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 이야기

이중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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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자취를 찾아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중환의 『택리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막상 이중환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하면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지리학자인 저자(이문종)가 남한에 남아있는 이중환의 자취를 발로 답사하고 한편으로는 『택리지』나 여주이씨 문중의 문헌 및 가계를 일으키고 번창시킨 인물들을 통해 이중환의 삶을 복원해낸 소평전이라 할 수 있다.
모두 1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택리지』가 쓰여진 강경의 팔괘정과 공주의 사송정을 비롯해 이중환이 말년에 은거하려 했던 상주 청화산 아래의 우복동, 여주이씨 가문의 세거지인 예산의 고덕, 이중환의 할아버지와 부인이 묻혀있는 연기군 등을 답사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여럿 찾아내고, 문중의 이야기를 통해 이중환의 모습을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이중환을 이해하려면 여주이씨의 문중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중환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집안 인물들과의 연관성을 따지는 것이 이중환을 이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 장 「연기 땅에 사천목씨 부인을 묻고」에서는 저자가 문중보다도 앞서 찾아낸 묘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기군(지금의 세종시)에는 이중환의 할아버지와 부인의 묘소가 남아있는데, 1993년 저자가 답사를 통해 어렵사리 찾아냈다. 저자는 그곳을 『택리지』 답사 1번지로 삼자고 말한다. 즉, 죽은 자가 묻힌 곳은 천하의 명당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중환을 포함해 아버지, 증조·고조할아버지 등 직계 가족의 묘소가 있는 황해도 금천의 설라산 백운봉 자락이 『택리지』 답사 1번지가 됨이 마땅하지만, 지금은 북한에 갈 수 없으니 연기 땅으로 대신하자는 말이다.
이중환의 호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청담인데 그 외 청화산인이라는 호도 있다. 「청화산 우복동에 은거하려 했다」에서 저자는 이중환이 속리산 위편의 청화산에서 호를 땄을 것이라고 말한다. 청화산 아래는 우복 땅이라고 해서 은거할 수 있는 명당이 있는데 이 부분은 『택리지』에서도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을 뿐더러 이중환의 글솜씨가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

이문종

(李文鍾)
지리학자.
대덕(현대전)에서태어나공주사범대학에서학사,서울대학교에서석사·박사학위를취득하였다.1975년부터2005년까지공주대학교교수로재직하다가정년했으며,내내공주에서살다이책을만드는과정에서2022년6월초,세상을떠났다.
공주(公州)와이중환(李重煥)과는깊은관계가있다는사실을알고부터『택리지』에많은관심을갖게되었다.그러하여2014년에『이중환과택리지』(아라)라는책을내놓았고그책을바탕으로수정,가필하고내용을심화시켜이번에『이중환이야기』를내게되었다.

목차

책머리에

1.연기땅에사천목씨부인을묻고
2.『택리지』는강경의팔괘정에서쓰고
3.청화산우복동에은거하려했다
4.이중환에게는온천욕을즐기는장소가있었다
5.타고난문장력과박학한소년
6.이중환계여주이씨가문과학통
7.청류남인을표방했지만
8.당쟁에인생을발목잡히고
9.집안의주요인물로
10.『택리지』속의발자취
11.기나긴인고끝에얻은명예회복
12.『택리지』에서서·발문을쓴이들과이중환
13.설라산백운봉아래에잠들다

이중환과그의시대

출판사 서평

저자는또이중환이청화산을오갈때-지금은수풀속에방치되어있지만-틀림없이문장대온천에들러목욕을즐겼을것이라고말한다.
「타고난문장력과박학한소년」에서저자는이중환은어렸을때부터사람들을깜짝놀라게할만큼뛰어난글솜씨를갖고있었다고말한다.요약하듯간결하면서도뛰어난문장력이특징인데,그런글솜씨덕택에나중에『택리지』까지쓰게되었다는것.실제이중환은24세때관직에나가서뛰어난엘리트로서의역할을수행하며튀는공무원으로세인의주목을받았다.바로그점이당파싸움의와중에서표적이되었을것이다.저자는“여주이씨를잘분석해야한다.여주이씨가문에서읍지나지도제작을하는인물들이여럿배출되었는데,이중환이『택리지』를쓰게되는배경이되었다.그래서가문의학통을살펴보는데역점을둔것이다.”라고말한다.
이중환은서인,남인의싸움에서청류남인을표방했던사람이었다.벼슬을많이한탁류남인과는달리청류는꼿꼿한지조를지키려는사람들이었다.그런데처가였던사천목씨가서인노론계의미움을가장많이받고있던관계로이중환에게까지불똥이튀었다.특히목호룡은노론에가까웠는데출세에눈이멀어변절해소론에붙었고,이중환을끌어들였다.이중환은이때문에관직에서쫓겨나고두번이나귀양살이를하면서일생을방랑생활로마감하게된것이다.
저자는「집안의주요인물로」에서이중환이비록관직에서는불운했지만,집안내에서는주요인물로꼽혀집안시회(詩會)인‘청풍계’에참석하기도했음을처음밝혀내고있다.
『택리지』에서이중환은자신이전라도와평안도는가보지않았고6개도를다녔다고적고있다.저자는「택리지속의발자취」에서이중환이제일많이갔던곳은충청과경기인기호지방이고그밖에강원,황해,경상북부를다녔고,경상도라고해도밀양,진주아래는안갔을것이라고말한다.또한함경도는많이갔는데이중환의선조들이업적을남긴곳이었기에두만강꼭대기까지갔을것이라고추정한다.
「기나긴인고끝에얻은명예회복」에서저자는이중환은죽기3년전에서야문관3품,무관3품의교지를받으며명예회복이되었다며실제적으로이는죽음을앞둔시점이기에별의미가없는일이라고냉정하게평가한다.
『택리지』의서문과발문을쓴이들은성호이익,목성관,목혜경,정원유등이었다.저자는“이중환이집도절도없이떠돌며『택리지』를남겼다고하지만나는목혜경이가쓴발문은믿고싶지않다.대과에합격하고임금의측근에있었던이가그렇게생활했을리가없다.이중환이방랑생활을많이했다고해도절대남의집에가서밥을얻어먹지는않았을것이다.남한강,북한강,충청도,공주,고덕등내포에가면친척들이무더기로있었고그래서다연고를찾아다녔을것이다.”

저자는이중환의이야기를쉽게전달하려고많은노력을기울였다.또한땀한땀기워나가듯정성스럽게쓴흔적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