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열반은 생사生死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대승기신론을 시작할 때 수행과정의 3단계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믿음을 가진 일원론一元論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중생인 내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는 이원론二元論입니다. 중생인 나와 깨우친 부처로 나눠놓고서 수행을 시작합니다. 맨 처음은 중생인 나와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불교의 교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처는 깨달은 중생이고, 중생은 깨닫지 못한 부처라고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수행에 들어가면 중생과 부처가 완전히 분리됩니다. 즉, 난 아직 부처가 아니기에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중생이었던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과 부처가 애초에 없었다는 불이론不二論에 이르게 됩니다. 일원론一元論과 불이론不二論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불이론不二論은 그 하나마저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거기서는 열반에 대한 추구가 망령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이원론의 수행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에게 생사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는 아직 불이론의 단계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분리 없음과 열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열반과 생사가 망령된 개념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마저도 마음의 분별작용임을 알게 되면 내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분별임이 파악됩니다. ‘분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밖에 무엇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람 때문에 잠시 파도가 생겨났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 하나가 되듯이, 임시적으로 생겨난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경계와 분별이 생겨납니다.
벡터vector는 움직이는 방향을 가진 에너지이고, 스칼라scalar는 방향이 없는 에너지, 즉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에너지입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떤 ‘느낌’이 있고, 지켜보는 ‘내’가 있고, 들여다보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움직이는 벡터’이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마음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과 같이 모두 쌍을 이루어 생겨나는데, 생사와 열반도 그와 같이 한 쌍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태어났는가를 물어서 생사의 허구성이 발견되면 거기 열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련을 하고 공부하는 깊은 승려들조차도 여전히 열반을 향하려 한다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생사와 열반을 나누는 마음, 분별된 개념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음五陰,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자성自性이 있지 않으므로 나타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이미 열반으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완전한데 무엇을 더 추구하겠습니까? 이 뜻을 오해하면 노력하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이기 쉬운데, 이런 깨침은 마지막에야 일어납니다. ‘이미 완전하다’는 말은 수행의 세 번째 단계인 불이론不二論에 가까운 말입니다. 이원론二元論 속에 있을 때는 뭐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이번 대승기신론 하권에서는 수행자세와 수행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서는 열반에 대한 추구가 망령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이원론의 수행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에게 생사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는 아직 불이론의 단계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분리 없음과 열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열반과 생사가 망령된 개념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마저도 마음의 분별작용임을 알게 되면 내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분별임이 파악됩니다. ‘분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밖에 무엇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람 때문에 잠시 파도가 생겨났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 하나가 되듯이, 임시적으로 생겨난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경계와 분별이 생겨납니다.
벡터vector는 움직이는 방향을 가진 에너지이고, 스칼라scalar는 방향이 없는 에너지, 즉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에너지입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떤 ‘느낌’이 있고, 지켜보는 ‘내’가 있고, 들여다보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움직이는 벡터’이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마음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과 같이 모두 쌍을 이루어 생겨나는데, 생사와 열반도 그와 같이 한 쌍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태어났는가를 물어서 생사의 허구성이 발견되면 거기 열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련을 하고 공부하는 깊은 승려들조차도 여전히 열반을 향하려 한다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생사와 열반을 나누는 마음, 분별된 개념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음五陰,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자성自性이 있지 않으므로 나타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이미 열반으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완전한데 무엇을 더 추구하겠습니까? 이 뜻을 오해하면 노력하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이기 쉬운데, 이런 깨침은 마지막에야 일어납니다. ‘이미 완전하다’는 말은 수행의 세 번째 단계인 불이론不二論에 가까운 말입니다. 이원론二元論 속에 있을 때는 뭐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이번 대승기신론 하권에서는 수행자세와 수행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승, 현상과 본질을 뛰어넘다(하) (대승기신론 강의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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