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

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

$22.69
Description
한 줄기 덩굴로
연오랑과 세오녀의 진실은? 삼한을 정복했다는 일본 황후 진구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산강 유역에 있는 고대 일본식 무덤은 누구의 것일까? 일제강점기 일본에 왕인을 칭송하는 비석이 세워진 이유는? 한일간의 끊임없는 역사논쟁을 돌아본『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

이 책은 임나일본부, 식민지 근대화, 독도 문제와 같은 한일 간의 논쟁을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통해 찾아본다. 저자 자신이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눈으로 보고 학자들의 의견과 주민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까지 귀기울여 한일관계의 진실을 정리한다.

《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는 영산강 유역부터 일본의 교토와 도쿄에 이르기까지 고대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유적들을 실제로 답사했다. 답사의 행적을 보여주는 풍부한 사진과 지도를 통해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을 비판한다.

저자

홍성화

지은이:홍성화
1965년서울에서태어나배재고,연세대를졸업하고고려대사학과에서고대한일관계사로문학박사학위를받았다.고려대역사연구소및일본연구센터연구교수,MBC특집다큐"페이퍼로드"자문위원을거쳐현재건국대학교교양교육원역사학교수로재직하면서충청북도문화재전문위원,충주박물관운영위원,(재)중원문화체육진흥재단이사로활동하고있다.고대사에관한한국과일본역사학계양쪽의분석틀을비판하고새로운고대사상(像)을제시하고자관련연구활동을꾸준히해오고있다.특히한국과일본에서하사인가헌상인가의논쟁이있었던칠지도(七支刀)와관련해서는적외선사진에나타난새로운글자를통해독창적인해석과분석을도출하여고대한일관계사상이전면적으로수정되어야할필요성이있음을역설하기도했다.역사가몇몇학자들만의전유물이아닌대중과호흡하는학문이되어야한다고생각하고,앞으로동아시아의역사와문화교류에작은몫이라도기여하는연구자겸실천가가되기를희망하면서,틈나는대로우리땅을비롯해동아시아곳곳을톺아보며열심히자료를수집하고있다.그동안『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동아시아속의한일관계사상(上)』(공저),"이소노카미(石上)신궁칠지도에대한일고찰","4~6세기백제와왜의관계"외다수의논저가있다.  

목차

책머리에-장차전원이황폐해지려는데어찌돌아가지않겠는가7

1장영산강유역에서
아!영산포13/수수께끼무덤떼16/토기의비밀19/무덤양식의결정판인복암리고분28/전방후원35

2장한반도에서바다를건너
강변마을의고인돌47/고인돌을찾아서54/전남동부의고인돌60/고인돌의흐름은어디까지64

3장천손강림신화
다카치호노미네73/사이토바루고분군79/잃어버린백제의유민,난고촌84/또다른다카치호88/천손강림의장소94/세토내해를건너100

4장진구(神功)의삼한정벌
나라의추억109/삼한정벌론의실체117/남해안에진출한백제125/일본사서의윤색130/칠지도의비밀135

5장신라왕자아메노히보코
진구의내력147/아메노히보코의이동경로155/가야왕자쓰누가아라시토162/연오랑과세오녀173

6장왕인유적지의허와실
왕인에대한상념181/왕인의무덤이라전해지는곳193/친일파가세운박사왕인비205

7장도래인을찾아서
민중의소망,미륵불211/금동반가사유상추적219/교토의단상230/인간존재의정화237/하타씨족의내력244/도래인의추억250/울진에가면256

8장백제의온전한복원을바라며
무령왕릉267/사마왕의탄생280/곤지의계보291/청동거울의비밀300

9장게이타이천황
어느쪽이천황의무덤인가313/수수께끼의인물,게이타이천황320/일본고대최대의전쟁이와이의난324/진구에대한상념331

10장야마타이국을찾아서
마키무쿠고분군의수수께끼335/야마타이국논쟁339/야마타이국은규슈에있었는가349/야마타이국과요시노가리353

11장무덤을찾아서
거대한고분363/기비지역의세력370/푸른동해의진실―네귀퉁이가돌출된무덤379/이즈모의독특한문화389/서쪽과다른동일본의세계398/방형주구묘403

12장고대분절국가
남쪽끄트머리에서413/숨겨져있던백제왕국420/만가촌에서435

13장임나이야기
임나453/아라가야458/광개토왕릉비문신묘년조464/임나일본부468

14장조상의무덤이있는곳에어찌다시갈수있겠는가
백제의항전485/주류성은어디에494/한국과일본의징검다리504/백제구원의길을찾아서515

답사를마치며―사실과이성을바탕으로열린민족주의를524
참고문헌530

출판사 서평

개요
임나일본부,식민지근대화,독도문제등등,한일간의역사논쟁은고대사에서현대사에이르기까지끊이지않고제기된다.두나라의역사학자들이연구와논쟁을통해왜곡된해석을바로잡은경우에도,그내용은널리알려지지않고정치적인목적으로무시되기도한다.『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는역사책의행간에서질문을찾고,영산강유역부터일본의교토와도쿄에이르기까지고대한일관계를이해하는데실마리가될유적들을실제로답사하며,흩어져있는실마리들을모아서꿰어보는방법으로역사의진실을엿보고자했다.답사의행적을보여주는사진과지도가풍부하다.


영산강에서교토까지,역사의질문을찾는여행
1917년12월,조선총독부박물관고적조사위원인야쓰이세이이치(谷井濟一)가영산강유역,나주반남면의옛무덤들을발굴조사했다.그는이일대의고분31기에번호를붙이고,짤막한보고문10여줄을남겼다.“그매장법과관련유물로보건대아마왜인(倭人)의것으로추측한다”면서.1935년5월에는조선총독부박물관의사가준이치(澤俊一)와아리미쓰교이치(有光敎一)가반남면신촌리,덕산리등의독무덤5기를추가로발굴조사했다.이때아리미쓰교이치는덕산리2호분과신촌리6호분이일본의고분양식인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닮았다고했다.그러나이들고분2개는긴사각형이기는하지만앞에네모지고뒤는둥글며주위에도랑을두른전방후원분으로보기는어렵다.
그런데1984년해남방산리에서정말로전방후원형으로생긴무덤(방산리장고분)이발견되었다.이후영광의월계고분,함평의장고분,마산리표산고분,신덕고분,담양고성리월성산고분,성월리고분,해남의말무덤고분,영암의자라봉고분,전북고창의칠암리고분,광주명화동고분과월계동고분(2기)까지,열세개에이르는전방후원형무덤이영산강유역과그남쪽일대에서나타났다.처음에일본역사학계에서는이것을고대에일본이한반도에진출했다는증거로삼았고,한국의역사학계에서는전방후원형고분이한반도에있다는사실자체를인정하려들지않았다.한반도의전방후원형고분이일본전방후원분의원형이라는주장도나왔으나,유감스럽게도지금까지한반도에서발견된전방후원형고분의조성연대(5세기말~6세기중엽)는일본전방후원분(3~6세기)보다늦다.이들무덤의주인은과연누구일까?이들무덤은오늘날우리에게무엇을알려주는것일까?
임나일본부,식민지근대화,독도문제등등,한일간의역사논쟁은고대사에서현대사에이르기까지끊이지않고제기된다.고대사에대한두나라일반시민의의식차이가이렇게큰것은,과거역사책들거의모두국가가주도해편찬했기때문일것이다.그러나『삼국사기』나『일본서기』를보면고구려든백제든신라든,또왜든,서로의존재를빼고나면이야기가되지않는다.그만큼고대한일관계를짚고넘어가지않으면한국고대사나일본고대사자체가성립하지않는데도,흔히들한국인들은단순히일본에선진문화를전해주었다고만생각하고,일본쪽에서는반대로자기네가한반도를지배했다고생각한다.
고대사람들이문자로,유물로,유적으로남긴흔적은오늘날우리에게는수수께끼이고질문이다.지나간역사에서진실을건져내려면,문자기록을곧이곧대로받아들이지말고,유물하나에좌지우지되지말고,기록의행간에서물음표를찾아내며유적과유물의맥락을읽어야한다.옛사람들이남긴실제증거인유적과유물을바탕으로문자기록의틈새에서질문을찾고,그질문의해답을찾는과정이바로역사를배우는일이다.
『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는역사의현장을직접찾아가서눈으로보고,역사책과학자들의의견뿐아니라주민들의입에서입으로전해지는옛이야기에도귀를기울여고대한일관계의진실을엿보고자했다.한국과일본곳곳에남아있는두나라고대사의흔적을다니며먼저역사의질문을찾는여행을하면서지은이는비로소스스로의모순된역사의식을마주했고,사실과이성을바탕으로일본인들의역사왜곡을비판할수있었다.

이키섬의가쓰모토(勝本)라는곳에가면과거조선의통신사들이머물렀다는아미타당(阿?陀堂)옆에진구를제신으로하는쇼모(聖母)궁이라는신사가있다.가쓰모토라는곳은진구가삼한을정벌한뒤돌아와서승리를기념하기위해지명을승본(勝本)으로고쳤다는곳이다.그런데신사안내판에는진구가삼한정벌때적군의목10만여개나가져와바닷가에묻었다고씌어있을뿐만아니라,그녀가타던신마(神馬)의발자국이라는돌이그럴듯하게포장되어있다.이렇게무시무시한이야기가전승된이유가무엇일까?
진구의말굽석곁에또다른비석이있었는데,그것은‘文永之役元軍上陸地’라는비석이다.고려말여몽연합군이이키섬을공략할때상륙했다는곳이다.『신원사(新元史)』에는당시참담하게패배한이키섬의상황이실려있다.이전쟁으로쓰시마와이키사람들이수없이죽었고,살아남은사람은화살을쏘지못하도록손에구멍을뚫어쇠사슬로배에묶어두었다고한다.
지금까지도북부규슈에남아있는진구에대한전설은여몽연합군의공격,백촌강전투의패배,쓰시마정벌등으로인한반작용이설화의형태로이어진것이다.우리나라와궂은일이많았던탓에열등감을극복하기위한통로로진구증후군이급속도로퍼져나갔을것이다.허구가진실로만들어진것은어쩌면그들나름의고통을없애기위한일종의보상콤플렉스는아니었을까싶다.(중략)
이처럼후대의인식으로고대를재단하는경우가수없이많다.사람들은흔히근대와현대의인식으로고대의사실까지도자신에게유리한방향으로끌고나가려고한다.(중략)
우리의실정도마찬가지다.역시고대사해석과설정은중구난방이다.임나일본부에대한성과는일본것을그대로베끼면서근거없는마음속소망만은일본을지배하고싶다는욕망으로표출된다.이런주장이판을친다면황국사관에젖어임나일본부설과진구의삼한정벌을주장하는일본의극우주의자들과무엇이다른가?이제쇼비니즘을버리고,사실과이성을근거로열린민족주의를창출할필요가있다.한국과일본두나라의과도한갈망이역사왜곡을낳는현실을다시한번되새겨야겠다.―
<답사를마치며>
에서




일본인들이왕인을칭송한진짜이유



-연오랑과세오녀이야기의진실은무엇일까?

『삼국유사』에는동해바닷가에살던연오랑이어느날바위를타고바다를건너가,일본의왕이되었다는이야기가나온다.그아내인세오녀도바닷가에서남편을찾다가우연히올라선바위에실려일본으로가서남편을만났다고한다.연오랑세오녀이야기를제외하면한국의사료에서한반도사람이일본으로건너가터를잡고살았다는이야기를찾기는어렵다.그런데일본의사료에는신라나가야,백제에서건너간사람들이야기가심심찮게등장한다.8세기초에편찬된『고사기(古事記)』와『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신라왕자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신령한물건들을가지고일본으로왔다는이야기가실려있다.아메노히보코는남편을찾아간세오녀와반대로아내를찾아바다를건넜다.그는세토내해를거쳐지금의오사카근처에와서,북쪽으로올라가비와호(琵琶湖)동쪽을따라시계반대방향으로돈뒤이즈시(出石)지방에정착했다고한다(147쪽지도5-1참조).한반도의서해안에서일본규슈까지이어지는고인돌의흐름(97쪽‘한국과일본의고인돌분포도’참조)을보아서도알수있듯이,역사이전시대부터백제멸망이후까지한반도사람들이여러차례일본으로건너가씨족을이루고다양한계층을형성했다.(5장신라왕자아메노히보코)



-삼족오는고구려만의것일까?

고구려벽화에등장하는세발달린까마귀는동북아시아에서태양의상징으로널리공유되었다.일본의초대천황이라는진무(神武)는세발달린까마귀,야타가라스(八咫烏)의인도를받아야마토에도착해천황으로즉위한다.야타가라스는현재일본축구대표팀과일본축구협회(JFA)의상징이기도하다.(3장천손강림신화)



-삼한정벌론의실체는무엇일까?

진구(神功)는주아이(仲哀)천황의황후인데,‘처녀의눈썹같고,눈부신금과은이가득한서쪽에있는나라’,곧신라를정벌하라는신의계시를받는다.그러나주아이천황이신라정벌을꺼리자,신이그를죽여진구가섭정을하게되었다고한다.『일본서기』에따르면진구는서기201년부터269년까지나라를다스렸다.그렇다면진구는3세기초?중반에활동한인물인데,진구가정벌했다는신라왕파사매금(波沙寐錦),곧파사이사금은서기1세기무렵의인물이고,진구시대에신라왕이사신으로보냈다는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곧박제상은5세기초엽사람이다.게다가진구시대에활동했다는백제의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은4세기초?중반사람이다.진구에관한기록은서로다른시대의이야기들을짜깁기해놓은것이다.그렇다면삼한을정벌했다는진구이야기는임진왜란뒤에왜군을혼내주었다는사명대사이야기처럼,상처난자존심을회복하고왕조의위세를세우려고만들어낸‘설화’가아닐까?(4장진구의삼한정벌)



-일제강점기일본에왕인을칭송하는비석이세워진까닭은무엇일까?

왕인은일본에한자와유학을전해주었다는백제사람이다.전남영암구림리는얼마전부터왕인의탄생지로알려져왕인박사유적지가조성되고,1997년부터해마다영암왕인문화축제까지열리고있다.왕인은『삼국사기』와『삼국유사』등우리역사책에는전혀나오지않고,일본사서에만나오는인물이다.그리고영암이왕인의탄생지라는것도20세기초반공주의유학자인이병연이편찬한『조선환여승람』에처음나오는이야기인데,그이야기의근거는밝혀져있지않다.이밖에1932년나주영산포의본원사(本願寺)주지인일본인승려아오키(靑木惠昇)가영암구림리에왕인박사의동상건립을추진하는글을썼다.이두문서외에는국내외문헌어디에도왕인의출생지에대한기록이없다.일본에는왕인의무덤이라전해지는곳이몇군데있다.오사카부히라카타시의왕인묘로전해지는곳은1938년오사카부사적13호로지정되었고,전후에는여기서해마다11월3일에왕인제를연다.그리고1940년과1941년도쿄우에노공원에왕인을기리는‘박사왕인비’가세워졌다.이비는창경궁에서하사한은자(恩資)와일본의집권자고노에(近衛)수상을비롯한황족,고관,문학자,승려,정치가등각계명사230여명의협찬으로세워졌는데,이들중에는친일파로지탄을받은한국인이13명끼어있었다.일본의제국주의가거세어질무렵에왕인을기념하는운동이집중해서벌어졌다.이는일본이조선인까지전쟁에총동원하려고내선일체를주장하면서,과거조선과일본의밀접했던관계를새삼내세우고자왕인을추앙했던것이아닐까?(6장왕인유적지의허와실)



-영산강유역에있는고대일본식무덤은누구의것일까?

앞이네모지고뒤가둥글며도랑,곧주구(周溝)에둘러싸인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일본의전형적인고분이다.그런데서남해안지방에서전방후원형고분이현재까지열세군데나발견되었다(40쪽‘한반도의전방후원형고분’지도참조).이들무덤의정체에대해서는일본이파견한왜인의무덤이라는설,백제의힘이미치기전토착세력의무덤이라는설,백제때문에구심점이사라진후이지역에서성장한중소규모세력의수장이묻힌곳이라는설,백제가파견한왜인관료의무덤이라는설,일본에서망명한마한계왜인의무덤이라는설등다양하다.그런데일본에서전방후원분은3세기에나타나6세기후반들어점차만들어지지않게되었다.영산강유역의전방후원형고분은대개5세기후반부터6세기초?중반에만들어졌고,다른무덤들이같은지역에여럿모여있는것과는달리한지역에한두기정도만있다.이는전방후원형고분이오랜세월만들어진것이아니라,각지역에서한두세대만들어지다가곧사라졌음을뜻한다.곧일시적인‘유행’이었다는말이다.백제무령왕릉도중국남조계통의벽돌무덤이어서,무령왕의능임을증언하는지석이발견되지않았다면중국인의무덤으로알려졌을것이다.무령왕릉은백제가중국남조의문물을개방적으로받아들였다는증거로인정된다.과거에중국의여러왕조와백제,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