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아직이응노를한번도제대로마주본적이없다!
고암이응노는전통서화가로출발했으나일본에서새로운미술경향을접했고,해방후에는홍익대교수직을박차고다시유럽으로향했다.유럽현대미술계에일찍이정착해그들에게동양미술을가르친한편,말년에는인류의평화를주제로한대작들을선보였으나끝내고국에돌아오지못한채세상을떠났다.동시대한국인예술가로서가장먼데까지갔지만,여전히그의업적에대한국내의평가는제한되어있다.그가운데에는동백림사건으로응축된냉전의역사도가로놓여있다.이응노의예술세계또한“근대화를서구화와등치시켰던통설이담론의거의전부라할수있었던시대”라이름할수있었던근현대교체기를거치는동
안“형식주의비평”이라는이름으로작가의삶이나생각과는유리된채대상화되어다루어져왔다.한마디로“본받을전범은오직서구를따라잡아야한다는것이었을뿐”이었던,그렇게가장서구를잘따라잡은동양미술을실현한작가의틀에이응노를끼워맞춰온시도들에대하여이연구는처음으로저항하며벗어난다.“화언록(畵言錄)”이라는명제아래무엇보다이응노자신이직접한말과쓴글을출발점으로삼아동시대에생산된자료들을최대한모으고,면밀히읽고자했다.이연구는이응노작업을가장오래지켜보아온예술적동반자인박인경선생의소망에서출발했다.이응노의세계를서양인들이보는동양의틀이아니라진정한국적이고전통적인미학을바탕으로한성취로규명하기위한기초를마련하기를바라는박인경여사의제안에이응노의고향인홍성이답하면서연구가시작된것이다.
『이응노,말』:국내에최초로소개되는이응노의말들
수류산방에서는“화언록”연구를두권의책으로나누어엮었다.1권『이응노,말[李應魯,語]』은고암이응노의화론을가려뽑은아카이브이다.그리많지않은40여편의이응노자신의말과글을모으면서,동시대국내외비평가들의그에대한화답이나반응을짚어볼수있는160여편의글을함께수록했다.이를합쳐서박응주는‘화언(畵言)’이라는새로운이름으로명명한다.그중다수는이응노에대한호평뿐만아니라당대의미적지근한비판도아우른다.전형적인화론이나평론이아닐지라도그림에대한어록이라는뜻에서제목은『이응노,말[李應魯,語]』,부제는“고암이응노화언록(顧菴李應魯畵言錄)”이라고붙였다.『이응노,말[李應魯,語]』은국내에최초로발굴소개되는자료다수를포함한다.요약하면『이응노,말[李應魯,語]』은이응노에대한새로운시각의연구를위해,다른어떤이론이아니라지금이라도비로소이응노의삶과말로돌아가처음을들여다보는데서부터다시출발하자는제안이며,이러한시각과방법론이이응노뿐만아니라서구화와근대화가겹쳐있었던우리근대사의모든예술가,모든인물들에게확장될수있으리라는연구방법론의시도이다.총203편의‘화언’들을800쪽에가까운방대한분량에모은『이응노,말[李應魯,語]』은수류산방의편집과정제되고도다채로운디자인을만나생생한매력으로이응노의시대를오늘로불러온다.
『이응노,뜻』:그때이응노의뜻,지금이응노를읽는뜻
I『이응노,말[李應魯,語]』이아카이브자료집이라면,II『이응노,뜻[李應魯,論]』은이응노화론서설이라고할수있다.『이응노,말[李應魯,語]』에수록한이응노의화언을종축으로,이응노삶의궤적을횡축으로삼아이응노의예술과그작품세계를새롭게해석해보고자한시론이다.이책에서박응주는추적했던사실들을토대로“이응노를새롭게보는뜻”이라는부제처럼이응노의새로운길을보고자한다.‘전통만도혁신만도아닌’새로운길을말한다.흔히이응노의작업양식을서화로부터사생,반추랑,콜라주,문자추상으로이어진다고말하며이를자연주의로부터형식주의로진보해나가는식의발생론으로설명하곤하는데,저자에따르면이는이응노예술의전모를소홀히파악한결과라는것이다.이응노가자신의고뇌의근원이민족의울혈과일치되어있음을인식하던때부터그의서화(書畵)는교조에발목잡히는일이없었다.그의붓질은엄연한현실한복판에서길어올린격문(檄文)이었던것이다.1960,70년대의콜라주,문자추상에대해서도같은말을할수있다.살아있는현실의생명력을먹의모험에내맡기지않았던리얼리즘의태도라는점에서이응노의매시기는“다르고도같다.”조선사회의유제(遺制)를청산할것인가,새로운근대성을확립할것인가?시간의흐름을역사의교체로만알고있는둔감한역사주의자에게라면별문제가없었을이청산적(淸算的)역사의행로라는엔진에이응노는역회전명령을지시한다.이응노만년(晩年)의10년,1980년대의〈군상〉그림들은“서로손잡고같은율동으로공생공존을말하는민중그림”이자,평화의기원문이다.또한저자는동학의원리인우주적‘성(誠)’의경지에대한비원문(悲願文)으로읽으며,그내력을이책에서짚어나간다.이응노에게근대의‘근대성’은‘인간에대한관심’,‘인간의생명성’과같은보편적인가치를잃지않으면서도현대성이라는이름의진보가가능하다는확인이었다.『이응노,뜻[李應魯,論]』은책의앞부분에『이응노,말[李應魯,語]』중각별한대목약20구절을발췌해실었다.본문에는저자가국내외에서확인할수있는거의모든전작을정리하고그중에서엄선한150점이넘는도판들,깊이있는주석들을결합했다.이응노의붓질처럼속도감넘치는문장이다.보론「사람의길,사람을여는길」은저자가전시기획자로서2018년홍성이응노의집이응노생가기념관에서기획한이응노박인경2인전의서문글이다.이응노의생생한연구를위해박인경의필묵을들여다보는또하나의시론이다.박응주는자신이편집한『이응노,말[李應魯,語]』에서읽어낸이응노마음의뜻을이연구에담고자했다.『이응노,뜻[李應魯,論]』은현재단행본으로유통되는유일한이응노연구서다.한위대한예술가의작품집이자생애의가장충실한기록이다.그러나지금이응노를읽어야하는뜻은비단한작가에머물지않는다.한국근대예술의케묵은동서양논쟁들을다음단계로견인하는새로운가능성으로,이책은연구자뿐만아니라한국근대미술에관심을지닌모두를기꺼이초대한다.
가장충실한이응노의연보
『이응노,말』과『이응노,뜻』이두권의서로성격이다른연구서를관통하는것은이응노의연보이다.저자가프랑스파리의고암서방에체류하며수행한최대한의아카이빙을바탕으로작성했다.특히유럽으로간이후거주지의변모,여러장르작업반경을폭넓게추적했다.책의편집과정에서수류산방편집부에서1년가까운긴시간을기울여저자와함께확인보강작업을수행했다.수십년동안검증없이떠돌던여러정보들을최대한바로잡고주석을덧붙였다.기존의여러연보나작가프로필,고암서방에소장된프랑스의행적,이응노생가기념관이소장한유족제공자료와증언,그리고국내의모든신문기사를확인해사진및시각자료를함께편집하고여러미술사적의미를밝히는주석을보완했다.80쪽이넘는빽빽한연보는그자체로한권의책에맞먹
는분량이다.여전히많은공백이발견됨에도,출간현재시점에서가장충실하고온전하며오류를줄인이응노의연보가처음으로작성되었다는데이책의큰의의가있다.●
이응노(李應魯,1904~1989)
1904년음력1월10일(양력2월25일)충청남도홍성군홍북면중계리홍천마을에서,이근상(李根商)의5남1녀중넷째아들로출생했다.7세무렵홍성읍내보통학교에입학.2년여수학했다.어린날이응노는집안농사일을돕거나부친몰래친구들과동네의일거리를찾아생계에보태거나,또고향의용봉산,덕숭산등지를사생하며그림에특별한애착을지니게되었다.17~18세무렵인1920년초부친의소개로서화가염재송태회(念齋宋泰會1872~1941)문하에서문인화의기초를짧은기간배웠다.미술에대한자신의재능에눈뜨게된그는20세무렵에더본격적인그림공부를위해단신상경,해강김규진(海岡金奎鎭)문하에입문한다.스승김규진으로부터‘죽사(竹史)’라는초호(初號)를받기도한이응노는1924년제3회조선미술전람회》[《선전》]서·사군자부에〈청죽(晴竹)〉으로초입선한다.이후1931년제10회《선전》에서〈청죽(晴竹)〉으로특선을하기까지표구점이나간판점점원을거치고,전주에서는〈개척사(開拓社)〉라는간판점을차리는등경제적인면에서도수완을발휘했다.1931년부터1936년일본으로유학의길을떠나기전까지는매해《선전》입선을거듭했으며,일본에정착해서는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일본화과,홍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양화과에등록하고마츠바야시케이게츠(松林桂月)의뎅코화숙(天香畵塾)에입문했다.
이무렵부터한학자규원정병조(葵園鄭丙朝)로부터받은바있던‘고암(顧菴)’이라는호를사용한다.1938년부터《선전》에〈동도하안(東都河岸)〉〈동원춘사(東園春事)〉를출품해입선하며,이듬해에는《제1회일본화원전(日本畵院展)》에〈설산(雪山)〉으로입선하는등1944년까지《선전》과《일본화원전》두전시에나란히입선하는개가를올린다.그사이1939년[《고암이응노화백신남화전》(화신백화점화랑)]과1941년[《고암이응노화백제2회남화신작전》(화신백화점화랑)]에개인전을잇달아열었으며전쟁말기에고국으로완전히귀국했다.1945년8월해방된조국에서이응노는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산하‘조선미술건설본부’회원,‘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결성,《해방기념미술전람회》개최등의조직과행사에적극적으로참여하는등정열적인활동을하였다.
일제로부터의해방은이응노의미학을결정적으로주체적이고민족적이며현실주의적인미학으로정립시킨계기가되었다.1958년《도불전(渡佛展)》에서보여준작품들은“소박하며깨끗하고고상하면서도세련된율동과기백”을한국의민족성으로보았던자신의지론의바로그그림이었다.1958년,55세의이응노는프랑스를향해,예술가의목숨같은‘새로움’을향해거침없이나아간다.그첫개가가한지로빚은콜라주다.그것이“꽉차있음이곧비어있음일수있는,동양성의크고도관대한리듬을따르는강력한작품”,“태양같은위대한리듬과경이로움과찬란함이뒤얽힌거대한하나의미궁(迷宮)을창조했다”고평가한현지의찬사들이시사하는1960년대이응노콜라주의성취였다.1970년대에는‘문자추상’·‘서예적추상’으로진입하는데,이는이응노자신의말로“동양의한문자자체가지니고있는그자원(字源)은자연사물의형태를빌렸거나음과뜻을형태로표현한것이니한자자체가동양의추상화적바탕이되어있는것”이라는뛰어난지혜로부터흘러나온결과였다.이것은1964년부터‘파리동양미술학교’를프랑스당대의지성인들의후원을얻어개설했다.여기서약3,000여명의문하생을길러내고유럽에동양정신을‘가르쳤던’용기와자신감의바탕과도조응한다.1980년대에는‘동적인간’,군중들을그린다.그의말로“서로손잡고같은율동으로공생공존을말하는민중그림”이다.그것은‘공생공존’의평화의희구요,하늘(天)을꽉채운작고도작은사람들의은하수일수있다는점에서천지인(天地人)의바탕,즉자연(自然)이요자연의이법(理法)의도해인동양정신의생생한변주였다.
이응노의한생애는예컨대‘어떻게동양성을잃지않으면서근대성을성취할수있을것인가’라는불가능해보이는목표를향해나아갔던삶이었다.그는1989년파리의시립페르라세즈(P?re-Lachaise)묘지에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