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풍수문화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간생활사와 장소미학 | 양장본 Hardcover)

조선왕실의 풍수문화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간생활사와 장소미학 | 양장본 Hardcover)

$36.73
Description
동아시아와 한국의 역사 통틀어 풍수문화가 가장 번성했던 조선왕실
519년을 이어온 권위 장소 궁성과 태실, 산릉을 둘러싼
풍수문화의 전개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조선왕실의 풍수문화』 출간!
고려왕조의 풍수가 선불교에 기반한 비보풍수로서 마음을 더욱 강조하였다면 조선의 풍수는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인성풍수로서 사람과 문화의 역할을 상보적으로 강조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조선왕조의 궁궐의 조성동기와 입지, 경관과 배치 그리고 조경 등에 풍수와 관련된 내용을 북궐이자 법궁(法宮) 혹은 정궁(正宮)인 경복궁,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 서궐인 경희궁(경덕궁), 인경궁, 덕수궁(경운궁) 등 총 6대 궁궐의 특징을 답사와 사료를 통해 설명해냈다.
저자

최원석

지은이는한국인들이풍수를어떻게역사적으로실천하고활용했으며,한국풍수의정체와본질은무엇인지에관해줄곧관심을기울였다.이주제를지리학·문화사·인문학의영역으로탐구하면서『도선국사따라걷는우리땅풍수기행』(2000),『한국의풍수와비보』(2004),『사람의지리우리풍수의인문학』(2018)을저술했다.또한한국풍수의실체가산의풍수에있다고보고,산과관련하여탐구하면서『사람의산우리산의인문학』(2014),『산천독법』(2015)도집필했다.이책『조선왕실의풍수문화』는조선왕실의풍수경관을문헌과현장에서통시적으로살핌으로써지은이의연구방향과목적에한걸음더나아가고있다.
서울대학교지리학과를졸업하고같은대학원에서풍수로석사학위를,고려대학교대학원지리학과에서비보풍수로박사학위를받았다.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장을지냈고,지금은경상국립대학교교수로명산문화연구센터장을맡고있다.

목차

여는글004
일러두기019
1부조선왕실풍수문화의전개020
1.조선왕실의풍수실천과태도022
2.조선왕실의풍수제도와운용038
3.인문풍수의지평과미학046

2부권위의장소,궁성054
1.한양의터잡기와풍수비보056
1)왕도와풍수056
2)태조가꿈꾼새도읍지060
3)한양의풍수보완091
2.한양의궁궐과풍수109
1)북궐의풍수111
경복궁111
2)동궐의풍수145
창덕궁145/창경궁155
3)서궐의풍수162
경희궁162/인경궁170

3부생명의터전,태실174
1.조선왕실의태실조성과관리176
1)태실과풍수176
2)왕태실의풍수202
2.역대왕태실209
1)태실의비중이컸던시기:태조부터예종까지211
1대태조태실지211
2대정종태실지217
3대태종태실지220
4대세종태실지223
5대문종태실지230
6대단종태실지236
7대세조태실지242
8대예종태실지245
2)태실의비중이약화된시기:성종부터순종까지248
9대성종태실지248
11대중종태실지253
12대인종태실지257
13대명종태실지262
14대선조태실지265
15대광해군태실지271
18대현종태실지273
19대숙종태실지276
20대경종태실지279
21대영조태실지283
22대정조태실지287
23대순조태실지289
24대헌종태실지294
27대순종태실지297
위치가확인되지않는왕태실지300

4부영속의공간,산릉302
1.조선왕실의산릉조성과관리304
1)산릉과풍수304
2)산릉의조성과관리316
2.역대산릉327
1대건원릉(태조),제릉(신의왕후),정릉(신덕왕후)328
2대후릉(정종·정안왕후)349
3대헌릉(태종·원경왕후)353
4대영릉(세종·소헌왕후)367
5대현릉(문종·현덕왕후)376
6대장릉(단종),사릉(정순왕후)392
7대광릉(세조·정희왕후)404
8대창릉(예종·안순왕후),공릉(장순왕후)411
추존경릉(덕종·소혜왕후)424
9대선릉(성종·정현왕후),순릉(공혜왕후)433
10대연산군,거창군부인묘449
11대정릉(중종),온릉(단경왕후),희릉(장경왕후),
태릉(문정왕후)450
12대효릉(인종·인성왕후)475
13대강릉(명종·인순왕후)480
14대목릉(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486
15대광해군,문성군부인묘503
추존장릉(원종·인헌왕후)505
16대장릉(인조·인렬왕후),휘릉(장렬왕후)515
17대영릉(효종·인선왕후)532
18대숭릉(현종·명성왕후)540
19대명릉(숙종·인현왕후·인원왕후),
익릉(인경왕후)545
20대의릉(경종·선의왕후),혜릉(단의왕후)561
21대원릉(영조·정순왕후),홍릉(정성왕후)572
추존영릉(진종·효순왕후)587
추존융릉(장조·헌경왕후)594
22대건릉(정조·효의왕후)608
23대인릉(순조·순원왕후)618
추존수릉(문조·신정왕후)624
24대경릉(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632
25대예릉(철종·철인왕후)638
26대홍릉(고종·명성황후)643
27대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652

출판사 서평

동아시아와한국의역사통틀어풍수문화가가장번성했던조선왕실
519년을이어온권위장소궁성과태실,산릉을둘러싼
풍수문화의전개를종합적으로고찰한『조선왕실의풍수문화』출간!!

●조선왕조는태조의한양천도부터풍수사상에기초하였으며
조선의국왕들은풍수에대한조예가깊었으며풍수를적극활용하였다.
27대로이어진조선의왕중에서태조,태종,세종,선조,광해군,정조등은풍수에대한믿음이깊거나활용정도가높았던왕으로꼽을수있다.반면에성종과중종등은풍수에대한부정적인인식과태도의일면을보였다.
태조와태종은개성에서한양천도과정만보더라도풍수에대해상당한믿음을가지고있었다.세종때는경복궁명당논쟁,헌릉길폐쇄여부등풍수에관한여러현안이제기되었다.세종은풍수에대한지식이나관심이높아자손들의태실을정비하는데풍수를적극활용했다.그러나정작본인의묏자리는풍수에크게구애받지않았다.그저부왕(父王)인태종곁에묻히면된다고생각하여효성이위주가되어완벽한명당자리가아니라도보완(비보)하면된다고했다.선조는개인적으로풍수를대단히믿었고자신의태실을길지에봉안하기위한애착이컸다.광해군은교하천도가좌절되자경덕궁과인경궁의축조를통해왕권을강화하고자했다.정조는아버지사도세자묘원의이장을목적으로풍수에대한깊은관심을가지고지식을쌓았다.

정조는풍수를독학했으며풍수지식이가장깊었던왕이었다.
“나는인정(人情)이안정된뒤에야풍수[地理]도좋아진다고생각한다(『정조실록』,13년7월11일).”
이한문장이야말로조선왕조실록에담긴정조의조선왕실의풍수에대한가치관을응축하고있다고『조선왕실의풍수문화』에서저자는표현했다.또한저자는조선의국왕가운데풍수에대한가장조예가깊었던한사람으로단연코정조를꼽는다.정조는아버지사도세자의묘인영우원이장을위해독학으로많은풍수책으로공부하여풍수원리를터득하였다.“옛사람이지리를논한여러책을읽고,깊이생각하고탐색하여마침내그종지(宗旨)를얻은듯하였다.”고말한바있다.이러한정조의풍수지식은사도세자의현륭원이장과화성건설에서도발휘됐다.현지의조건을바탕으로꼼꼼하고세밀하게풍수의실행을지휘감독하였다.또한정조는정치적으로사도세자의복권을꾀하고수원지역을개혁의진원지로삼과왕권강화를위해풍수적인핵심요소를활용했다.정조의창의적인풍수안목을두가지로요약하면다음과같다.“첫째,풍수대상의스케일에맞게기준과방법을적용하는식견을갖추고있었다.둘째,형세론과방위론에경중의가치를두고차별적으로인식하였다.”

조선왕조의풍수는고려왕조와달리개인의인성과사회윤리를강조했다.
고려왕조의풍수가선불교에기반한비보풍수로서마음을더욱강조하였다면조선의풍수는성리학의영향을받은인성풍수로서사람과문화의역할을상보적으로강조하였다.또한조선왕조의풍수교과서『지리신법호순신』에,“길흉의조건은땅에서만구할수없으며사람의덕(德)을본받아따른다.”고밝히고있으며저자는길흉이작동하는조건에서사람의덕이주이고땅의풍수는종이라고하였으며인성풍수는“스스로수양하여사람의도리를다하는것에달려있다.”기때문에인성의함양과윤리의실천이중요하고‘땅의길흉은사람의덕을따른다.’라고쓰고있다.따라서세종,정조를비롯한여러왕들은민생을먼저고려하여태실이나산릉(왕릉을비롯한왕실의능)조성을하였다.땅은자연지형이지만명당은풍수경관으로관계를맺는주체들에의해완성되기때문이다.이점은조선왕실의풍수가비보에서벗어나풍수에서말하는길흉의효과를‘덕’과인성으로관장하는내적인장치가되었다.

조선왕실에서풍수는왕권을강화하거나정치권력간의세력다툼에적극활용됐다.
조선왕실에서실행한궁성,태실,산릉의풍수는대규모공사와관리인력이소요되는국가적인대사였다.특히산릉은자리선정과시설조성에있어정치권력과깊은연관성을맺으면서전개되었다.조선왕실에서풍수를실천한것은그결과로서기대하는풍수적소응과효과만으로한정되지않았다.풍수행위는왕권을강화하고드러내는정치사회적인수단으로도적극활용됐다.국왕은궁성과태실,산릉의풍수입지와경관조성을통치자의절대적인권위와위엄을과시하는수단으로썼다.산릉의입지선정과이장과정을둘러싼치열한쟁론은각정치세력간에벌이는주도권다툼이자경합이기도했다.선조당시에,“모두들선왕조때간신들이산릉의일을가지고죄를얽어살육한것만을생각했다.(『선조실록』,33년9월2일)”라고통탄한사관(士官)의표현은,산릉의일이왕실에서어떻게정치적으로이용되었는지를생생하게증언해준다.이렇듯능의풍수를둘러싸고벌어지는정치세력간의다툼은조선왕실풍수정치의독특한한면이다.

●조선왕실은산줄기의주맥파악과보전을중시하며
궁성풍수,태실풍수,산릉풍수세가지유형으로구성하였다
조선전기에는명당풍수론을엄밀하게실천했으며국가대사로한양천도를통해궁성의터잡기와풍수비보,태실조성을하였다.조선왕조초기에한양천도를통한왕도계획과궁궐조성과정에풍수사상이강력한영향력을가졌다.태실풍수는조선왕조초기에는비중이컸으나중후기로갈수록가치와위상이약화되었다.왕릉을비롯한산릉의조성과관리는여전히명당풍수론에따라이루어졌다.
“우리조상께서는나라를세우고도읍을정하는데에지리를살펴서정하시고,백성들의부모를장사지내는데에도반드시산수의지형을보게하였으니,지리가세상에유행된것은예전부터였다.(『세종실록』,15년7월15일)”

새도읍지선정과도성공간조성을위한궁성풍수
조선왕조의궁성풍수는고려왕조와비교했을때지리지식과국토에대한인식의발전,유교사상의인문적합리주의,정교해진풍수이론으로인해당시의사회문화적여러조건과연동되어있었다고저자는밝히고있다.한양천도는풍수가국토환경계획에대한인식의틀로서종합적으로작용한결과이다.또한계룡산도읍지를반대를한하륜같은조선의공간정책을주도했던신하들도국토에대한지리적인식과풍수에대한이론적지식을균형적으로겸비해야했다.풍수담론은새도읍지의풍수입지와경복궁의주산과명당논쟁,창경궁뒷길폐쇄와청계천명당수준설논의등다양한정책적논쟁을유발하기도했다.
한양을도읍지로정해진다음도성공간은세종,문종,세조를거쳐성종에이르기까지조선전기에경관을완성하기위해궁궐로이르는주맥의산줄기비보와궁성의사방산과장풍비보,물줄기비보가집중되었다.특히경복궁터가지닌풍수상의결점인물부족이명당수문제로지적되어궁성주위에못을파고도랑을내서물길을끌어내는시도를했다.청계천명당수의정화문제역시한양의물길비보로서맑은하천유지를위해풍수적인해결책을마련했다.
이책에서저자는조선왕조의궁궐의조성동기와입지,경관과배치그리고조경등에풍수와관련된내용을북궐이자법궁(法宮)혹은정궁(正宮)인경복궁,동궐인창덕궁과창경궁,서궐인경희궁(경덕궁),인경궁,덕수궁(경운궁)등총6대궁궐의특징을답사와사료를통해설명해냈다.

새생명탄생의뿌리를보전하고축원을담은태실풍수
현대에도아이가태어나면제대혈을보관하지만전통시대에는태를새생명의뿌리로소중하게다뤘다.고려에이어조선의왕실에서도풍수길지에태실을조성하여특별관리를했는데조선왕실의출산문화이자풍수문화이다.태를묻는곳을태실이라고하며장차왕이될왕세자나왕세손의태는태실에보관하고왕이된다음태봉이라고하여엄격하게관리하였다.이태실풍수는신라때김유신의태를묻은태실을태령산이라고한기록을미루어보아신라와고려사이에시작되었다고추정한다.중국과일본왕실뿐아니라세계적으로도유래를찾아보기어려운독특한문화이다.조선왕실의태실은총143개소가파악되었는데,평안도와함경도를제외하고각도에분포한다.대부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주로분포하고있다.성종대이후로는경기도와강원도에도태실을조성했고황해도지역에도있었다.지역적으로는경상도가32%로가장많고,경기도25%,충청도16%의순으로나타났다.조선국왕의태실가운데현존하는것은22기가남아있다.이책에서저자는태실풍수의인식과제도적규정,절차와의례,관리,기록에관한내용을조선왕조실록등고문헌과위성사진고지도현장답사사진을통해태실지입지를조감할수있도록했다.

영속의공간이자왕실권위의표상산릉풍수
산릉(山陵)이라는말은조선왕실에서왕과왕비의능을합쳐서부른공식적인용어이다.산지에입지한능이라는지리적인의미도담고있다.조선왕릉은풍수원리로능자리를정하고격식을갖추어경관을구성하고제도적으로관리했다.이러한역사적배경을반영하여2009년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되었다.조선왕릉은한양도성을중심으로북동쪽과북서쪽권역에32기가모여있다.한강은교통의장애물이었기에강너머는입지의제한요인이었다.한강남쪽에는7기의왕릉만있다.산릉에행차하거나관리하는데있어왕궁에서의지리적접근성이중요했다.
조선왕실에서는산릉풍수를정치적권위를높이는상징수단으로활용하였으며유교의효관념과연관되어있다.또한풍수정치의핵심이라할만큼왕릉은단순한왕실의무덤을넘어조선의왕과왕실,왕과신하,종친과신하등정치권력간의역학관계가투영된경관으로조성되었다.
조선왕실의국가예식에관한규정인『국조오례의』에는왕릉의축조와사후관리는풍수의원리로이루어짐을기록해두었다.왕릉의축조과정은산릉도감에서주관했으며능자리를검토후산론(山論)으로풍수적견해를국왕에게보고했으며조성일지를남겼다.산론에는대상지역의검토일,참여인물,평가,풍수적특징등이기록되었으며조선왕실은산릉의그림지도인산릉도도남겼다.
조선왕실의무덤은총119기이며42기는능42기,원13기,묘64기가있다.이책에서는4기의추존능과연산군,광해군포함능44기를분석하였다.조선왕릉의풍수관련사실과개요,왕력,실록의기록,능의조성과이장기록후대의풍수적관리를정리해냈다.대동여지도에나타난능의위치와능의현재위치비교,위성사진으로본조성입지,능의형태와배치,능의풍수적산줄기입지에초점을두고능의풍수에관한상소와논쟁,이장을둘러싼정치적의미등을다루었으며함께저자의견해와답사소회도덧붙였다.

●조선왕실풍수의사회문화적순기능과역기능
긍정적인역할을평가하면,도성과궁궐의환경계획과경관관리에풍수는지속가능한지침으로작용했다.길지에태실을조성함으로써생명의고귀함과가치를높였다.산릉조성을통한죽음의존엄과영속의바람은의례뿐만이아니라장소미학을통해서도철저히구현됐다.
왕실풍수의사회적인역기능도적지않았다.풍수에대한맹신과길지에대한집착으로태실과산릉,궁궐을무리하게조성하거나중건한적도많았다.여러차례의능자리이장은왕실의재정을파탄나게했을뿐만아니라,백성들에게노역을강제해피폐하게했다.산릉의이장을둘러싸고세력간의정쟁이나권력암투의수단으로풍수가악용되기도했다.고려왕실은과다한사찰조성에왕조가기울었고,조선왕실은지나친산릉조성에국력을소모했다.

●일제에의한태실지와태봉의훼손과개발에의한원형상실
조선왕조의태실은일제강점기에모두파헤쳐강제적으로옮겨지면서원형을잃었다.일제는1929년에태실54기를경기도고양의서삼릉구석에공원묘지처럼집단으로모아두었다.태실명당에는지역권력자와친일파들이선조의묘로썼다.그래서조선왕실의태봉유적지는대부분텅비어있고사묘가들어서있다.특히현종의태실지는개발공사로봉우리가깎여나갔으며숙종의태실지는일제강점기에훼손후태실비등석물은흩어지고민간인묘가들어섰다.순종의태실은일제강점기에훼손되어방치되다가태실지가있던태봉산마저공장지로개발되어흔적도없이사라졌다.근래들어지자체에서태실을복원하는곳도있지만훼손되고사라진곳이많다.우리전통문화재의장소적,경관적가치를재평가해야할이유이다.

●우리나라와동아시아풍수문화연구의외길을걸어온저자최원석교수
조선왕실의풍수문화사를궁성,태실,산릉을통해정리해낸저자최원석교수는우리나라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