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 4: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

해방일기 4: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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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역사학자 김기협,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해방일기. 4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 역사학자 김기협이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대장정에 올랐다. 이 책은 시간별로 해방 전후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봉쇄하던 상황 등을 사진과 함께 보여주어 현장감을 더한다. 또한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 등을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해방’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제4권은 1946년 5월 초부터 1946년 8월 말까지,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를 다루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의 아들, 김기협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의 역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고 있다. 지금 사람들 눈에는 ‘별난사람’들의 모습에 가려 그 ‘보통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김구, 이승만, 박헌영 같은 사람들보다 여운형, 김두봉, 김규식, 안재홍, 홍명희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모든 이야기의 끝 부분에는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라는 가상 대담을 배치하여 안재홍을 해방공간의 안내자로 그리고 있다.
저자

김기협

저자 김기협은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1 미소공동위원회 무기 휴회
1946년 5월 2∼ 6일


1946. 5. 2. 협의 자세를 안 갖춘 협의상대’ 신청자들
1946. 5. 3. 미소공위에 배짱으로 임한 미국대표단
1946. 5. 4. 전범재판이 없던 유일한 나라 조선
1946. 5. 6. ‘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북행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소공위 중단책임이 미국에게 있는 거 맞죠”

2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
1946년 5월10∼30일


1946. 5. 10. 조봉암이 한국현대사에 던진 첫 충격
1946. 5. 13. 좌익탄압의 에스컬레이션
1946. 5. 16. 좌익탄압의 절정 ‘정판사 위폐사건’
1946. 5. 17. 해방공간 최대의 위폐범은 미군정
1946. 5. 23. 천안함의 데자뷔 정판사사건
1946. 5. 26. 우리의 수도는 아직도 ‘게이조(京城)’입니다
1946. 5. 27. 한민족의 분단 일본이 벌써 저질러놓은 짓
1946. 5. 30. 폭압적 ‘직접통치’에 나서는 미군정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독립’을 너무 쉽게 생각한 민족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5월

3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
1946년 6월2∼13일


1946. 6. 2. 조선의 일본인과 중국의 조선인
1946. 6. 3. 분단 건국을 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 6. 5. 이승만의 ‘치고빠지기’ 작전
1946. 6. 13. 1946년 여름의 콜레라 사태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만담가 신불출의 ‘국기모독죄’

4 좌우합작 추진
1946년 6월14∼30일


1946. 6. 14. ‘좌우합작’에 임하는 하지의 꿈
1946. 6. 16. 하지에게 하나의 ‘옵션’일 뿐이었던 좌우합작
1946. 6. 17. 법조계를 덮친 양극화의 쓰나미
1946. 6. 20. 김규식의 등장
1946. 6. 21. 유민(流民)의 도시가 된 서울
1946. 6. 22. 북핵문제 장택상에게도 책임이 있다
1946. 6. 24. 좌우합작 불리한 싸움이지만 민족대의를 받드는 싸움
1946. 6. 27. 1946년 여름 이남주민들의 고통
1946. 6. 28. 소련군의 군표와 미군의 군표
1946. 6. 30. 좌우합작 노력에 시동을 걸어준 미군정의 지원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군정 좌우합작에 방해나 안 했으면…….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6월

5 좌우합작 회담과 원칙
1946년 7월 1∼28일


1946. 7. 1. 처음으로 ‘힘’을 가지게 된 중도파
1946. 7. 4. 김일성과 박헌영의 입장차이
1946. 7. 5. 간첩혐의를 불러온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1946. 7. 7. 좌우합작 분위기를 보여준 3의사 국민장
1946. 7. 11. 박헌영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
1946. 7. 12. 언론의 자유에 관심 없던『동아일보』
1946. 7. 14. ‘국대안 파동’의 출발점
1946. 7. 15.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조선
1946. 7. 18. 여운형 습격 역시 극우의 소행이었다
1946. 7. 19. 3상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의 의미는
1946. 7. 21. 이북에서 남녀평등법을 내놓는 동안
1946. 7. 22. 출발선에 선 좌우합작
1946. 7. 25. 박헌영 일당의 좌우합작 좌초 시도
1946. 7. 26.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
1946. 7. 27. 아직도 폭력은 우익의 것
1946. 7. 28. 공산당의 정판사 사건 ‘공판투쟁’ 전략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한탄은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7월

6 해방 1주년을 돌아보다
1946년 8월1∼31일


1946. 8. 1. 종속과 독재의 발판이 된 민족 열등감
1946. 8. 2. 박헌영에게서 해방된 김일성
1946. 8. 4. 대쪽 아나키스트 유림(柳林)을 생각한다
1946. 8. 5. 최고 원로 김철수를 배신한 박헌영
1946. 8. 8. “미군정이 잘한 일이 무엇?” 98퍼센트가 “할 말 없어”
1946. 8. 9. 전평과 대한노총의 경쟁
1946. 8. 11. 경찰과『동아일보』가 꾸민 8·15 공안정국
1946. 8. 12. 해방 1주년의 사회상 오기영의 탄식
1946. 8. 15. 궁지에 빠진 김구
1946. 8. 19. 여운형 “박헌영과는 이제 그만…….”
1946. 8. 22. 잉여물자 ‘차관’에 좋아 날뛰는 이승만
1946. 8. 23. 극렬분자 반동분자 그리고 기회주의자
1946. 8. 24. 박헌영 극좌노선의 뿌리
1946. 8. 29.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사건
1946. 8. 31. 북로당은 왜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좁아지기만 하는 공산당의 길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8월

출판사 서평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년 8월에서 1946년 8월까지 ‘해방 1년’을 4권으로 완성

“역사의식의 결함, 박근혜만의 것인가?”


"역사의식의 결함”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박근혜의 옹호 앞에서 쏟아져 나온 말이다. 김기협은 역사의식의 결함이 박근혜만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역사의식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던 반공독재의 여파에서 아직도 이 사회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사 인식이 진영 논리의 근거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그는 오른쪽으로 굽히거나 왼쪽으로 비틀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한다. 비뚤어진 것 이전에 생각의 분량 자체가 너무 모자란다는 것이다. 해방공간 3년간의 역사를 열 권의 책으로 읽히겠다는 ‘물량공세’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5년 전부터 역사에세이의 새 영역을 열어온 김기협 박사가 2년 전 “3년간의 대장정”으로 선포했던 『해방일기』 집필을 꾸준히 진행해온 결과, 계획된 37개월 중 25개월째 접어들었고,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의 출간으로 1945년 8월에서 1946년 8월까지‘해방 1년’을 4책으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연구자들의 업적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에 따르고자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진영논리를 넘어섬으로써 색안경을 벗어나려는 노력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대선의 향방 속에 한국현대사 논쟁이 격렬하게 부딪히는데도 정작 역사학자들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김기협의 해방공간 대장정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1946년 5월에서 8월까지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이 다루는 기간은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5월에 시작되는 한편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산당 탄압 속에 ‘정판사 위폐사건’이 터진다. 한편 김일성의 북조선분국이 북조선노동당으로 창당되면서 좌익의 주도권이 평양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박헌영은 좁아지기만 하는 극좌 노선을 택한다. 김기협은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가 왜 열세에 빠졌는가?”를 주제의식으로 하여 좌우합작 국면에서 극우, 극좌라는 양 극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쓴 중간파의 과업을 소개한다. 저자는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임을 강조한다.

‘해방 1년’ 완성과 8ㆍ15 광복절 맞이 저자 인터뷰

8ㆍ15 광복절을 앞두고 오늘 하루도 해방일기를 정리하기에 바쁜 김기협 박사께 한 차례 숨을 돌리고 지금까지의 작업, 특히 4권의 책으로 펴낸 그 첫 해방 1년을 돌아볼 것을 부탁하였다.

- 최근 박정희 쿠데타에 대한 박근혜의 몇 차례 언급을 놓고 “역사의식의 결함”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의식의 결함”을 지적하는 이들에 대해 박근혜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라 대꾸하였지요. 저는 두 주장이 다 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3단 논법에 의해 이 나라에는 역사의식의 결함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떤 결함을 가졌는지 일일이 확인해 보지 않더라도 현대 한국인의 역사의식에 결함이 많을 개연성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현대사의 자유로운 연구와 서술이 반공의 굴레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식의 “결함” 정도가 아니라 현대사의 인식 자체가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역사의식의 결함이 박근혜만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 역사의식의 결함이 박근혜만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역사의식의 성장을 위한 학계의 노력은 어떠했습니까?
한국인의 역사인식은 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의 출현을 계기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당시 청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뚜껑을 열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06년 『해전사』의 역사의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펴낸 취지에는 타당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편집자의 정치적 편향성과 지나친 목적의식 때문에 그 가치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역사의식이 진영 논리의 근거로 이용되면서 새누리당 같은 정치세력에서는 역사의식의 성장 자체를 적대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박근혜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곧 “역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 해방일기의 집필이 3년차에 들어섰고 첫 1년의 성과가 이번에 출간한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까지 4권의 책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해방일기』의 구상은 1945년 8월 해방으로부터 1948년 8월 분단건국에 이르기까지 3년간의 사태진행을 65년의 격차를 두고 일기 형태로 정리한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연구자들의 업적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해전사』에 대한 보완의 효과를 바랍니다. 서로 다른 성향과 서술방법을 가진 여러 분야의 많은 필자를 독자들이 하나하나 직접 상대해야 했던 『해전사』와 달리 한 사람의 내레이터가 독자들을 최근의 주요 연구 성과에 안내해 주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과대망상이란 비평을 각오하고 스스로 높여 말하자면 공자가 말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을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작업성과를 소개해 왔습니다. 그 성과들 중에는 많은 독자들이 직접 참고하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서술이 딱딱한 연구서라서, 발행부수가 너무 적어서, 또는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감안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책들이 있습니다. 나는 독자들을 대표해서 그중 해방공간을 제대로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뽑아 독자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하나의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독자들에게 소개해주면 좋았을 연구 성과를 빠뜨린 것이 적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참고한 자료 중에도 내 이해력 부족 때문에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능역과 여건의 한계 속에서나마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는 일관해 왔음을 자부합니다. 무엇보다, 정치적 진영 논리를 넘어섬으로써 색안경을 벗어나려는 노력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낍니다.

- “정치적 진영 논리를 넘어서”의 말씀을 부연 설명해 주신다면?

내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없을 수는 물론 없습니다. 내란음모죄로 고발까지 당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고발한 이들의 색맹 증세 때문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몇 해째 보수주의자 입장을 표방해 왔고. 『해방일기』 작업에서도 굳이 따진다면 보수주의자의 관점을 지켜왔습니다. 단 ‘열린 보수주의자’의 시야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온 것입니다.
박근혜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적기 바라는 것도 보수주의자의 마음입니다. 보수주의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그 안에서 인간의 분수를 찾는 것입니다. 박근혜는 과거에만 매달려 있지 말고 미래를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그것은 보수주의자가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과 무관한 “멋진 신세계”를 꿈꾸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몫입니다.
나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너무 황당한 꿈에 빠져들지 않도록 역사를 생각할 것을 권합니다. 역사에 얽매이기까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약점과 한계,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을 아주 잊어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과거를 가장 크게 상징하는 사람의 하나가 과거를 잊고 미래만 생각하자고 하는 모습은 너무 황당하기만 합니다. 그 아버지 박정희 자신은 역사를 나름대로 중요시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봅니다. 군국주의 일본의 질서를 이 나라에 재현하고 일본제국에 대한 민주국의 역할을 대한민국에서 복원하려 한 것은 아무 역사의식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해방일기 4권』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5.1 ∼ 1946.8.30) 개요


해방공간 3년 중 가장 큰 갈림길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소위 ‘반탁’이 핵심 주제가 되는 시점이었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기간인 1946년 5월에서 8월까지는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라 할 수 있다.
1946년 5월이 되면 상황 전개의 기본 틀이 분명해져 있었다. 외래 세력인 미군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반탁 세력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왼쪽에서는 박헌영 세력이 민주주의인민전선을 중심으로 좌익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 사이에 돈도 조직도 별반 없는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라 할 만한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힘’없는 그들이 ‘중간파’라 불리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내는 사건이 5월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좌우합작’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이 세력 안에서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는 입장에 섰다.
좌우합작을 작동시킨 동력은 미군정이 일으킨 것이었다. 미군정은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사이의 좌우합작을 성공시키면 극우파는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결국 극좌파를 고립시키는 통일전선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좌우합작은 다음 책에서 다루는 4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만 여름 동안에도 좌우합작위원회는 중도 우파의 새로운 입지를 만들어주었고, 좌익 재편 과정에도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했다.
김기협 박사는 이 책에서 중간파의 재평가를 위해‘좌우 대립’ 대신 ‘중극(中極) 대립’의 좌표계를 제시한다. 중간파가 갖지 못한 ‘힘’을 극좌와 극우는 외세로부터 얻었고 중간파가 민심의 지지로부터 얻은 ‘힘’은 외세에 의지한 극단파의 ‘힘’에 압도당했다. ‘중’을 민심의 대표로, ‘극’을 외세의 대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극’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궁핍과 매장,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 중간파 덕분이라 강조한다. 비록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