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악백년」은조선최초의피아니스트김영환이근대음악이조선에‘전파’ㆍ‘번역’ㆍ‘실천’되는과정들을회고한것이다.김영환의회고는1974년4월19일〈중앙일보〉에연재된‘남기고싶은이야기들’코너에「양악백년」으로35회로연재되었다.자신이경험한최초의근대(서양)음악에대한매혹과충동에서부터일본유학,연주,근대음악가들,음악기획,음악교육,음악후원등등에이르기까지다채로운이야기들로가득하다.잘알려진근대음악가들에대한이야기들만으로도충분히회고를읽는즐거움이있는데,근대음악이당대의근대지식내에서어떤위치에있었는지에대한평가와‘근대음악’에‘도달’하는회로가나타나있는것은흥미로운대목이다.즉,일종의독학자의경로와선교사로부터일본으로그리고미국혹은유럽으로이동하는음악가들의회로는근대음악이어떻게전통을생산했는지또규범과질서를마련해갔는지를잘보여준다는것이다.
김영환의회고가직접이런이야기를기술하는것은아니지만,그만큼회고가무의식적으로갖고있는인식은탐구되어야할가치가있는것이라고할수있다.내재적발전론이나이식문화론과같은이항대립적구도를벗어나근대음악=서양음악이수용되는과정자체가어떤방식으로이루어진것인지를들여다보는것은문화인류학적인과제이기도하다.그런점에서김영환의회고는근대음악사에녹아있는무의식이적층되어있는귀한자료라고할수있을것이다.회고라는글쓰기스타일이사실자체의재현일수없다는사실도매우중요하다.달리말해,1970년대에대대적으로이루어진‘기억’과‘회고’의구조속에김영환의글이들어가있다는것도주지해야하는것이기도하다.그만큼그의글을읽는재미는당대적이기만한게아니라,동시대적감각으로도독해할수있는여러이야기들이충만한것이다.
한편으로이런회고는굳이꺼내지않으면문서고에서켜켜이먼지를쌓고있을수도있다.이를꺼내고다른시공간속에조명하는일은시간,노동,자본을들인다는점에서또다른문화적기획의연장선상에있는것이다.김영환의회고를묶는데,김영환의조카인조범구(연세대명예교수,전심장재단이사장)가나서지않았다면불가능했을것이다.이는김영환의직계자녀들이소식이끊긴것도한몫을하는것이지만,인척관계와상관없이오랜시간공들여새로운자료를찾는등의노고를들이지않았으면도저히책으로엮기어려운것이었다.멀리일본과미국에까지연락을하고자료를찾으려는수고는그가곧문화기획자였다는것을의미하는것인지도모른다.그런점에서김영환처럼그역시문화기획자로서의피를공유하고있는것인지도모른다.이책의쓸모가음악은물론이고여러문화현장에서어떤방식으로든다채로운방식으로재발명된다면기쁠것이다.
[추천사]
아나바시스Anabasis
이순열(음악평론가)
부끄럽게도내슬픈습성가운데하나는어떤책이든대체로두어줄아니면두세장읽고는덮어버리는일이다.그런데도피아니스트김영환의회고록이처음나왔을때는단숨에읽어버리고나서나도놀랐다.이책이햇빛을보도록애쓰신분이항상존경해오던조범구박사여서반쯤은그분의노고에대한경의에서읽기시작하다어느새그속에빠져들고만것이다.
양악도입의과정에서홍난파가바이올린의선구자라는것은누구나알고있다.그러나난파보다훨씬앞서양악의씨를뿌린피아노계의선구자가김영환이라는것을아는사람은그리많지않을듯싶다.
이미닦여진길을달리는일에도어려움이있거늘,온갖장애가가로막고있는황무지에서홀홀단신처음으로길을닦는다는것은예삿일이아니다.유럽의그누구도시도하지않았던큰역사役事.알렉산더대황이마케도니아에서페르시아를거쳐아시아의오지로파고들었던대장정大長征,그것을아나바시스Anabasis라한다.좀과장해서이야기한다면김영환의그길닦기는알렉산더의아나바시스와도견줄만한대역사였다.
그리스신화를제대로알고싶다면우선헤시오도스의《신들의계보神通記,Theogony》를히포크레네의샘물처럼마시면서영감을얻어야하듯이,우리나라에양악이어떻게도입되고뿌리내리게되었는지를알기위해서는누구든모름지기이회고록을읽어보아야하리라고생각한다.
어제없이오늘이있을수없고지난날을되돌아보는거울이없고서는오늘의모습을제대로파악하기란어렵다.그런데그거울은세월의때가묻어흐려지기도하고뒤틀려버리기도한다.수많은회고록이나자서전의진실성에의문이제기되는것도그때문이다.융C.G.Jung은세상을떠나기얼마전자서전을남기고말았지만,자서전을쓰지않겠느냐는주변의권고를오랫동안물리치면서이렇게말하고는했다.“수많은자서전이있는그대로의사실을기록하는것이아니라지난날을미화하면서창작된부분이적지않다는것을우리모두잘알고있다.난들어찌그미화에의유혹과그폐해를피할수있을것인가?”
그런뜻에서자서전의표제로가장그럴싸한것은괴테의《시와진실》이아닌가싶다.진실이있는그대로서술되었다기보다는시적으로창작된부분이적지않았음을실토한표제이다.그런데김영환의회고록에는가식적으로미화되기는커녕과장이나화장기도없이있는그대로의모습이소박하고도담담하게그려져있어읽는맛이그지없이개운하다.
교회에서처음으로풍금소리를듣고색다른음악세계에홀렸던그는그마법의신세계를좀더깊이배우기위해어린시절가족몰래고향을탈출하여미지의땅동경으로떠나는모험에투신했다.유학생들사이에서도풍악쟁이라는멸시와따돌림을받기도하고이국인학생에게가해진부당한대우등갖가지장애를뚫고한국인최초로일본의명문음악학교우에노에한국인최초로입성하여그는대장정의기치를높인다.
김영환의회고록에는피아노라는낯선악기를국내에처음으로도입하려했던그의험난했던길닦기와함께,양악도입기의전설적인인물들홍난파,윤심덕,이애내,안병소,김원복,현재명,이인범등의갖가지흥미진진한에피소드가가득하다.그뿐만아니라동경유학시절춘원이광수와함께여러해같은방에서하숙생활을하면서고락을함께했다든가,박술음,신봉조,정일형등음악과는다른분야에서커다란발자취를남겼던많은인재들이연전시절그의훈도를받으면서음악부원으로활약했다는신선한양념도이책읽기의맛을더해준다.
이회고록에는그밖에도“아,그때그일이그랬던거였구나”라고우리의감회를새롭게하는이야기들이헤아릴수없다.1960년대에이르러서도외국의저명한연주자들의국내공연은극히드물었다.그렇거늘1920년대에하이페츠,크라이슬러,자크띠보,짐발리스트등쟁쟁한연주자들의국내공연이이루어졌다는것은꿈같은일일수밖에없다.그리고그꿈같은일이성취된것도모두김영환선생의음악에대한열정과희생적인노고로가능했다는것을우리는부끄럽게도잊고있었다.
2020년에베토벤의탄생200주년을맞아국내에서도전국곳곳에서그기념음악회가열렸다는것을우리는모두알고있다.그런데100년전인1920년12월에베토벤탄생150주년기념음악회가서울YMCA에서열렸다니우리는이회고록을읽으면서다시한번깊은감회에젖어들게된다.
어린시절의꿈이증발해버릴때우리의생명은그향기를잃어버린다고바슐라르는이야기한다.새로운세계의문을열려고,언땅에새로운꽃씨를뿌려싹을트게하려고파닥거렸던그생명의기적을망각하고활짝핀꽃에만넋을잃고있을수는없다.온세계는,그중에서도특히서양사람들은그들의음악에대해우리젊은연주자들의눈부신기량과성취에충격을받으면서동양인이어떻게자기네음악을이토록기막히게빚어낼수있는지놀라고는한다.그러나그모든일이어찌우연한현상이랴.
어떤꽃인들단숨에피어나는것은아니다.양악의황무지에서멸시와홀대를받으면서도씨를뿌리고가꾸어오늘날의비옥한터전을일구어오도록헌신한분의고독하고숭고한열정과집념이없었던들,세계음악문화의흐름에서외딴섬으로남아있다가별안간빛나는섬으로솟아오르게된그눈부신융기는훨씬늦추어졌을지도모른다.
이회고록은우리에게이렇게이야기하고있는듯하다.안개로흐려진기억속에서잃어버린소중한물을길어네게주리라.그샘으로나를따라온다면.
김영환과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김만석(독립연구자)
이책은《중앙일보》(1974.4.19~5.29)에〈양악백년〉이라는제목으로한국최초의피아니스트였던김영환이쓴회고를엮은것이다.김영환은기독교가가장먼저정착했던지역이었던평양에서태어나자연스럽게교회와선교사를통해서양음악을접했다.서양음악에매혹되었던김영환은초기일본유학생으로일본동경음악학교에서정규음악교육을받고졸업한뒤연희전문에서본격적인음악교육에몸을담는다.이후식민지조선에서‘근대음악’을소개하고다양한연주활동을했으며당시해외의연주가들을초청해공연을개최하기도한다.그의실질적인주요한이력은음악교육에있었지만,이를통해서후속세대생산에만주력한것은아니었고근대음악을경험할수있도록자비를들여인프라를제공하는것에도많은공을들인것으로회고되고있다.예컨대식민지조선에서청음하는게쉽지않았던그랜드피아노를연희전문등재직한학교에기증함으로써근대적사운드의깊이를경험하는데도일조했다.무엇보다그는음악후배들을적극후원하고지지했으며그들의음악적좌표를사회적으로구성하기위해분투한‘문화기획’자였다.
그는피아노독주회를열고자하는열망을생애마지막까지갖지만,이꿈은자녀들이살고있었던이국땅에서영면함으로써끝내이루지못한다.그의회고대로라면적어도식민지조선에서피아노는일종의보조적인수단으로받아들여지고있었고바이올린소리가각광을받았던터라그기회를좀처럼가질수없었다.다시말해,바이올린의소리는노래가없어도당대의정서와곧장연결될수있었다면,피아노는독립적인악기라는인식보다는노래를부르기위한보조적인수단으로인지되어있었던것으로김영환에겐회상되고있다는것이다.피아노에대한그의인식이얼마나정교했는지는또다른방식으로검토해야할문제이긴하나,피아노자체만으로당대의‘청자’들과‘교통’할수있는방식이식민지조선에그리폭넓게조성되어있다고보기는어려운것도사실이다.김영환의회고에서일본이나유럽,미국유학자들이피아노전공보다바이올린전공에더관심을기울였다는분석은두악기에대한김영환의판단을어느정도신뢰하게만들어주기도한다.
따라서식민지조선에서‘피아노’란어떤것이었는지는섬세하게연구해야할사운드테크놀로지일것이다.실제로‘귀신통’으로간주되었던피아노의한반도유입역사가‘기원’에만맞추어져,한지자체에서축제를개최했다가그기원이다를수있음이밝혀져큰소란이일기도했다.만약피아노가개체적완결성이강조되었던악기와달리다른악기나노래와더불어서만존재의의를확보하는악기로식민지조선에서이해되었다면,피아노의존재방식은다른음악가와의결속이필수적으로요청되는네트워크악기로간주되었다고할수있다.이때문에김영환은비록피아노독주회는가질수없었지만,교육과문화기획자로서자신의역량을더욱발휘했는지모른다.물론피아노는연습용으로라도쉽게구할수없는고가의악기였고집안에두기도쉽지않았던터라,전공은물론이고있다고해도단독으로만쓰이기에는아까운것이기도했다.그러니까,피아노독주가이루어지긴했지만,전체공연구성의일부이자전체음악공연의반주자자리에반복해서쓰일수밖에없었다.
그런점에서최초의피아노전공자의운명은문화기획자의포지션에서는것을피할수가없었던것인지모른다.그것이능동적이든수동적이든간에말이다.홍난파와함께만들었던〈경성악우회〉(1919)에서부터이른바총독부학무국의주도로만들어진〈조선문예회〉(1937)와〈경성음악협회〉(1938)에이르기까지서양음악의보급에서구성된다양한모임은물론이고총독부의요구에따른관변단체구성에서도김영환이놓여있는것도이때문이다.조선에서생성되는근대적사운드에는좋든싫든김영환이기입될수밖에없었고,‘최초’라는수식의자리에선이를벗어날도리가없었다.길을만들면서나아가야했던그가감당해야하는건,한둘이아니었고심지어‘시대’의격랑으로부터의탁할곳도없었다는의미이다.이부분에대한자세한회고가나오지는않지만,김영환에게식민지시대를건너가는일은그혼자만의일일수는없었다는것은짐작하고남음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