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 (부러진 기린의 뿔을 찾아서)

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 (부러진 기린의 뿔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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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삼국유사>가 탄생한 사찰 '인각사'에 대한 인문답사기!
<삼국유사>의 산실인 '인각사'에 대한 인문학적 보고서『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 <삼국유사>의 탄생공간인 인각사의 유래와 역사적 변천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고려 후기의 고승 일연은 생애의 마지막 5년 동안을 인각사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라는 민족의 고전을 완성했다. 인각사에는 여러 사연이 담긴 일연의 비석과 부도가 남아 있으며, 해마다 '삼국유사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각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그 진면모를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특히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인각사 관련 자료 집성'은 앞으로 인각사를 연구하고 발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저자는 인각사의 존재와 역사적 부침을 해명해줄 테마들을 중심으로 인각사와 인각사 주변의 유적지들을 답사했다. 유물들과 문서자료, 주민들의 증언까지 종합적으로 활용해 인각사의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또한 인각사를 <삼국유사>와 일연 등 역사를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저자

이종문

저자 이종문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계명대와 고려대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 동안 『고려전기 한문학 연구』 『한문고전의 실증적 탐색』, 『고려시대 역사시 연구(공저)』 『고려시대의 문인과 승려(공저)』 등 주로 고려시대의 한문학과 관련된 다수의 논저들을 집필하였다.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그는 『저녁밥 찾는 소리』 『봄날도 환한 봄날』 『정말 꿈틀, 하지 뭐니』 등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으며, 현재 계명대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목차

머리말_우리 정신사의 성지聖地를 찾아서

제1장 서설- 버려진 절

제2장 천 년 고찰의 흥망성쇠
1 학소대 벼랑에 기린이 뿔을 걸다
2 세상을 놀라게 한 2008년의 발굴
3 일연 스님과 인각사의 비상
4 일연 입적 후 고려 말의 인각사
5 숭유배불 정책과 전란의 화재
6 재건을 둘러싼 유불 갈등
7 바닥이 보이지 않는 추락
8 폐사의 비밀을 담은 또 하나의 전설

제3장 사무치게 느끼려고 가고 또 가다
1 보쌈당한 석불과 절 마당의 유물들
2 보각국사비의 서예사적 가치
3 사람에 깨지고 불에 타다
4 사라진 글자를 찾아라
5 보각국사 부도탑의 석조 예술
6 칠전팔기의 보각국사 부도
7 왜 인각사였을까
8 일연 어머니 묘소를 찾아서

제4장 인각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주註 / 참고문헌
부록
인각사 연혁 / 일연 연보 / 인각사 관련 자료 집성 / 인각사적

출판사 서평

십여 년간 수십 차례 답사하고 문헌을 파헤친 끝에 완성한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麟角寺에 대한 최초의 인문학적 보고서

<이 책의 저작 배경과 의미>
- 『삼국유사』의 탄생공간인 인각사의 유래와 역사적 변천을 최초로 종합적으로 추적
- ‘현장 답사’, ‘문헌 자료에 대한 저인망식 발굴’, ‘문학적 상상력’ 등 인문 답사가 요구하는 3대 조건을 조화시킴으로써 ‘메타 장르적 고민’을 담은 답사기.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대부분의 답사기들은 유적지에 남아 있는 가시적인 유물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답사기의 수준을 한 옥타브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당 유적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이 절실하게 요구되며, 여기서 말하는 발굴에는 현장에 대한 발굴뿐만 아니라 문헌 자료에 대한 저인망식 발굴이 포함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지상에 남아 있는 유물과 함께 이 두 가지 측면의 발굴 결과가 절묘하게 어우러졌을 때 유적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며, 만약 여기에다 독자들에게 감동의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문학적 장치가 가미된다면 금상첨화다. 이 책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집필한 인각사(麟角寺) 답사기다.”_머리말

은해사의 말사인 인각사는 현재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는 아주 조그만 사찰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고승인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생애의 맨 마지막 5년 동안을 바로 이곳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라는 민족의 고전을 완성하였다. 일연의 주석을 계기로 하여 인각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주도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로 그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게다가 인각사에는 갖가지 사연으로 뒤범벅이 된 일연의 비석과 부도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발굴 과정에서 다수의 국보급 유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인각사는 결코 우리나라에 있는 무수한 절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 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마땅하다. 최근 사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과 함께 복원을 위한 기초 작업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문화제’를 개최하고 있고, 학계는 물론이고 지방자치 단체에서 이 절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인식의 소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각사에 대한 본격적이고도 심도 있는 연구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애써 이룩된 성과마저도 전문적인 학술 서적에 수록되어 있어서 연구 성과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대단히 어려웠다. 오늘날 인각사를 소개하는 글들이 대부분 상식적인 수준에서, 천편일률의 매너리즘을 이루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인각사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동적으로 읽히는 대중적인 책의 저술을 통해, 최근 인각사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문화운동에 의미 있는 초석을 놓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상된 전문성을 지닌 대중적 서적이며, 특히 이 책의 말미에 붙은 <인각사 관련 자료집성>은 앞으로 인각사를 연구하고 발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로 기능할 것이다.

경북 영천에서 의성으로 가는 28번 국도상에 위치해 있는 고로면 화수 삼거리에서 위천을 끼고 도는 삼국유사로(908번 지방도로)를 따라 대략 2.5킬로미터를 달려 올라간 지점. 옛날에 학이 살았다는 연유로 학소대鶴巢臺라 불리는 수십 길의 아찔한 벼랑 아래 시퍼런 물결이 출렁거리면서 희디흰 모래밭과 무늬 고운 돌들을 깔아놓은 곳! 바로 그 언저리의 화산 자락에 등을 기대고 선 인각사는 무엇보다도 ‘기린의 뿔麟角’이라는 절 이름부터가 문학적 상상력을 부추기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속설이 분분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각사가 자리 잡은 화산의 지리적 형국이 전체적으로 기린을 닮았고, 인각사의 명부전冥府殿 뒤쪽으로 나지막이 뻗어내려온 화산 자락이 바로 그 기린의 뿔에 해당된다는 풍수지리적인 설명이다. 일연비를 보면 일연 스님이 계실 때부터 이 일대를 ‘인령’이라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각사 서북쪽 위천 건너편에 하나밖에 없는 기린의 뿔처럼 독립된 산봉우리로 우뚝하게 서 있는 옥녀봉이 바로 기린의 뿔이라고 말하는 또다른 민간 속설도 소개하며 양쪽 다 일리가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절 이름의 유래가 분명하지 않듯이 인각사의 창건 시기와 창건자에 대해서도 두 가지 기록이 있다. 1963년 이도원李道源의 「인각사중수기麟角寺重修記」에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 것과, 권상로權相老의 『조선사찰전서朝鮮寺刹全書』에 선덕여왕 12년(643)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한 기록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기록이 모두 인각사가 창건된 시기로부터 무려 1300년 뒤에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므로 신빙성이 매우 낮고, 더구나 창건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거의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해당 사찰의 권위를 높이려고 고승 대덕大德의 대표적 상징인 원효와 의상 등을 창건자로 내세우는 바람에,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그들이 세운 절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통일신라시대에 이곳에 인각사라는 규모 있는 절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인각사가 처음 생겨난 때로부터 현재의 모습처럼 쪼그라든 현재까지 과연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를 주도면밀하게 파악해나간다. “인각사 발굴은 하면 할수록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모르는 사실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요컨대 발굴로 인해 다수의 국보급 유물을 발견하는 한편, 통일신라 때 인각사에 이미 거대한 사찰이 있었음을 새로 밝혀내는 실로 엄청난 개가를 올렸지만, 서울인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첩첩산중에 누가 무슨 돈으로 무엇 때문에 이런 대규모 사찰을 세웠는가라는 정말 풀기 쉽지 않아 보이는 질문”이 다시 생겨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말이다. 아래에 그 핵심적인 것들만 우선 정리해보도록 한다.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는 왜 폐사가 되었는가?

①인각사의 시대별 사역寺域 정리 : 최근의 발굴 결과 인각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큰 규모의 거찰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일연 스님이 주석하면서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되어 지방 사찰로서는 유례없는 규모를 자랑하는 절이었다. 그런 인각사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국가 주요사찰 명단에 포함되지 못하면서 사세가 위축되었다. 숭유배불의 국가정책은 인각사를 인근 영천군 임고면에 세워졌던 임고서원臨皐書院의 휘하에 두어 장구한 역사를 가진 고찰을 이제 막 탄생한 신생 서원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란히”하도록 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승려들과 지방 유생들 사이의 갈등 또한 심각했다. 인각사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것은 임진왜란 때 일어난 대화재가 원인인데, 이는 인각사가 의병들의 본거지가 되어 항일투쟁을 하는 베이스캠프로 기능했기 때문에 왜군이 적의 본거지를 없애기 위해 지른 불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에 오면 인근 지역의 백성들도 인각사라는 절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어져버린다. 저자는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주도한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드러난 시대별 인각사 사역 변천을 그림 자료와 함께 상세히 해설했으며, 임진왜란 때 피난일기인 암곡 도세순의 <용사일기>등 각 시대별 문헌에 묘사된 인각사, 이 지역 유생들이 인각사를 둘러싸고 벌인 ‘싸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각종 편지 자료들을 동원해서 인각사의 사역 변천을 넘어 절을 구성하는 각 건물과 탑, 부도의 위치 등을 세밀하게 고증해나간다.

왜 일연 스님은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지었는가

②인각사와 일연 스님의 관계 해명: 저자는 일연 스님의 생애와 행적을 상당 분량 거론하면서 왜 그가 말년에 인각사에 주석하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는지 등의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이 절 저 절을 떠돌던 일연은 50대 중반부터 원종과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서울을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고위직에 있는 사대부들과도 시문을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교유하기도 했다. 일연은 78세가 되던 해에 국사國師에 임명되지만, 서울에 머무르지 않고 고향에 머물며 고령인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왕에게 말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일연은 78세부터 84세로 입적할 때까지 인각사에 머물게 된다. 인각사 근처에 일연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던 것인데, 일연의 어머니는 일연 나이 79세 때 96세의 나이로 별세하게 되는데, 인각사 근방에는 일연 어머니의 무덤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덤이 있다. 저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일연이 효孝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검토하면서, 일연 자신도 지극한 효자로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일연이 평생을 운수행각하며 모은 자료를 토대로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한 이유라고 결론짓는다.

왕희지 글씨 덕분에 수난을 겪은 인각사비

③인각사비의 역사 추적: 1295년 인각사에 세워진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는 인각사에 있다는 이유로 ‘인각사비麟角寺碑’라 부르기도 하고, 일연 스님의 생애를 새긴 비라는 이유로 ‘일연 비一然 碑’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비석에는 무신정권과 몽고의 침입, 원나라의 지배라는 험난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고뇌에 찬 삶을 살았던 일연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인각사비는 중국 진晉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321~379)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다.
그 이유로 이 비석은 탁본의 대상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중국 본토에서 사신이 오면 조정에 인각사비 탁본을 요청하는 일이 많았다. 1625년에 중국 사신이 인각사비의 탁본을 요청한 예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 장교의 눈에 띄어 땅바닥에 엎어진 채 탁본을 당해야 했으며, 마침 시기가 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