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서울에서가장거대한문화유산은무엇일까.바로옛서울,한양을감싼내사산을따라쌓은도성(都城)이다.오늘날“서울한양도성”이란이름으로사적제10호로지정되어있는도성은수많은성곽중하나가아니었다.임금과조정그리고그안의백성들을지키는성곽이자,왕도한양의경계이자표상인유일한존재였다.
서울을,그리고조선을더깊이이해하기위해도성,궁궐,종묘를차례로다룰‘홍순민의한양읽기’의첫번째책인《홍순민의한양읽기:도성》은궁궐,종묘와더불어한양을조선의왕도이자수도,국도로만든도성의역할과상징성에주목하고,그역사와가치를강조한다.
도성이쌓인자리와그지리를읽으면왜한양이한나라의수도로선택되었는지를알수있다.또한도성에는조선왕조의역사가,도성을쌓은전국팔도백성들의피와땀이배어있다.도성은서울의역사를증언하는거대한기록물이자,옛날의한양을오늘의서울을연결하는고리다.도성을읽는것은한양,그리고서울을읽는첫걸음이다.
출판사제공책소개
도성,궁궐,종묘로향하는‘홍순민의한양읽기’,그첫번째책
조선의왕도한양(漢陽)으로500여년,대한민국의수도서울특별시로70년을넘기고있는서울.무엇이서울을서울로만들었는가?‘수도’라는뜻의순우리말이기도한‘서울’이라는이름의이도시의정체성은어디에서기원하는가?한양을조선의도읍으로,나라의중심으로만든세건조물은종묘(宗廟),궁궐(宮闕),도성(都城)이었다.이제막한양으로천도한태조에게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올린글에는“이들은모두나라를가진사람이라면마땅히가장먼저갖추어야할바입니다”라고하여그중요함을강조하고있다.이셋이갖는의미와가치를알아보면서,지금서울의밑바탕을이루는옛서울한양의이면과내면을찾는것이‘한양읽기’를하는뜻이다.그리고《홍순민의한양읽기:도성》은그출발점이다.
도성은임금과나라의표상이었다
흔히도성을“한양도성”이라는이름으로부르고,사적제10호로지정된정식명칭도“서울한양도성”이다.하지만한양을도읍으로삼은조선의도성은오로지하나뿐이었다.그렇기에이책에서는“도성”이라는말을사용하였다.도성은“엄내외(嚴內外).고방국(固邦國)”하기위해세워졌다.“안팎을엄히가르고,나라를공고히한다”라는뜻이다.안팎을엄히가른다함은곧한양의경계를가른다는것이다.여기서말하는‘나라’는오늘날의‘국가’와는다른개념으로,임금과조정을의미한다.따라서도성역시단순히수도를두른성곽이아닌,임금과나라의권위를보여주는표상이었다.《홍순민의한양읽기:도성》은도성을지금남아있는성벽을돌아보며,주변에다른문화재나유적도함께돌아보면그만인답사의대상으로보지않는다.대신상징성과역사에주목한다.
도성은한양의내사산을따라쌓은성곽이다
이한문장에도성의자연적,지리적위치가담겨있다.한양이란말은그자체로‘산의남쪽,물의북쪽’,즉백두산에서부터내려온백두대간의한끝자락인북한산,바닷길과강길을이어주는한강,그둘사이에있는자리를가리킨다.북한산에서마저내려와한양을감싼산줄기인내사산,즉백악(북악산),인왕산,타락산(낙산),목멱산(남산)의능선.도성은그위에서있다.이러한한양의지리를읽고,내사산중에서도주산(主山)인백악에서부터타락산,목멱산,인왕산그리고다시백악의기슭인창의문까지지금의도성을한바퀴휘돌아보는것은도성을만나기위한첫걸음이다.내사산을따라,자연지형을거스르지않고쌓은도성의모습은조선시대에많은그림의소재가되기도하였고,특히한양인근의명소를즐겨그린진경산수의대가겸재정선의그림에는단골손님이었다.
도성에는조선의건국과수난의역사가새겨져있다
도성의역사를읽는것은곧조선의역사를읽는것이다.《홍순민의한양읽기:도성》은도성의역사를따라가며,시대의변화와임금들의치세를읽어본다.태조는한양을새나라의도읍으로고르고불과두해겨울만에도성을완성하였다.도성을쌓기전에그자리를직접돌아보기도하였고,완공된후에도타락산에오르는등합쳐서세차례에걸쳐도성을돌아보았다.조선을건국한창업군주로서의과단성과무장으로서의면모가드러나는장면이다.
다만태조대에쌓은도성은흙으로된부분도일부있었는데,세종대에는이를석성으로완비하였다.실제로수축을주도한것은당시태상왕이었던태종인데,백성들의고통을감수하고도전국팔도에서32만여명을동원하여공사를강행하였다.태종은비정하면서도,자식을위해서는스스로나서악역을자처하길마다하지않았다.그에반해세종은수축에주도적인역할을맡지는못했으나,고된노동과병에시달리는백성들을위해이런저런조처를취하게하였다는기록이남아있다.
도성의역사를보면조선의변화해가는사회와정치가보인다
도성은왜란,이괄의난그리고뒤이어두차례의호란때제역할을하지못하고버려져황폐화되었다.나라가다시안정을찾은뒤,버려졌던도성을대대적으로수축하여다시세운것은숙종이었다.하지만희빈장씨와인현왕후사이에서오락가락했던개인사와마찬가지로,숙종은도성의수축에있어서도우유부단하게결정을번복하거나,유사시의도피처로북한산성을짓는등도성에마음을두지않았다.
그뒤를이은영조는대대적인공사는벌이지않았다.그러나임금이정국을주도하는탕평정치를추구한것과마찬가지로,도성을왕권강화의한수단으로이용하였다.영조는목숨을바치더라도도성을버리지않겠다는마음을담은〈어제수성윤음〉을내려도성의위상을다시세우고,양반과평민을가리지않고동원하는도성방위체제를마련하고그중심에자신을두었다.그렇기에영조는도성에더욱큰관심을쏟을수밖에없었다.
도성은그몸에수많은기록들,각자들이새겨져있다
도성곳곳에는300개가넘는각자가성돌에새겨져있다.주로도성의축성과보수와관련한정보를담고있는이각자들은도성을도는답사객들의호기심을자극할뿐만아니라,다른사료등에서는찾아볼수없는고유한이야기를담고있기도하다.태조대의각자들은백악정상을기점으로97개의천자문자호로나뉘었던도성의각구간을알려준다.세종대의각자들은해당구간을쌓은군현의이름이있어일종의군현단위의실명제를했던증거가된다,실제로성벽이무너졌을때,그구간을맡았던고을의관원들이불려와다시보수를한기록도남아있다.숙종대이후의각자는군현명이아닌,당시도성의수축을맡았던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명칭과담당자들의이름,공사를한일시등이상세하게적혀있어조선초기와는달라진도성관리체제,더나아가조선의사회의변동을짐작케한다.
도성에는백성들의피와땀,그리고삶이배어있다
《홍순민의한양읽기:도성》은흔히외면당하곤하는백성들의눈높이에서도성을바라본다.도성을쌓을때직접돌을뜨고,쪼고,나른이들은백성들이었다.그과정에서수많은사람들이죽거나다치기도하였다.시대에따라달리다듬어진성돌들의모양,각자에서찾을수있는지금은낯설기도한지역명과안이토리(安二土里)같은어쩐지친숙한이름들은500년긴세월에걸쳐고된성역(城役)에동원되었던이들의삶을떠올리게한다.도성의존재로삶에가장큰영향을받았던이도백성들이었다.도성문의문루에달린종소리에맞춰일어나고잠에들었으며,문이열리고닫힘에따라도성의안팎을왕래하였다.도성은임금과나라의권위를보여주는표상들중가장백성들에게친숙하고가까운것이었다.
높은문도성문.하지만“사대문,사소문”은없었다
도성이수많은성곽들중하나가아니었듯,도성의문들역시단순히사람과물자가오가기위한통로에그치지않았다.도성문은국문(國門),곧나라의문이었다.도성문밖으로쫓겨나는것은공식적인처벌은아니지만문외출송이라하여중앙정계에서쫓겨나는것으로받아들여졌고,각성문에는위계가있어임금은대부분의경우숭례문으로출입하였다.사신들역시어느나라에서왔느냐에따라출입하는문이달랐다.장례에도그런위계가적용되어,대부분의장례행렬은광희문이나소의문으로나갔으나,임금의장례행렬은숭례문으로나갔고,다른왕족들의장례행렬은흥인문이나돈의문을이용하기도하였다.
다만도성문들간에위계가있었던것은맞지만,흔히말하는“사대문,사소문”이있었던것은아니었다.“북대문”이라고일컫는숙정문은대문이었던적이없었으며,돈의문역시“서대문”이란이름으로불린적은적어도조선말기이전까지는거의없었다.《홍순민의한양읽기:도성》은도성문의이름과별칭에대한막연한통설을받아들이는대신,당대의기록에근거하여시대에따라달라진대문-소문,정문-간문의개념을확인해본다.
도성은지금도살아있다
일제의침략이본격화하면서종묘,궁궐,도성.이셋중가장먼저파괴와왜곡의대상이된것은도성이었다.근대화와도시의확장으로도성은본래의기능을잃고훼손될수밖에없었겠으나,나라가망하기전부터시작된도성의훼철은그런자연스러운변화의결과가아니었다.1907년에는숭례문좌우의성벽이후일다이쇼천황이되는요시히토친왕의방문에맞추어헐렸으며,경술국치이후일제강점기35년동안도성은곳곳이끊기고소의문,돈의문,혜화문이차례로헐렸다.해방이후에도도성은관심을받지못해목멱산구간도성의성돌은자유센터의축대로쓰이는등수난을면치못했다.1970년대에들어서야‘국방유적정화사업’의일환으로복원이시작되었으나,면밀한고증과연구없이성급하게이루어져도리어그가치를훼손하기도하였다.지난2008년에는숭례문이어이없이방화로불타버리는일도있었다.그럼에도도성은지금도살아있다.조선신궁,동대문운동장등에깔려사라졌던성벽의발굴조사와복원이이루어지고있고,많은사람들이도성을찾고있다.600년동안자리를지킨도성은그만큼길고굴곡많았던서울의역사,그자체이기도하다.도성을보면서울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