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4: 비밀과 거짓말 (김성한 역사소설)

7년 전쟁 4: 비밀과 거짓말 (김성한 역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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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동아시아 삼국을 둘러싼 서사, 7년전쟁의 전모!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을 그린 김성한의 역사소설 『7년전쟁』 제4권 《비밀과 거짓말》. 198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은 1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제목을 바꾸는 곡절을 겪기도 했는데, 2012년 60년 만에 돌아오는 임진년을 맞아 다시 펴내면서 원래의 제목을 찾게 되었다. 조선과 일본, 명이 얽혀 있었던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을 다루고 있다. 전쟁 발발에서부터 명의 참전과 휴전, 화평협상, 재침과 종전에 이르는 7년의 기나긴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고 전쟁 당사국인 세 나라의 상황을 가능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명한다. ‘임진왜란’ 하면 왜적, 이순신, 거북선 등 몇몇 단어만 연상하던 것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기존 패권국이었던 명과 떠오르는 강국인 일본의 충돌이 빚어낸 역사의 소용돌이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이 소설은 임진왜란을 둘러싼 동아시아 삼국 간의 복잡한 관계에 주목하며, 전쟁은 인간 고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같이 드러내는 거대한 흐름임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작가는 임진왜란 관계국들의 사료를 폭넓게 조사하여 시대적인 배경, 전쟁과 평화의 표면과 이면을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했다. 또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들이 보여주는 행태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작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로 소설 읽기의 재미를 더했다.
저자

김성한

저자 김성한은 지난 2010년 타계한 작가 김성한의 생애는 세 시기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무명로>가 당선되어 등단한 후 56년 <바비도>로 제1회 동인문학상을, 58년 <오분간>으로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는 등 5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던 시기가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56년 <사상계> 주간으로 인연을 맺은 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장, 논설주간을 지내고 81년 같은 신문사를 퇴임하기까지 언론인으로 산 시간이다. 그리고 80년대 이후《왕건》,《임진왜란》,《진시황제》 등 장편 역사소설을 잇달아 내놓는 시기가 그 세 번째다. 이른바 순문학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생산한 후, 언론인으로서 정년까지 일하고, 다시 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대작을 쏟아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가 김성한인 셈이다. 작가로서의 삶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언론계 투신 후에도 김성한이 문학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60년대 후반부터 장편《이성계》와 《이마》를 썼으며, 역사소설을 쓰기 위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오랜 언론계 생활은 철저한 고증과 균형 잡힌 시각, 간결한 문체와 빠른 전개가 특징인 김성한 역사소설의 바탕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적이고 반항적인 경향의 초기 단편들, 그리고 역사의 기록자 입장에 섰던 언론계의 경험이 버무려져 우리나라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김성한 역사소설이 태어난 것이다. 김성한은 1919년 함경남도 풍산에서 태어나 함남중과 야마구치고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서 수학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했으며, 60년대 초 영국 맨체스터대학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서 홀로 묵묵히 책을 읽고 홀로 글을 쓰는 금욕적 삶을 살았던 작가는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 : 《암야행》,《오분간》,《개구리》,《바비도》(이상 단편집),
《요하》,《왕건》,《이성계》,《7년전쟁》,《이마》,
《진시황제》,《시인과 사무라이》(이상 장편 역사소설),
《길 따라 발 따라》,《거인들의 시대》(이상 역사 에세이) 등

목차

황해도초토사 이정암
농성전과 유격전
조여드는 적의 대군
화공(火攻)
이순신의 부산포해전
흰 여우 원호
앞잡이들
대장의 그릇, 정문부
역적 국세필의 독백
함경북도를 회복하고
호걸 김시민
진주성 전투 ─ 한 폭의 지옥도
북경의 하늘 아래
개선장군 이여송
평양의 유키나가는 잠 못 이루고
누르하치의 제안
조선을 반쯤 갈라 준들
외교의 천재들
우리는 수모를 받아 마땅하다
비밀회담
천병(天兵)을 맞을 준비
탄로 난 거짓말
제독 이여송
가짜 칙사
계책은 실패하고
티 없는 얼굴의 두 스님
평양성 탈환 작전
총공격
일본군의 대탈출
아비지옥
무차별 학살
윤두수의 눈물
아름다운 얼굴
광해군의 분조를 폐지하고
일본군의 서울 집결
벽제관 전투
명군 제독의 도망
수도 탈환은 조선의 손으로
적의 길을 끊다
행주산성 전투
진퇴양난의 일본군
만나서 화평을 의논하자
임해군의 편지
화평을 구걸하는 적
적중의 거인, 이신충
조선은 모르는 비밀 접촉
심유경과 유키나가의 재회
삼국의 다른 처지
선조 임금의 헛걸음
조선군을 막는 볼모
서울은 수복되었건만
명군의 훼방
융숭한 대접
진주를 치는 목적
일본군 총동원령
김천일의 진주 사수 결의
우뚝 솟은 거인, 황진
끝없는 전투

출판사 서평

철저한 고증, 입체적 인간상, 간결한 문체
독자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김성한 역사소설의 백미
“<7년전쟁>은 단순한 소설 아닌 장대한 스케일의 전쟁사이자 사회사”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을 그린 최초의 역사소설


김성한의《7년전쟁》은 특별하다. 임진왜란을 다룬 수많은 소설 가운데 국제전 즉, 조선과 일본, 명이 뒤엉켜 치렀던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을 다룬 최초의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전쟁 발발부터 명의 참전과 휴전, 화평협상, 재침과 종전에 이르는 7년의 기나긴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전쟁 당사국인 세 나라의 상황을 가능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감한 소설은《7년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같은 특별함 때문에 김성한의《7년전쟁》은 그 가치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작품이 발표되었던 1980년대는 ‘임진년에 왜놈이 일으킨 난리’에 국제전의 성격을 부여하고, 일본과 명나라 내부 사정에까지 차분한 시선을 주는 접근법이 일반에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일렀다. 1984년 연초부터 매주 토요일 <동아일보>의 한 면을 가득 채우며 연재되던 이 작품은 1년 만에《7년전쟁》에서《임진왜란》으로 제목을 바꾸는 곡절을 겪었다.

<7년전쟁>에서 <임진왜란>, 그리고 다시 <7년전쟁>으로

작품이 처음 연재되던 때로부터 거의 30년이 흐른 2012년 임진년. 임진왜란 발발 7주갑(420년)을 맞는 올해 처음 선보인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는 임진왜란의 명칭을 ‘임진전쟁’으로 표기했다(국사교과서는 ‘임진왜란’ 표기). 이 명칭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임진란의 국제전적 성격을 조명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삼국이 부딪쳤던 대규모 전쟁, 이후 삼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국제전의 참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데 학계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료가 새롭게 발굴되고 나라의 위상이 달라지면 지나간 역사를 보는 시선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임진왜란’이 ‘임진전쟁’으로 바뀌는 세월 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고, 간추린 왕조실록이 일반 독자들을 위한 교양서로 읽히는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30년 전에 관련 삼국의 자료를 두루 살펴보고 “가능하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인간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생각해 보고자 했던” 대가의 작품은 오랫동안 잊혀진 채로 묻혀 있었다.
<7년전쟁>으로 시작하여 도중에 <임진왜란>이 되었던 이 작품에 본래의 이름 <7년전쟁>을 되돌려 주고 복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쟁, 선조, 김성일, 왜적, 이순신, 거북선 등등 몇몇 단어에서 맴도는 게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그 좁은 인식을 동아시아의 기존 패권국 명과 신흥강국 일본의 충돌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 그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갔던 오래 전 우리의 자화상으로 성큼 넓혀주는 것이 김성한의《7년전쟁》이다. 우리 근세사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었던 임진왜란의 전모와 참모습을 알려줄 작품을 이 외에 달리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60년 만에 돌아오는 임진년인 올해 이 대작을 새롭게 손보아서 다시 내놓는 것이다.

역사소설은 사료(史料)라는 큰 가지에 잎사귀와 꽃을 붙여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

김성한의 역사소설은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곤 했다.《7년전쟁》에 앞서 나왔던《고려태조 왕건》 또한 역사소설이 민중주의 일색으로 흐르던 80년대에 궁예와 왕건, 견훤 등 왕조를 창업한 지도자들의 이야기로 제 가치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은 채 홀로 묵묵히 책을 읽고 홀로 묵묵히 글을 썼던 김성한의 문학적 태도에서 가장 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소설은 사실(史實)을 밝히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고증에 철저했던 김성한식 역사소설 쓰기에서 기인하는 바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고 하겠다.
작가는《7년전쟁》의 연재를 마치면서 “흔히 시(時)는 음악, 소설은 그림에 비유되거니와 이미 완결된 시대상(時代相)을 그리는 역사소설은 그림 중에서도 풍경화에 속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풍경화는 무엇보다도 그 대상에 충실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가능한 한 관계 3국의 사료(史料)들을 광범하게 조사하여 시대적인 배경, 전쟁과 평화의 표면과 이면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사실(史實)’을 밝혀내려는 작가의 노력이 임진왜란을 둘러싼 동아시아 삼국 간의 복잡한 얽힘을 드러냈고, 전쟁은 인간이 타고난 온갖 아름다움과 추함을 한꺼번에 드러내주는 거대한 소용돌이임을 생동감있게 보여주었다.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허구의 이야기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간세상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김성한의 역사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역사소설은 사료(史料)라는 큰 가지에 잎사귀와 꽃을 붙여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라고 스스로 규정했듯 작가는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입체적 인간상, 간결한 문체, 김성한의 복원

현실의 인간은 단선적이지 않다. 악으로 점철된 인간도, 선으로만 감싸인 인간도 없다. 세상사 또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명쾌하게 재단되지 않는다. 김성한의 역사소설은 온갖 아이러니로 뒤덮인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들을 입체적으로 그려 낸다. 가령 김성일만 해도 꼬장꼬장한 성질 탓에 판단을 그르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의 경험으로 예전의 김성일이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온갖 인간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지금의 현실에 겹쳐놓고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거기에다 김성한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문체는 소설 읽기의 재미를 유감없이 선사한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힘있는 문체는 5권 2천5백여 쪽에 이르는 분량의 압박을 잊게 만든다.

김성한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소설의 대가로 기억된다. 긴 호흡의 대하 역사소설은 도서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치부되는 게 요즘의 세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장대한 서사가 사라진 이 시대에 김성한 역사소설이 갖는 강한 흡입력과 고증에 충실한 사실성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7년전쟁》의 복간이 역사소설의 대가 김성한의 작품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리뷰1
한명기(명지대 교수, 사학)

아리랑 3호, 다네가시마, 그리고 임진왜란


2012년 임진년 5월 18일, 인공위성 아리랑 3호가 발사되었다. 언론에서는 “한국의 세 번 째 다목적 실용 위성이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다”거나 “685km나 되는 높은 상공에서 지상의 중형 승용차까지도 식별할 수 있는 첨단 위성을 보유하게 되었다”며 아리랑 3호의 발사 성공을 크게 보도했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한 것은 아리랑 3호가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일본제 로켓에 실려 일본의 우주 기지에서 쏘아 올려졌다는 점이다. 인공위성 제작 기술은 괄목할 정도로 발전했지만, 한국은 아직 인공위성을 우주 궤도에 띄울 수 있는 로켓을 만들 능력이 없다. 아리랑 3호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제작한 H2A 로켓에 실려 규슈(九州)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아리랑 3호를 발사할 때 일본에서는 “한국의 로켓 기술이 일본보다 수십 년 뒤처진 196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거나 “아리랑 3호 발사 성공을 계기로 일본이 우주산업 수출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등의 보도가 이어졌다.

아리랑 3호가 발사되었던 다네가시마가 어떤 곳인가? 일찍이 1543년 마카오에서 동남아로 향하던 중국 배 한 척이 이 섬에 표착(漂着)했고,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사람은 다네가시마의 영주에게 조총 한 자루를 선사한다. 당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맞아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던 일본의 다이묘들은 이 새로운 무기의 위력에 열광했고, 조총은 순식간에 각지로 퍼져 나가 일본 열도의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다. 조총수를 양성하는 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 통일을 달성한다. 일본을 손에 넣고 기고만장해진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자신의 길잡이가 되라고 조선을 협박한다. 조선이 요구를 무시하자 이윽고 히데요시의 총구가 조선으로 향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요컨대 다네가시마는 한반도 전역을 참혹한 전화(戰禍)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 데 출발점이 되었던 문제적 장소였다.
아리랑 3호 발사 소식에서 다네가시마와 조총, 그리고 임진왜란을 떠올리면서 올해가 전쟁이 일어난 지 꼭 7주갑(周甲)이 되는 해라는 사실에 다시 놀란다. 다네가시마에 조총을 갖고 표착했던 포르투갈 사람은 그것이 정확히 50년 뒤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든 대전란의 불씨가 되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리스본에서 인도의 캘리컷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던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마카오, 일본으로 몰려들었다. 후추 등 향료를 찾아 나섰던 그들이 나타나면서 조총이 전래되었고, 분열되었던 일본의 통일이 촉진되었는가 하면 끝내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빚어졌다. 이른바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의 개막이 남긴 여파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나타난 ‘나비효과’였다. 수백만 생령의 목숨을 빼앗고 동아시아를 격변 속으로 몰아넣은 임진왜란은 이렇듯 동서양 문명의 조우에서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469년, ‘문제적 장소’ 다네가시마에서 아리랑 3호가 H2A 로켓에 실려 발사된 것은 예사롭지 않다.

동아시아 전체의 시각을 담은 역사소설 《7년전쟁》

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