서 지금도, 연극으로 영화로, 드라마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 햄릿의 모순, 내 삶에는 없을까, <햄릿> 중에서
상어에게 생명이자 자기 자신이기도 한 고기를 다 빼앗긴 것은 우리 기준으로 볼 때 분명 패배입니다. 그런데 산티아고 노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를 패배하게 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삶에는 패배도 승리도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세울 만한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매순간의 선택이 현재의 내 삶을 만들어갑니다. 그렇다면 후회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불성실이나 삶의 목적이라는 말로 꾸민 허영은 지금-여기에서의 삶에 대한 무책임일 뿐입니다. 산티아고 노인은 어쩌면 이러한 사실을 온전히 자신의 몸을 놀리는 노동을 통해 깨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배에서 내려 아무 도움도 없이 어구를 정리하고 언덕 위에 있는 집을 오르는 산티아고 노인의 모습에는 자신의 몸보다 큰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의 모습이 겹칩니다. 시지프가 절망하는 이유는 바위를 밀어올리기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아도 곧바로 굴러 떨어지는 상황이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패배는, 영원히 연기되는 승리는, 결코 그의 삶을 절망으로 떨어뜨리지 못합니다. 여기에 패배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삼일간의 사투 끝에 얻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그럼에도 또 다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산티아고 노인의 경우도 시지프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희망의 숫자인 85번째 되는 날에도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그가 건져 올린 것은 ‘큰 꼬리가 달린 거대한 고기의 백골’일 뿐입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수확물을 마지막까지 약탈하는 상어 떼를 무심하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때의 무심은 결코 패배자의 낙담이나 자포자기, 혹은 육체의 극단적 피로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패배가 삶 전체의 실패는 아니라는 인식과 최선을 다한 후의 결과에 순응하는 자부심, 삶의 고통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인내와 의지 등이 그 ‘무관심’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고 ‘노인에겐 모든 것이 지나간 과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인과 바다』에 감동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의 일생을 자신의 일에 묵묵히 전념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우직함입니다. 그의 삶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근사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꾸리면서도 그 삶을 결코 과장하지 않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가혹한 노동 끝에 아무런 실질적 이득을 얻지 못해도 그의 삶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오히려 산티아고 노인은 ‘용기는 가능한 결과들을 무시하는 능력이다’는 자신의 창조주의 말을 삶으로 증명한 인물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줄 압니다. 산티아고 노인은 고기를 죽이는 것이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것이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고기를 죽인 것은 단지 살기 위해서도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도 아니다. 긍지 때문에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긍정이야말로 키 대신 마우스로 인터넷을 떠다니는 현대인들이 잊어서,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 ‘나’를 과장하지 않기와 ‘세계’를 긍정하기, <노인과 바다> 중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창가에 이젤이 놓여있고 그 위에 얹힌 그림은 바깥의 풍경과 겹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실재하는 나무인지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애매성과 중첩성은 곧 인간 인식의 한계, 인간의 불가피한 존재론적 조건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어떤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확신은 사실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확신은 인간 관계에도 그래도 적용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관계를 통해 타인과 하나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도 낯선 존재입니다.
『인간의 조건』의 주인공 기요는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느낍니다. 자기 자신도 낯선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