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여자를 만났다 (최옥정 창작집)

늙은 여자를 만났다 (최옥정 창작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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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최옥정 작가의 이번 소설집을 일관하는 사유의 지평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근거 없음 혹은 의미 없음에 대한 수용적 믿음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라면, 그가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허공을 걷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최옥정의 소설에서 인간은 온전한 삶의 의미나 목적 없이 생존을 이어간다. 최옥정 작가는 이 허방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든다(이경재 문학평론가, 숭실대 국문과 교수).
저자

최옥정

저자 최옥정은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와 연세대 국제대학원을 졸업했다.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 오랜 투병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의지의 작가!
■ 한문공부, 영어 실력으로 다져진 넓은 시선과 삶에 대한 인문학적 시선으로 독특한 인생관을 펼쳐내는 작가!
■ 최근 조선시대의 여성 시인 이매창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 『매창』으로 특히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매창』 포토에세이집 『On the road』, 에세이집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수업』,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 등이 있다. 번역서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목차

늙은 여자를 만났다
분명한 이웃
라일라
일요일의 달팽이
소년은 죽지 않는다
헬로
감쪽같은 저녁
당신의 손은 당신의 입보다 가깝고

해설ㅣ늙은 여자가 되기의 아름다움ㅣ이경재
작가의 말

출판사 서평

[이번 창작집에 대한 평가들]

최옥정 작가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경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운다. 삶과 문학이 어떻게 아름답게 맞물릴 수 있는지, 소설이 삶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삶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최 작가의 이번 창작집 『늙은 여자를 만났다』는 무서운 병을 이겨내 온 싸움의 기록이다. 그 거친 터에서 피워 올린 예술혼의 증명이다.
ㅡ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이번 창작집에 실린 작품들의 남다른 시선]
하나. 유니크한 문체와 장치
「일요일의 달팽이」
ㅡ자전거를 향해 말을 거는 여자

「감쪽같은 저녁」
ㅡ자석 도마뱀이 사라질 수 있을까?

「당신의 손은 당신의 입보다 가깝고」
ㅡ손 때문에 이별을 통보받는 남자

둘. 삶에 대한 탐구
「늙은 여자를 만났다」
ㅡ“화분의 흙을 손가락으로 파고 뼈를 안에 묻었다. 흙에 제 살을 문질러 싹을 틔우고 있을 씨앗이 다치지 않게 흙을 살살 덮었다. 뼈에서는 싹이 날 리 없지만 주목 뿌리가 뼛조각을 친친 감고 멀리 뻗어나갈 것이다.”

「분명한 이웃」
ㅡ“나보다 육백 살도 더 먹은 여인이 거기서 오래도록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요일의 달팽이」
ㅡ“나는 달려야 해. 살아야 하니까. 이젠 넘어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 네 덕분에 다리도 굵어지고 팔뚝도 튼튼해졌거든.”

「감쪽같은 저녁」
ㅡ“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든 내 인생에 속지 말자고 다짐한다. 좋은 것, 나쁜 것을 따로 정하지 말자. 그래야 인생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다 일어난다. 놀랄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항상 놀라게 되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충격이지만 나도 느리게 죽어가고 있다는 걸로 비기면 된다. 실연도 실직도 그 순간만 엄청나다. 중요한 게 하나 빠져나간 내 인생에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다가 곧 적응한다. 나빠진 것도 좋아진 것도 아니다. 이 한 잔의 와인은 그렇게 새로 시작되는 내 인생에 대한 축배다. 도마뱀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도마뱀이 나를 찾아올 차례다.”

[죽음과 싸우다!]
하나.
「늙은 여자를 만났다」
ㅡ아버지의 유골 조각을 들고 그녀는 왜 먼 곳으로 떠났나?
ㅡ이 소설집에는 삶을 감싸고도는 죽음에 대한 사유가 있다.

둘.
「분명한 이웃」
ㅡ“나는 절망 앞에서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살아남는 일밖에 없을 때 악착같아지는 사람이었다.”
ㅡ이 문장은 마치 작가 자신을 향한 말 같다.

셋.
「감쪽같은 저녁」
ㅡ“이대로 모든 것이 완벽하여 너무 좋구나.”
ㅡ인생의 밑바닥에 처한 남자의 심리를 그린 이 소설에 담겨 있는 작가의 자기 위안과 평화!

4. 이 작가 최옥정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한 것은 니체였다.

“이 사람을 좀 보시지요.”라고 말한 것은 이상이었다.

최옥정 작가는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여성 작가의 의지와 투혼!

■ 늙은 여자 되기의 아름다움!
1. 일상의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무늬
최옥정은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소설집 『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을 출간했고,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매창』을 발표했다. 최옥정의 작품 세계는 무엇보다도 인물의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매창』은 임진왜란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매창이란 인물의 삶과 그 내면의 드라마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대사건이 아우르는 여러 가지 국제적·역사적 문제는 별다른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번 소설집 『늙은 여자를 만났다』에서도 장삼이사들의 내면에 대한 탐구는 지속되고 있으며, 특히 소소한 일상의 세목들에 대한 조명은 매우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분명한 이웃」의 주인공은 “원전사고가 나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연쇄살인이 일어”나지만 “그런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반찬을 죽어도 만들기 싫을 때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먹을 만하고 심지어 맛있기까지 하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한 공기의 물을 넣었을 때와 한 컵의 물을 넣었을 때의 밥맛이 전혀 다르다는 것”에 놀란다. 이러한 ‘나’의 고백은 이번 소설집을 창조해 낸 작가적 특성에 연결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옥정이 관심을 갖는 것은 각종 미디어에서 24시간 볼 수 있는 사회적 사건·사고가 아니라 우리가 쉽게 지나치지만 삶의 진실을 담고 있는 파편화된 일상의 단면들이다. 「일요일의 달팽이」는 자전거를 ‘너’라는 청자로 설정하여 일상의 이모저모를 발화하는 것만으로도 밀도 있는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될 정도이다.
소설은 다양한 색깔과 기능을 지니고 있다. 시대의 총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것도 소설의 기능일 수 있다면, 언어와 상상력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아름다움의 성채를 쌓는 것도 소설의 본업일 수 있다. 또한 소설은 삶의 자세와 기본적인 태도를 성찰하게 이끌어 갈 수도 있으며, 시대의 급소를 곧바로 가격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번 소설집 『늙은 여자를 만났다』에 수록된 작품들은 종래의 소설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독자들은 이번 작품집을 통해 작가가 현미경적 시선으로 수놓은 일상의 다양한 무늬를 찬찬히 살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허방의 기원
이번 소설집을 일관하는 사유의 지평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근거 없음 혹은 의미 없음에 대한 수용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라면, 그가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허공을 걷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최옥정의 소설에서 인간은 온전한 삶의 의미나 목적 없이 생존을 이어갈 뿐이다. 이러한 허공 위의 삶은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제일 처음 존재의 정체성과 안정감을 부여하는 가정의 파탄에서부터 비롯된다. 「늙은 여자를 만났다」는 모든 권위와 의미의 입법자인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는 평생 아버지에게 결박된 삶을 살았다. 아버지와의 세월은 “당신 때문에 나는 어떤 것은 할 수 없었고, 어떤 것은 해야만 했다. 거기 나는 없었다. 우리 사이에 남은 건 서로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차곡차곡 쌓아온 세월뿐이다”라고 이야기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 때문에 “그동안 발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붙박여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 그럴 만한 여유도 시간도 마음도 없었다. 나는 평생 한 사람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처럼, ‘나’는 자기만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전혀 만들지 못한다.
「늙은 여자를 만났다」에서는 아버지가 ‘나’를 꽁꽁 얽어맨 모습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대신 그 고통의 원인과 결과의 끔찍함을 다양한 이미지의 파편적인 나열을 통해 축조해 나갈 뿐이다. 일테면 “그중 한 조각을 집어 자해를 시도하는 엄마랑 아버지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 방바닥은 온통 피와 깨진 유리로 뒤덮였다”, “나는 보이지 않았다”, “몸집이 큰 남자가 긴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녹슨 전지가위로 마구 잘랐다. 꿈속의 나는 언제나 어린 소녀였다”, “아버지는 참새의 꼬리 부분을 잡고 날개부터 씹어 먹기 시작했다”와 같은 문장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의 정도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체코까지 간다. 이것은 “당신을 여기에 두고 나는 혼자 돌아갈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서 고유한 자기만의 삶을 찾으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동화책에서 본 성과 집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 아름다운 나라”에서 “세상과 분리되어 자기네들끼리만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으로 사는 집시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집시 여자를 만나 발바닥에 못이 박힌 채 살았던 한 남자 얘기를 하고 싶다는 건 한갓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러한 실패는 무엇보다 ‘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모든 주체(subject)는 신민(subject)이듯이, ‘나’ 역시 그동안 아버지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근거를 확보해왔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신을 결박한 아버지를 떠나보낸 것에, “악몽과 불안과 조바심을 물려준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안도”하지만, 다음에는 “서러웠고 지금은……. 지금은 막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막막하다. 손에 든 지도를 누가 빼앗은 것처럼 넋이 나가 서 있다”고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늙은 여자에게서 배운 슬픔을 불러오는 제스처(반지를 세 바퀴 돌리는 것)을 취하는 것이다. ‘나’의 홀로서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소년은 죽지 않는다」는 혼자 사는 열세 살 소년의 하루를 찬찬히 따라가는 소설이다. 「소년은 죽지 않는다」에서 소년의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지금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 엄마는 메일로 “너를 사랑하다. 미정아”라는 말을 하는 남자를 따라 일 년 전 집을 나갔다. 가출하는 날 어머니는 “나를 모욕하는 것이라면 태양도 쳐부수겠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가출 이전의 삶이 모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버지가 “부하를 다루듯이” 아무한테나 “명령조로 말하는 게 버릇”인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어머니가 받았을 상처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소년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르쳐줄 어른이 없기 때문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알아서 챙겨야 한다. 소년은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자신이 지금 혼자 집에 남겨졌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애쓴다. 지금 집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