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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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전범이 된 조선청년』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인 전 BC급 전범의 호소』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군의 최말단에 속했던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이 일상적으로 포로를 대면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일제의 포로 정책의 책임을 떠안고 BC급 전범으로 처벌되었던 아픈 과거를 회고한다.
특히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일제가 자행한 여러 유형의 강제동원 가운데서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분야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의 기록’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한국 사회에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의 출판으로 다시 한 번 한국 사회에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가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에는 역사의 격동기에 휩쓸려 인생이 뒤틀려버린 한 ‘역사 희생자’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담겨있다.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에 놓인 한 개인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저자는 뒤틀린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반성하고 배우고 싸웠다. 그의 삶을 보면 한 개인의 힘이 역사 앞에 그리 미약하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한국인 BC급 전범 출신자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저자

이학래

저자이학래는1925년전라남도보성군에서태어났다.열일곱살때일본군의포로감시원모집에응모하여,1942년9월부터1945년8월까지일본군군무원으로타이·미얀마철도건설에동원된연합국포로감시업무에종사했다.1947년3월20일전범으로체포되어오스트레일리아관할재판에서사형판결을받았다.같은해11월7일20년으로감형되었다.
‘일본인’으로취급되어중형을살았지만,일본정부는‘외국인’으로구분해원호와보상에서완전히배제했다.1955년처지가같은한국·조선인전BC급전범자와함께‘동진회’를결성하고일본정부의사죄와보상을요구하며현재까지지속적인투쟁을전개하고있다.현재‘동진회’의회장을맡고있다.

목차

책을펴내며
한국독자여러분께

‘죽음의철로’포로감시원
포로감시원이되기까지
패전,역전되는입장
사형판결과‘죽음을각오한’여덟달
스가모프리즌SugamoPrison이라는곳
택시회사설립과유골송환운동
조리條理를요구하는재판투쟁
일본정부의대응을요구하는입법운동으로

한국어판후기
끝나지않은질문,누구를위해,무엇을위해-우쓰미아이코
오늘하루,이학래가되어보자-이상의
역자후기

특정연합국재판피구금자등에대한특별급부금지급에관한법률안
이학래연보
참고문헌
이책의이해를돕는키워드

출판사 서평

1937년부터1945년까지일제는전쟁으로치달았다.군사력만이아니라정치,경제,사회,문화등전부문에걸쳐국가의총력을총동원하는전쟁이었다.일제가일으킨침략전쟁에조선인들도대거동원됐다.군인,군속,노동자,일본군‘위안부’까지일제가강제동원한조선인은약800만명에이른다.이들가운데오랫동안주목받지못하고잊혀진사람들이있다.태평양전쟁당시연합국포로의감시를맡았던민간인군무원,포로감시원이그들이다.

‘지원’을빙자한강제동원,포로감시원
1942년5월23일매일신보1면에포로감시원을모집한다는기사가머리기사로실렸다.민간인군무원으로수천명을채용한다고했고,‘반도청년의더할나위없는영광’이라고했다.20~35세의초등학교졸업이상의청년들이모집대상이되었다.형식상으로는모집이었으나실제는달랐다.지역별로인원을배정한후각지역의관리와경찰이할당된인원을동원했다.‘지원’이라는이름으로자행된강제동원이었다.
징병제시행이발표된시점에서조선의청년들은언젠가징병되어전쟁터로끌려가야한다는냉혹한현실과마주했다.이때포로감시원을모집한다는소식이들려왔다.포로감시원이되면월급도주고가족도보호해준다고했다.집안살림에보탬도되고,전쟁터에나가총알받이가되는것도피할수있다면포로감시원이되는게낫지않을까.그들은그렇게포로감시원이되었다.

열일곱최연소의나이로포로감시원이된이학래
이학래는열일곱의나이로최연소포로감시원이되었다.전국각지에서동원된3,000여명의조선인청년들과함께부산에있는일명노구치부대의훈련소로끌려가훈련을받았다.민간인군무원신분이었지만,그들이받은건철저한군대식교육이었다.포로는감시와감독의대상일뿐,포로를인도적으로처우해야한다는것은전혀배우지못했다.포로에맞서려면폭력밖에없다고배웠다.포로는동물처럼다루어야한다고,포로보다우월하게보이려면협박과구타밖에없다고,그렇지않으면포로들이너희들의머리위에올라서게될거라고배웠다.
조선인포로감시원은각지로파견되어13만5천여명의연합군포로를감시하고감독했다.이학래도타이에서1만1천명의포로들을만났다.후일[콰이강의다리]라는영화로유명해지는‘죽음의철로’,타이·미얀마철도건설현장에투입된포로들이었다.포로감시원은일본군에소속되었으나이등병보다못한일본군의최말단에자리했다.이학래는상급자가시키는대로맡은바임무를성실히수행했다.그러나전쟁이끝난후그는전범으로체포되었다.

일본인A급전범18명사형,한국인BC급전범23명사형
전쟁이끝나자연합국은태평양전쟁과정에서자행된일본의전쟁범죄책임을묻기위해재판을시작했다.동남아시아49곳에서BC급전범재판이벌어졌다.재판결과5,700명이BC급전범으로판결되었는데,그중148명이조선인이었다.그들중23명은교수형에처해졌고,125명은무기또는유기징역에처해졌다.조선인148명중129명이이학래와같은포로감시원이었다.
포로감시원의죄목은포로학대였다.무리하게노역을강요하고식량과의약품을제대로공급하지않았다는것이다.이는일본군의명령과포로감시체계에따라이루어진것이었다.하지만일본군의포로정책책임자들이대부분빠져나간가운데,그책임은일상적으로포로를직접대면해야했던최말단의조선인포로감시원들에게지워졌다.

전범이된조선청년이학래,
우리는무엇을위해,누구를위해전범이되어야했을까?

이학래는1947년3월싱가포르에서열린호주군사법정에서포로학대혐의로기소되어재판을받았다.재판에서이학래는환자에게무리하게노역을시켜사망에이르게한혐의로사형을선고받았다.변호사는그가말단의군무원일뿐,포로와관련하여어느것도결정할지위에있지않았다고변호했지만받아들여지지않았다.이학래는7개월간사형수로살았다.이후감형되어수년간의감옥생활끝에석방되었다.하지만전범으로낙인찍힌그는끝내조국으로돌아가지못했다.
조선인포로감시원들은왜일본의전쟁책임을떠맡아야했을까?그들은무엇을위해,누구를위해전범이되어야했을까?이학래는일본정부를상대로평생을싸워왔다.‘조선인BC급전범’이라는불명예를안고죽은동료와평생동안그멍에를짊어지고살아야했던자신들의명예를회복하기위한싸움이었다.
그는자신의무고함만을호소하는것이아니다.그는평생동안일제의침략전쟁에자신의한손을빌려주었다는죄책감에시달리며반성과각성의시간을보냈다.그는한국에서이책을출판하는것을끝까지망설였다.한국의독자들이‘전범’이되어야했던자신의삶을이해해줄까걱정이되었기때문이다.그는말한다.“한국의여러분도이해해주신다면좋겠다”고.
여기‘역사의희생자’가겪은파란만장한삶이있다.그가내민손을잡을것인지는순전히독자의몫이다.자,이제우리는어떻게할것인가.이책의마지막장을덮는순간책을내기로결심한우리와마찬가지로나를움직이는무언가를반드시찾을수있었으면한다.

[해설]오늘하루,이학래가되어보자
이상의(인천대학교초빙교수)

1.서
전범戰犯,무서운말이다.더욱이조선인전범이라니,이해하기어려운말이다.도저히동의할수없는데수십년간벗어날수없는굴레였다면참으로두렵고이해하기어려운말로다가올것이다.이책은구순을넘긴이학래가자신과동료들에게‘BC급전범’이라는낙인이찍힌과정과이후의파란만장한생애에대해써내려간글이다.자신의의지와는무관하게거대한역사의회오리속에휘몰려어찌할수없었던인생에대해서.
한국근현대사강의를진행하면서그중한주는‘BC급전범이된조선인’에대한내용을수업한다.이를통해역사와개인의관계를설명하곤하는데,한학기수업중학생들이가장진지하면서도가슴아리게받아들이는시간이다.일본의시종일관무책임한태도에분개하는학생도있고,국가가제역할을하지못했음을비판하는학생도있고,역사의비정함을탓하는학생도있다.토론의결론은대개뒤틀린역사속의억울한희생자에대한안타까움과이들에대한명예회복의필요성을강조하는것으로끝맺는다.

2.전쟁그리고강제동원
청일전쟁,러일전쟁,1차대전,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전쟁과영토확대로연속된일본의근대사는우리의근대사와무관하지않다.그중에도중일전쟁에서태평양전쟁으로이어지는전시체제기는일제의침략전쟁에조선과조선인을동원하기위해황국신민운운하면서조선인의정체성을말살시켜간시기다.
일제는전시에정부는어떠한것이든다동원하고통제할수있다는내용의국가총동원법을급조하고그에근거하여조선인을강제로동원하였다.여기에서강제란육체적인강제만을의미하지않는다.신체적인구속이나협박은물론,황민화교육에따른정신적인구속·회유,취업사기,법적인강제에의한인력동원도강제동원에포함된다는것이학계의견해다.물리적강제만이아니라본인의자유로운의사에반대되는행위는강제의범주에포함된다는것이다.
3·1운동이후의민족분열통치를일제가‘문화통치’라고불렀다고해서우리가문화적인통치였다고받아들여야하는건아닐게다.마찬가지로지원이라부르면서지원하지않을수없는여건을만들어놓고지원을하도록하면,그것은형식상은지원이지만실제로는지원이아닌강제동원이라고해야할것이다.
국가총동원법을시행한1938년부터전쟁이끝난1945년까지강제동원된조선인은연인원800만명에가깝다.그중에는이학래등의포로감시원도포함되어있다.수많은노무자가있었는데그중에하필포로감시일을맡은군무원,포로감시원이었다.아니그일을‘지원’했다고한다.포로감시를하고싶어지원했을까,포로가어떤사람들인지,어떻게대해야하는지알고지원했을까.
1942년일제는조만간조선인징병제를실시한다고발표하였다.이전까지는지원병이라는이름으로조선인청년들을부분적으로병력에동원했지만,1944년부터는전면적인동원으로전환한다는것이었다.그리고보름후신문에는‘모집!포로감시원,거듭되는반도청년의영광,군속으로수천명채용’이라는기사가나왔다.대상은20~35세의국민학교졸업이상의남자로,형식상은모집이었으나지역별로인원을배정하여행정관리와경찰이할당된인원을동원했다.징병제시행을앞두고지원이라는허울을쓴채추진한강제동원이었다.
언젠가는동원될것이라고예상하고있던이들에게,포로감시원에지원하면2년간월급도주고가족도보호해준다는말은반가운제안이었다.2년만무사히지내면집안살림에보탬도되고,징병이되어전쟁터에총알받이로나가는것을피할수있다는것만해도솔깃한조건이었다.태평양전쟁기13만5천여명의연합군포로를감시하고노역시키는것이이들의임무였다.일본군조직의최말단에서상관의명령에따라포로를관리하는것이었다.
3,200여명이포로감시원이되었고,지금의부산시민공원자리에있던노구치부대의임시군속훈련소에서교육을받았다.군사훈련을받았고,포로가되는것은수치라는말,체구가큰연합군포로에맞서려면폭력밖에없다는말을새겨들었다.포로는동물처럼다루어야한다고,그렇게하지않으면오만불손한포로들이무시하게될거라고,포로보다우월하게보일수있는방법은구타와협박을동원하는것이라고수없이들었지만,전쟁포로를어떻게대우할지에대한제네바협약은들어보지못했다.
이렇게이학래는포로들을만났다.그들을감시하고관리하였다.일본인하사관17명과조선인군무원130명이1만1천명의포로를관리할때말이통하지않는포로들,덩치가큰포로들,명예로운대우를원했던포로들,당당하게휘파람부는낯선포로들과마주하였다.

3.전후의전범재판
2차대전이끝나자연합국은태평양전쟁진행과정에서자행된일본의범죄와그책임을묻기위한재판을진행하였다.미국을비롯한7개국주도로동남아시아49곳에서BC급전범재판이행해졌다.재판결과5,700명이BC급전범으로판결되었는데,그중에는148명의조선인이포함되어있었다.그들중23명은교수형에처해졌고,125명은무기또는유기징역에처해졌다.일제의전쟁책임이식민지조선인에게전가되었던것이다.특이하게도전범판결을받은조선인148명중대다수인129명이포로수용소에서일하던군무원이었다.
재판은일심즉결로진행되었다.대개의경우연합군포로의증언이포로감시원의생사를결정하였다.포로감시원은일본군의맨앞에서매일포로와마주했던존재로서,포로들은그들을눈앞에서학대했던감시원으로고발하였다.판사,검사,변호인은연합군에서지명하였고,검사측증인만있었으며,진술할기회와통역이없는법정도있었다.
조국은일제의지배에서해방되었고연합군을해방군으로환영하고있었다.그러나포로감시원들은귀국하지못한채여전히일본인으로서연합국의재판을받고있었다.이들은조국을‘해방시킨’연합군에게전범으로판결을받았고,수형자가되었고,사형을당했다.약육강식의제국주의논리를배운식민지민으로서,황민화교육을받고일본을위해분투한자신의무지가후회스럽다고재판정에서한탄한사람도있었다.
포로감시원의죄목은포로학대였다.노역을강요하고식량과의약품을제대로공급하지않아포로를학대했다는것이다.포로가되는것을수치로여기고금기시하는일본군과포로학대를범죄시하는연합군의인식차이가판결의결정적요인이되었다.일본군의명령과포로감시체계에따라노역을시켰고일본에서식량과의약품이보급되지않아포로들에게줄수없었지만,이러한사정은재판정에서고려되지않았다.연합군은독일나치에붙잡힌영·미군의포로사망률이3.6%였던데비해일본군에잡힌포로의사망률이무려27%에달하는데분노하여누군가에게책임을묻고분풀이를하고싶었다.
이학래역시1947년3월싱가포르에서열린호주군사법정에서포로학대로기소되어재판을받았다.검사는수용소포로가죽은책임을이학래에게물었다.변호사는그가군속일뿐캠프를지휘할권한이없었으며,약품공급,식량배급,포로의일상과관련된결정은그의직무범위를벗어난일이라고하였다.재판결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