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1337~1453

백년전쟁 1337~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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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백년전쟁 이야기
21세기에 톺아보는 왕좌의 게임

“이보다 쉽고, 재밌고, 정확하게 백년전쟁을 풀어쓸 순 없다.”

왕위 계승권을 놓고 시작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근대 국가의 맹아를 잉태시킨 백년전쟁. 숭고한 기사도 정신과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이 혼재한 백년의 대서사시가 21세기에 되살아난다.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백년전쟁의 서막을 연 에드워드 3세, 몸은 허약했지만 뛰어난 지성과 통찰력으로 전쟁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샤를 5세, 프랑스 정복을 눈앞에 두었지만 죽음 앞에 결국 무릎 꿇은 헨리 5세, 명실 공히 백년전쟁 최고의 스타 잔 다르크. 유럽 중세사에서 가장 다채로운 빛을 발했던 인물들이 21세기에 되살아나, 중세 유럽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파란만장한 무용담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저자

데즈먼드수어드

저자_데즈먼드수어드(DesmondSeward)
오랫동안보르도에자리잡고살아온아일랜드가문출신으로,파리에서태어나앰플포스와케임브리지에서수학했다.아키텐의엘레오노르와앙리4세,헨리5세,사보나롤라등을다룬여러권의전기를저술했다.그외에도『프랑스의부르봉국왕들』,『마지막흰장미:튜더왕조의비밀전쟁』,『나폴레옹과히틀러』,『장미전쟁』,『리처드3세:잉글랜드의검은전설』,『춤추는태양:기적의성소들을찾아서』,『전쟁의수도사들』등다수의역사서를집필했다.특히『전쟁의수도사들』은서양군사-종교단체들의설립부터현재의모습에이르기까지그통사를다룬저작으로,18세기이후로이분야에서나온최초의책이다.

역자_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언론정보학과서양사학을전공했다.역사책읽기모임‘헤로도토스클럽’에서활동하고있으며,역사분야를중심으로해외의좋은책들을기획,번역하고있다.축구와셜록홈스의열렬한팬이며,1차대전문학에도큰관심을가지고있다.옮긴책으로『바다의습격』,『인류의대항해』,『시계와문명』,『아마존』,『근대전쟁의탄생』,『대포범선제국』,『십자가초승달동맹』,『왜서양이지배하는가』,『마오의대기근』,『내추럴히스토리』,버트런드러셀의『자유와조직』등이있다.

목차

프롤로그
1장전쟁의서막1328~1340년
2장크레시전투1340~1350년
3장푸아티에전투와흑태자1350~1360년
4장현명왕샤를1360~1380년
5장잃어버린평화1380~1399년
6장잉글랜드의기회1399~1413년
7장헨리5세와아쟁쿠르전투1413~1422년
8장프랑스섭정베드퍼드공작1422~1429년
9장오를레앙의마녀1429~1435년
10장비보1435~1450년
11장암울한싸움1450~1453년
에필로그

감사의말
통화단위에대한간략한설명
백년전쟁연표
선별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국내최초로소개되는백년전쟁이야기
21세기에톺아보는왕좌의게임

“이보다쉽고,재밌고,정확하게백년전쟁을풀어쓸순없다.”

왕위계승권을놓고시작되었으나결과적으로는근대국가의맹아를잉태시킨백년전쟁.숭고한기사도정신과피비린내가득한전장이혼재한백년의대서사시가21세기에되살아난다.

프랑스왕위에대한권리를주장하며백년전쟁의서막을연에드워드3세,몸은허약했지만뛰어난지성과통찰력으로전쟁을슬기롭게헤쳐나간샤를5세,프랑스정복을눈앞에두었지만죽음앞에결국무릎꿇은헨리5세,명실공히백년전쟁최고의스타잔다르크.유럽중세사에서가장다채로운빛을발했던인물들이21세기에되살아나,중세유럽의패권을두고벌어진파란만장한무용담을생생하게들려준다.

‘백년전쟁’은19세기후반이돼서야널리사용되기시작한말로100년넘게이어진일련의전쟁들을하나로묶은것이다.1337년프랑스의필리프6세가당시프랑스왕위를주장하던에드워드3세에게서잉글랜드가보유하고있던기옌공국을‘몰수’하면서시작된이일련의전쟁들은1453년잉글랜드가결국기옌의보르도를상실하면서끝났다.일련의전쟁이란슬라위스해전(1340년),크레시전투(1346년),푸아티에전투(1356년),아쟁쿠르전투(1415년),잔다르크의등장(1429년),카스티용전투(1453년)등을말한다.

누가프랑스의진정한왕인가?
1328년,프랑스국왕샤를4세가죽자왕위는발루아의필리프(필리프6세)에게돌아갔다.그런데해협건너또한명의왕위계승후보가있었으니잉글랜드국왕의모후이사벨이었다.그녀는샤를4세의누이동생이란점에서사촌지간인발루아의필리프보다오히려우선순위에있었다.많은이들은그녀또는그녀의아들이프랑스의왕위를계승해야한다고생각했지만파리의의회는이사벨을후보에서배제했다.
처음에이사벨의아들이자잉글랜드의국왕에드워드3세에게프랑스왕위계승문제는그리중요한문제가아니었다.당시그의왕권은불안했고그에게는프랑스국왕에맞설만한실력도없었기때문이다.오히려화급한문제는따로있었는데아키텐공국(기옌)을계속보유하는문제였다.기옌은잉글랜드가소유한웨일스나아일랜드와는비교도안되는경제적가치를가진영토로서오로지프랑스국왕의가신자격으로만보유할수있는땅이었다.힘이미약했던에드워드3세는필리프6세에게충성신서를하여기옌을지켰다.중세에서근대로넘어가는이과도기에,에드워드3세는프랑스가기옌을통합하려는의지를읽었고프랑스국왕과평화를이룰방도를모색했다.그러나1334년숙적스코틀랜드가프랑스의품에안기면서프랑스와잉글랜드의관계는되돌릴수없게되었다.1337년5월필리프국왕은기옌을몰수한다고선언하였고,에드워드3세또한그에게정식으로도전하는서한을보내면서‘프랑스왕위계승’권리가자신에게있음을공식적으로천명하였다.

유럽최강의프랑스Vs.작고가난한잉글랜드
당시프랑스왕은의심의여지없이서유럽의첫째가는통치자였다.그는신성로마제국황제를훨씬능가하는존재였고,1309년이후로아비뇽에있던교황청도다소간지배했다.개전시점에,플랑드르와브르타뉴,기옌과같은반(半)자치지역을제외하고도필리프6세는왕국의4분의3이상을직접지배하고있었다.1330년대프랑스의인구는2,100만명에달했고이는잉글랜드의다섯배였다.반면중세잉글랜드는인구과소지역으로,경작지보다숲과황야가더많은나라였다.이작고가난한나라에서유일하게가치있는재산은양모였다.또프랑스의국왕과달리잉글랜드국왕은통치에어려움을겪고있었다.

크레시전투,장궁이판금중기병을무릎꿇리다
프랑스기사계급은필리프6세의가장큰자산이었다.프랑스는거대한규모의기사계급을보유하고있었고,재위초기에필리프6세가이끈중무장기병부대는명실공히서유럽의최강부대였다.반면잉글랜드는개전직전에야겨우약간의빛을발견하고있었다.에드워드3세는오래도록고전을면치못했던스코틀랜드를상대로1333년에처음승리를맛보았는데,승리의원동력은장궁에있었다.장궁은분당10~12발을쏘아올려하늘을까맣게덮을수있었고가까운거리에서는판금갑옷도뚫을수있는가공할무기였지만,아직해협건너에는그존재가제대로알려지지않은상태였다.1346년에드워드3세는원정을떠나크레시숲근처에서필리프6세의3만병력을상대로대승을거두었다.이크레시전투는일종의군사혁명을예고한전투였다.

전쟁이돈버는사업이되다
잉글랜드인들에게백년전쟁은모험적인비즈니스였다.돈놓고돈먹기였다.높은이익을기대하고벌이는하이리스크의투기적사업이었다.엘리트부터기층민중까지온나라가정복사업과약탈에뛰어들었다.전쟁초기에잉글랜드는주로본국의세금과특별세금,은행가와상인들이빌려준돈으로전비를충당했다.하지만그정도자금으로는전쟁을치르기에턱없이부족했다.아무리모아도한달이상의전쟁수행도불가능했다.
하지만이문제는슈보시와파티스,몸값받아내기등의관행이일찌감치제도화되면서해결되었다.에드워드3세는일종의중세적‘총력전’을목표로슈보시(chevauchee),즉체계적으로적의경제적기반을초토화하고‘약탈’하는전술을적극적으로활용했는데,여기서발생하는전리품은잉글랜드군이전쟁을지속해나가는중요한자원이자동력이되었다.‘약탈’외에도돈을버는방법은다양했다.가장수익성이좋은방법은포로들의‘몸값’을받아내는것,즉포로에게자유를판매하는것이었다.그외에잉글랜드군은‘파티스(patis)’라불리는보호비갈취를통해서도많은돈을벌었다.

엘도라도가된프랑스
잉글랜드군대가프랑스에서얻은어마어마한부는본국으로흘러들어갔다.잉글랜드전체가프랑스에게서빼앗은전리품으로넘쳐났고,잉글랜드인들에게프랑스는일종의엘도라도였다.“프랑스부인들이자신들이잃은것을한탄했다면잉글랜드부인들은자신들이얻은것에기뻐서어쩔줄몰랐다.”전쟁은무거운세금이부과된다는것을의미했지만,전쟁의단맛을본사람들은언제든전쟁이재개되기를희망하였다.백년전쟁기간은출세의시대이기도하였다.빈한한이들도전쟁에참여하여귀족이될수있었다.끝없이이어진전쟁와중에,젠트리가문들이쉼없이죽어서사라졌기때문에새로운사람들이부상하여그들의자리를차지할여지가있었다.귀족은그들대로전리품덕을보았다.그들은프랑스에서획득한부로성과교회를지었고병사들을고용했다.

흑태자의기적같은승리
1350년부터1364년사이의주역은에드워드3세의아들흑태자와,프랑스의새로운국왕장2세였다.기옌의국왕대행으로임명된흑태자는1355년1,000킬로미터를행군하며무수한마을과촌락들을대상으로슈보시를전개했는데,여정의막바지에프랑스의국왕장2세의추격을받아퇴로를차단당하였다.이에양군은전투에돌입하였다.이푸아티에전투에서흑태자는약2천6백명의병력으로2만명이상의프랑스군을물리치는기염을토했고,특히프랑스국왕장2세를사로잡는놀라운위업을달성했다.
이에힘입어에드워드3세는프랑스국왕자리를무력으로차지하기위한원정길에올랐으나뜻을이루지못하였다.프랑스와잉글랜드는휴전협상에임하여1360년브레티니조약을체결했는데,그에따르면,프랑스는기옌과더불어리무쟁,푸아투,앙구무아,생통주,루에르그,퐁티외등다른많은지역에대한완전한주권을잉글랜드에내주어야했다.

현명왕샤를5세의프랑스영토회복
하지만잉글랜드만승승장구한것은아니었다.위대한프랑스군주가운데한명인현명왕샤를5세는브레티니조약에대하여명시적이의를제기하지않으면서천천히힘을회복했다.그는계승분쟁으로어지러웠던브르타뉴를프랑스의품안에끌어들였고,왕위에대한야심을노골적으로드러내며잉글랜드세력을끌어들이려는악인왕샤를을중앙정치무대에서몰아냈다.또플랑드르를우호세력인부르고뉴공작에게넘기는데성공하였다.무엇보다강성한프랑스의국력을토대로샤를5세는기존의‘고용계약’체제를어느정도허물고상비병력(중기병3~6천,석궁병800명)을모집할정도로국력을회복하였다.
샤를5세에게는영토회복전쟁을수행할베르트랑뒤게슬랭이라는훌륭한지휘관이있었다.푸아투,라로셸,앙구무아와생통주전체,노르망디와브르타뉴의잉글랜드거점들이차례로프랑스에귀순하거나함락되었다.샤를5세의최전성기에잉글랜드세력권인아키텐공국(기옌)은에드워드3세때보다도작게축소되었고,북부또한오직칼레와노르망디의한수비대정도만이남아있는형세가되었다.

프랑스의내분,적을초대하다
프랑스의내분은영국보다더심각하여순식간에샤를5세의유산이증발한것은물론나라를망국의지경으로몰고갔다.어린샤를6세에게는강력한인척이두명있었다.부르고뉴공작과오를레앙공작이었는데둘다프랑스를지배하려는야심에사로잡힌인물들이었다.두사람은거의모든사안에서대립했는데이대립은점점격화되었다.시끄러운언쟁과맞비난으로샤를6세를위한국왕자문회의는엉망진창이되었고,거리에서는두정파의추종자들이난투극을벌였다.그러다가1407년11월오를레앙공작이부르고뉴공작세력에의해살해당하는참극이벌어졌다.마각을들킨부르고뉴공작은파리에서빠져나와있는힘을다해플랑드르로도망쳤다.이후대립은더욱격화되어프랑스,특히파리는부르고뉴파와아르마냐크파로나뉘어무장한채서로항쟁하는지경이되었다.

헨리5세,프랑스왕이될근거를확보하다
프랑스인들사이의이치명적인분열덕분에헨리5세는프랑스의많은지역들을정복하고종국에는프랑스왕에게서많은양보를얻어낼수있었다.프랑스로서는안타깝게도부르고뉴파와아르마냐크파는잉글랜드보다서로를더지독하게미워했고,두정파는단합하기보다서로헨리5세를동맹세력으로끌어들이기위해경쟁했다.그리고결국부르고뉴공필리프가헨리5세의마음을얻었다.헨리5세는1420년5월트루아에도착하여샤를6세와함께조약에서명하였는데,잉글랜드국왕이프랑스왕위의계승자이자프랑스의섭정(HaeresetRegensFranciae)이된다는것이주요내용이었다.아직샤를6세가죽지않았지만,잉글랜드왕이프랑스왕의자격을약속받은순간이자,프랑스로서는역사에매우드문굴욕의순간이었다.

앵글로-프랑스에서의마지막전성기
헨리5세가죽은후7년간은잉글랜드인들에게마지막이자가장성공적인시절중하나였다.잉글랜드의헨리6세는,프랑스왕샤를이곧사망함으로써프랑스국왕앙리2세도겸하게되었다.‘앙리(Henri)’국왕은섬처럼고립된몇몇도팽세력지역을제외하고는루아르강북쪽의프랑스전역에서국왕으로인정받았고,마침내잉글랜드국왕이나머지프랑스지역에대한지배권을얻을진짜기회,백년전쟁이시작된이유가해소될시기가가까이온듯했다.이중왕국은순조롭게굴러갔다.이중왕국을떠받친것은섭정베드퍼드와그의위대한장군솔즈베리백작,20년넘게그들과함께전장을헤쳐온대단히재능있는일단의팀이었다.때로는파리시민들도이중왕국을위해충성스럽게싸웠다.

잔다르크는오를레앙을구하고프랑스왕은대관식을올리다
잔다르크는도팽을만나서,신이자신한테잉글랜드인들과싸우고국왕이랭스에서대관식을치르게하라는명령을내렸다고말했다.그녀는오를레앙의구원에나서기에앞서베드퍼드측에서신을보냈다.“천상의왕께서는너희들을프랑스에서쫓아내라고나를보내셨다.부디너희들의땅으로떠나라.”초반에그녀는연달아승전을거두었고그녀의명성은파테전투이후절정에달했다.그녀는도팽을설득하여잉글랜드가지배하는영토를통과하여랭스로향하였고거기서샤를은공식적으로프랑스의국왕으로선포되었다.잔은대관식내내하얀깃발을들고그의근처에서있었고,의식이끝난뒤처음으로그를프랑스의국왕이라고불렀다.국왕의대관식은도팽파의사기를경이로울정도로진작시켰다.“프랑스인들은신이잉글랜드인들에게등을돌렸다고믿었다.”

카스티용전투,프랑스의대포가백년전쟁을끝내다
전쟁말기에잉글랜드의재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