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신유물론은 페미니즘이 없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통 철학에서 ‘열등하고 하찮은 것’이라고 규정되던 것들에 관한 관심은 여성의/여성에 대한 관심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을 함께 다룬 이론서가 없기에 우선은 페미니즘과 신유물론을 접속시켜 개괄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김남이는 신유물론이 어떻게 학문적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진화해왔는지를 여러 연구자들의 주장들을 (거의) 시간순으로 추적한다. 그리고 신유물론이 기존의 지배적인 페미니즘 혹은 젠더 이론과 다른 점을 지적하며, 특히 로지 브라이도티가 왜 ‘젠더’가 아닌 ‘성차’를 역설하는 지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다. 이현재의 글은 저자의 오랜 질문인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을 어떻게 설명해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다. 그녀는 ‘생물학적 여성’ 혹은 ‘몸’과 ‘성차’라는 개념들이 페미니즘에서 환원적으로 쓰여온 것을 경계하며, 그 원인을 생명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오인에서 비롯한다고 진단한다. 특히 그녀는 엘리자베스 그로스의 대표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저작 『몸 페미니즘을 향해Volatile Bodies』에서 강조된 성차화된 몸 논의를 빌려와서 ‘문지방’으로서의 신체, 내부와 외부의 접점으로서의 성차와 몸을 페미니즘이 재사유해야 함을 역설한다.
무엇보다도 신유물론은 페미니즘 이론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물론 이런 무관심은 여타 인문사회과학들처럼 페미니즘도 ‘인간’의 ‘사회, 제도, 법, 정치, 권력, 경제’에 긴급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은 과학기술의 성과와 통찰들을 통해 과학과 페미니즘이 처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임소연은 과학기술학이 페미니즘과 만날 때 어떤 물질, 사물, 타자, 대상, 그리고 자아가 새로이 드러나고 생성될 수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특히 저자의 성형수술에 대한 일종의 ‘경험적 기술’은,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을 놀랍게도 다른 관점에서 유물론적으로 성취하면서, 페미니즘이 성형수술에 대해 가지는 통념을 비튼다. 이지선은 버라드의 물리학이 어떻게 정치, 문화와 만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녀는 최근 많은 관심을 받았던 캐런 버라드의 행위적 실재주의를 충실히 설명하고, 이 이론을 통해 영화 〈오펜하이머〉와 〈바비〉가 보여준 존재-인식의 얽힘, 물질의 ‘물의빚기’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신유물론이 자연과 몸에 보여온 관심과 열정은 페미니즘의 딜레마를 달리 보여줄 수 있을까? 여성이 몸과 맺어온 양가적 상황, 즉 사회적 평등을 위해 몸을 지워야하면서도 그 몸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끈질기게 다뤄야 하는 모순에 대해 신유물론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박신현은 페미니즘 안팎으로 전개되어온 여성의 몸과 재생산을 둘러싼 딜레마를 ‘자기-향유(self-enjoyment)’와 ‘관심(concern)’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는 스티븐 샤비로의 논의를 빌려 돌파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향유’보다 ‘관심’이 우월하고, 그래서 존재보다 윤리가 우월하다면, 레비나스를 비판하는 샤비로에게는 그 둘이 분리될 수 없다. 레비나스에게 재생산은 ‘형이상학적 초월적 타자(아이)’를 위한 물질적 과정일 따름이지만 (그러면서 레비나스는 재생산에서 여성을 지우고 자연과 같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 정도로 축소한다), 이리가레와 지아렉에게 재생산은 여성의 창조성, 쾌락과 자기-향유를 위한 공간이다. 저자는 이런 논의를 통해 현재 멈춰있는 임신중지와 관련한 사회적/법적 논의를 여성의 자기-창조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심귀연은 신유물론이 구성주의적인 버틀러의 몸과 물질 논의를 비판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버틀러의 몸 개념은 신유물론의 비판과 달리 훨씬 신유물론에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메를로 퐁티의 몸현상학을 경유한다. 메를로 퐁티의 몸의 행위성은 단순히 의식적 주체의 능동적 행위와는 거리가 먼, 성적 끌림과 감각 및 지각, 그리고 신체의 물질로 구성되는 몸이다. 버틀러에게서든 메를로 퐁티에게서든 몸과 물질은 단순히 담론/의식의 기입의 효과가 아니라 능동/수동의 구분 불가능성, 물질화와 언어화의 동시성과 비경계의 지대인 것이다.
신유물론을 단순히 물질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천적이며 전방위적인 사태를 분석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결론부를 장식한다. 박이은실은 한국의 한 여성/청소년/학생/노동자였던 어떤 ‘소녀’의 짧은 삶을 추적함으로써, 그녀의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작동한 일련의 사회-생태를 분석한다. 그녀는 전 세계적 ‘녹색혁명’, 한국의 산업화, 농어촌과 생태파괴, 화학적 물질인 농약, 그리고 자본주의까지를 한꺼번에 분석의 테이블에 올리고 신유물론이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의 정치학을 시도한다. 김지은은 신유물론에서 주로 집중하는 ‘생명’에 관한 논의에서 생명의 순환으로서의 ‘죽음’의 계기를 발견한 발 플럼우드를 조명하며, 개체적 차원의 삶 속의 죽음이 다른 차원의 생명과 접속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신유물론은 (일부 심층생태주의에서 보이듯) 자연을 신비화하지 않으면서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고자 하며 사회를 과학주의적으로 개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통찰들을 빌어 페미니즘을 비롯한 정치적 교착을 돌파하려고 한다. 자연은 분노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의 무관심과 비일관성을 다룰 수 없을 뿐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의 ‘질문’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 아래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물질은 생명도 죽음도 아닌 존재 일반의 핵심이다. 그와 동시에 이런 자연/과학/물질에 대한 재사유가 혼미한 숫자놀음과 착취적인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내 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각자의 학문적 여정에서 해결되지 않는 물음들을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을 통해 답하려고 했다. 미리 밝히자면 저자마다 신유물론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다르고, 번역도 일관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심지어 ‘신유물론’이라는 이론의 이름과 그 경계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다. 예를 들어 어떤 저자는 new materialism에 대해 기존의 유물론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물질주의’라고 번역할 것을 선호하지만 또 어떤 저자는 ‘신유물론’이라는 기존 번역어로 고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저자는 캐런 버라드(Karen Barad)의 이론인 agential realism을 행위 실재론, 수행적 신유물론 등으로 부르지만 또 다른 저자는 행위적 실재주의라고 번역한다. 더 심각하게는(?) 어떤 저자는 신유물론을 그것의 개방성과 창조성으로 긍정하지만, 또 어떤 저자는 신유물론에 대한 기대와 함께 우려를 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관성을 위해 개념어와 관점 등을 모두 통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비일관성은 이 책이 저자들의 손을 떠나 여기저기 방랑한 후 여러 마주침들과 내부-작용(intra- action)을 통해 고정되거나 또 달리 변할 것이고, 저자들은 그 모든 것을 환영할 것이다. 부디 이 둘의 얽힘과 공명이 또 다른 얽힘과 공명을 만들어내며 파동으로 서서히 모두에게 가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신유물론은 페미니즘 이론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물론 이런 무관심은 여타 인문사회과학들처럼 페미니즘도 ‘인간’의 ‘사회, 제도, 법, 정치, 권력, 경제’에 긴급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은 과학기술의 성과와 통찰들을 통해 과학과 페미니즘이 처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임소연은 과학기술학이 페미니즘과 만날 때 어떤 물질, 사물, 타자, 대상, 그리고 자아가 새로이 드러나고 생성될 수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특히 저자의 성형수술에 대한 일종의 ‘경험적 기술’은,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을 놀랍게도 다른 관점에서 유물론적으로 성취하면서, 페미니즘이 성형수술에 대해 가지는 통념을 비튼다. 이지선은 버라드의 물리학이 어떻게 정치, 문화와 만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녀는 최근 많은 관심을 받았던 캐런 버라드의 행위적 실재주의를 충실히 설명하고, 이 이론을 통해 영화 〈오펜하이머〉와 〈바비〉가 보여준 존재-인식의 얽힘, 물질의 ‘물의빚기’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신유물론이 자연과 몸에 보여온 관심과 열정은 페미니즘의 딜레마를 달리 보여줄 수 있을까? 여성이 몸과 맺어온 양가적 상황, 즉 사회적 평등을 위해 몸을 지워야하면서도 그 몸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끈질기게 다뤄야 하는 모순에 대해 신유물론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박신현은 페미니즘 안팎으로 전개되어온 여성의 몸과 재생산을 둘러싼 딜레마를 ‘자기-향유(self-enjoyment)’와 ‘관심(concern)’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는 스티븐 샤비로의 논의를 빌려 돌파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향유’보다 ‘관심’이 우월하고, 그래서 존재보다 윤리가 우월하다면, 레비나스를 비판하는 샤비로에게는 그 둘이 분리될 수 없다. 레비나스에게 재생산은 ‘형이상학적 초월적 타자(아이)’를 위한 물질적 과정일 따름이지만 (그러면서 레비나스는 재생산에서 여성을 지우고 자연과 같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 정도로 축소한다), 이리가레와 지아렉에게 재생산은 여성의 창조성, 쾌락과 자기-향유를 위한 공간이다. 저자는 이런 논의를 통해 현재 멈춰있는 임신중지와 관련한 사회적/법적 논의를 여성의 자기-창조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심귀연은 신유물론이 구성주의적인 버틀러의 몸과 물질 논의를 비판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버틀러의 몸 개념은 신유물론의 비판과 달리 훨씬 신유물론에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메를로 퐁티의 몸현상학을 경유한다. 메를로 퐁티의 몸의 행위성은 단순히 의식적 주체의 능동적 행위와는 거리가 먼, 성적 끌림과 감각 및 지각, 그리고 신체의 물질로 구성되는 몸이다. 버틀러에게서든 메를로 퐁티에게서든 몸과 물질은 단순히 담론/의식의 기입의 효과가 아니라 능동/수동의 구분 불가능성, 물질화와 언어화의 동시성과 비경계의 지대인 것이다.
신유물론을 단순히 물질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천적이며 전방위적인 사태를 분석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결론부를 장식한다. 박이은실은 한국의 한 여성/청소년/학생/노동자였던 어떤 ‘소녀’의 짧은 삶을 추적함으로써, 그녀의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작동한 일련의 사회-생태를 분석한다. 그녀는 전 세계적 ‘녹색혁명’, 한국의 산업화, 농어촌과 생태파괴, 화학적 물질인 농약, 그리고 자본주의까지를 한꺼번에 분석의 테이블에 올리고 신유물론이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의 정치학을 시도한다. 김지은은 신유물론에서 주로 집중하는 ‘생명’에 관한 논의에서 생명의 순환으로서의 ‘죽음’의 계기를 발견한 발 플럼우드를 조명하며, 개체적 차원의 삶 속의 죽음이 다른 차원의 생명과 접속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신유물론은 (일부 심층생태주의에서 보이듯) 자연을 신비화하지 않으면서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고자 하며 사회를 과학주의적으로 개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통찰들을 빌어 페미니즘을 비롯한 정치적 교착을 돌파하려고 한다. 자연은 분노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의 무관심과 비일관성을 다룰 수 없을 뿐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의 ‘질문’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 아래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물질은 생명도 죽음도 아닌 존재 일반의 핵심이다. 그와 동시에 이런 자연/과학/물질에 대한 재사유가 혼미한 숫자놀음과 착취적인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내 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각자의 학문적 여정에서 해결되지 않는 물음들을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을 통해 답하려고 했다. 미리 밝히자면 저자마다 신유물론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다르고, 번역도 일관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심지어 ‘신유물론’이라는 이론의 이름과 그 경계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다. 예를 들어 어떤 저자는 new materialism에 대해 기존의 유물론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물질주의’라고 번역할 것을 선호하지만 또 어떤 저자는 ‘신유물론’이라는 기존 번역어로 고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저자는 캐런 버라드(Karen Barad)의 이론인 agential realism을 행위 실재론, 수행적 신유물론 등으로 부르지만 또 다른 저자는 행위적 실재주의라고 번역한다. 더 심각하게는(?) 어떤 저자는 신유물론을 그것의 개방성과 창조성으로 긍정하지만, 또 어떤 저자는 신유물론에 대한 기대와 함께 우려를 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관성을 위해 개념어와 관점 등을 모두 통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비일관성은 이 책이 저자들의 손을 떠나 여기저기 방랑한 후 여러 마주침들과 내부-작용(intra- action)을 통해 고정되거나 또 달리 변할 것이고, 저자들은 그 모든 것을 환영할 것이다. 부디 이 둘의 얽힘과 공명이 또 다른 얽힘과 공명을 만들어내며 파동으로 서서히 모두에게 가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신유물론×페미니즘 : 몸 물질 생명 - 여이연이론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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