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라는 유산 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

왕이라는 유산 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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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도덕적 군주상의 수사가 대안이었다"
『왕이라는 유산』은 영조가 유교적 군주상을 이해하고 체현한 과정을 연구한 내용을 담았다. 곧, 18세기 한국사에서 군주상과 국왕, 관료와 백성 사이의 복합성과 변화상을 보여주는 심성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신유학의 군주상은 평범한 사람도 수신을 하면 최고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성인군주의 이상에 기초한다. 영조는 신유학의 성군상에 가장 매혹적인 본보기였으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었다. 이 책에서 김자현 교수(컬럼비아대)는 요순정치론, 탕평정치, 균역법, 사도세자 등 영조와 그 시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탁월하게 안내해줄 뿐 아니라 유교적 수사와 조선시대 정치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아울러 영조와 유일한 아들 사도세자의 관계 악화에 초점을 맞추고, 유교적 군주가 아들을 구할지 왕조를 구할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고뇌와 결부해서 설명한다.
저자

김자현

김자현(金滋炫,JaHyunKimHaboush)은이화여대영문학부를졸업했고,미시간대에서중국문학전공으로석사학위를,컬럼비아대에서한국사전공으로박사학위를받았다.일리노이대교수를거쳐컬럼비아대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교수를지냈다.2011년향년69세로별세하였다.대표저서로박사학위논문을토대로한AHeritageofKings:OneMan’sMonarchyintheConfucianWorld(컬럼비아대출판부,1988,보급판TheConfucianKingshipinKorea,2001)가있고,혜경궁홍씨의『한중록』영역(캘리포니아대출판부,1996)으로1997년문예진흥원의제3회한국문학번역상을받았다.최근유고집으로TheGreatEastAsianWarandtheBirthoftheKoreanNation(컬럼비아대출판부,2016)이나왔다.

목차

보급판서문
인사말
범례
역자범례
서설
1장조선왕조의유교적군주상과왕권
성인군주의이상理想
조선왕조의권위
2장영조의치세:성군상聖君像
중흥
최고위사제
육상궁毓祥宮의제례관
위대한도학자
위대한전범典範
3장영조의통치:군부일체君父一體
정부정책과18세기조선사회
양역良役
양역변통과영조의군부일체론
4장영조의조정:장엄한조화[蕩平]
왜탕평인가
붕당정치에대한환멸
탕평책의탄생
무신란戊申亂
탕평정치
반란의그림자
“과인이곧국가다”
출구모색
세명의충직한신하
5장영조의비극:사도세자
뒤주대왕
영원한희망,요람의희망
창덕궁의두조정
효제,물거품이된희망
“나는그것을하지않았다”
대리청정환수
도피
실록
세자빈홍씨의『한중록』
「이광현일기」
사도세자思悼世子
뒤에남은것들
부록
1.조선왕실계보
2.붕당발전경과표
3.영조·숙종경연교육과정
4.다양한자료의사료적검토와평가

참고문헌
역자발문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종합적으로저자는조선의국왕이도덕적군주상으로인해제약을받았지만왕이단지군주상을구성하는요소로서헌신하는것이아니라자신의다양성을구축했다는점을들어'상호작용적인군주상'이란개념을제안한다.군주상역시왕좌를차지한사람에따라변화했다는것이다.
영조치세중가장유명한주제이자영조의정치와거의동의어가된탕평책에대해김자현교수는“한국학계의탕평론은끊임없이유해하기만한붕당론에대항하여쓰였고,그붕당론은종국에왕조의멸망을이끈타성과혼란에대한책임이있다는가정에서나온것”이...
종합적으로저자는조선의국왕이도덕적군주상으로인해제약을받았지만왕이단지군주상을구성하는요소로서헌신하는것이아니라자신의다양성을구축했다는점을들어'상호작용적인군주상'이란개념을제안한다.군주상역시왕좌를차지한사람에따라변화했다는것이다.
영조치세중가장유명한주제이자영조의정치와거의동의어가된탕평책에대해김자현교수는“한국학계의탕평론은끊임없이유해하기만한붕당론에대항하여쓰였고,그붕당론은종국에왕조의멸망을이끈타성과혼란에대한책임이있다는가정에서나온것”이라하며차라리영조가붕당정치의대안을모색했다고보는것이훨씬유용할것임을지적한다.또한“사도세자는영조의성군상을향한갈망과정당성입증을위한열망을담아내는그릇”이었다며이사건에대해서는극도의주의와종합적인그림이필요함을강조하며사건의실체에다가선다.
김자현교수는마르티나도이힐러(런던대),존던컨(UCLA)과함께서구의한국학2세대의선구적인인물로꼽힌다.중국과조선의비교,사료의발굴과활용,시공을넘나드는빼어난수사력등이책이지닌장점은이화여대에서영문학,미시간대에서중국문학,컬럼비아대에서한국역사를전공한공부이력에서나온것이다.이책은서구한국학연구의입문서로유명하다.미스코리아한국일보로선발되기도하였다.향년69세로별세했다.최근에나온유고집으로TheGreatEastAsianWarandtheBirthoftheKoreanNation(2016컬럼비아대출판부,2018너머북스출간예정)이있다.
조선시대유교적군주상과왕권
조선시대국왕의권위는다른무엇보다도더이상적인유교적군주상의수사에기초했다.성인군주의개념과수사를공유했던중국의황제가천자(天子)로서거의신화적영역에봉인된가운데아무런제재없이스스로성인군주라는수사를자신의이미지에이용할수있었다면조선의왕들은매우다른상황이었다.천자도아니었고제국의통치자도아니었다.환관이나종친,외척등의친위부대도없었다.조선의국왕은조선인민들의대표일뿐이었다.중국의천자와조선의국왕을비교하는저자는무엇보다도조선왕조에서국왕이성스러운수사를독점적으로사용하는것을용인하지않았다고본다.관료사대부또한권력기반과함께유교적유산에대한고유의주장을지녔기때문이었다.따라서조선의왕들이영조처럼성군이라는이상을가지고왕의권위와권력을강화하고자한다면더높은도덕적기대수준을충족해야했다.
저자는왕과관료의치열한경쟁이적어도668년신라의통일부터한국의정치형태로특징지어졌지만유교혁명이었던조선왕조개창이래16세기조정의유교화와더불어최소한수사적으로는도덕적우월성을차지하기위한경쟁이었다고말한다.양측은유교적기준아래에서존재이유를찾아야했다.통치자에대한관료의충성은여전히강조된반면에왕의도덕적조언자로서그들의조언은강력한힘을발휘했다.특히숙종초부터경종말까지50년은조선역사상최악의정치적갈등의시기로영조가물려받은'왕이라는유산'은그야말로취약했고더욱이영조의출생이라는정통성의결함과경종시해혐의앞에서왕의권위와권력을회복할수있는새로운접근방식을찾도록하였다.그대안이곧도덕적군주상의수사였고영조의성학추구가만들어진배경이었다.
전통과최고위사제이자위대한도학자,그리고전범(典範)
영조가사용할수있는것은오직‘덕치’에관한레토릭밖에없었다.성학을추구하는정신,그리고끊임없는노력과진정한헌신을강조하는수사를주도면밀하게고수하는것이영조의이미지구축방식이었다.도덕적권위가가지는힘은관료사대부또한마찬가지였다.붕당간대립이가장극심했던시기조차반대붕당의일원에대한사적인암살기도사례가단한번도없었다는단적인사례처럼이는유교왕정의정치문화였다.그러나덕치로이뤄지는선정은군주에게부여된것이기때문에관료들도인정해야만했다.
영조는최고위사제이자위대한도학자,그리고전범(典範)이었다.의례준수는영조를하늘과백성사이의중재자이자왕조의통치권을전수하는사람으로상징화함으로써그에게유교적군주의위상을부여하였다.가장중요한의례는제례였다.영조는자연신보다는역사와관련된제례에관심을더두었다.의례의의미와효과에대한잠재적손익을확실히파악했던것이다.청과관련된필수의례를엄수할때영조는치밀하고정확하게대처했지만아무런감정도내비치지않았다.대신대보단에명의홍무제와숭정제의합사를관철시키면서당시절대선과같았던재조지은을이용해조선왕실을명의상징적계승자이자문명의수호자로서의위치를관료들에게각인시켰다.명과청에관한위신과권력의상징사용을왕의특권이라는점을확고히하고싶어했던것이다.
영조는중국에서제공한모든기회를향유했지만,중국의계보에서벗어나있는토착왕조의태곳적시조즉,단군,기자와삼국의시조등에제사를지냈지만그의주된관심은정통을이은신라와고려왕조에대한제사였다.조선의독립적이고내적인정통성의상징을찾는데여전히상당히큰관심을기울였던것이다.조선왕조의창업주인태조에게특별한존숭을표했지만선대20명의왕들중선조,인조,효종을특별히예우했다.그들은자신과같이모두성인이되어전혀예기치못한상황에서왕좌에올랐으며,자신도그러한의례의전통에서시작했다는사실을강조하기위해서였다.신료들의많은반대에도사친인숙빈최씨를왕비에준하는위치까지추숭할수있었다.사친에대한추승은영조의출신상의약점을보완하는방법이기도했다.

경연에서왕의역할은잠정적으로이중적이었다.왕은학생이었지만스승도고전에관한한학생이었다.그러므로왕은학문적으로스승과경쟁할수있었다.국왕의스승은두말할필요없이바로임금과국정을함께운영하는신하였다.경연에서누가더성인을잘이해했는지를두고경쟁하고있다는것을관료들이알아챌때쯤엔영조는이미그경기에서훨씬앞서나가고있었다.관료들은시작할때에우세했으나후반전에는단지구경꾼으로조연을맡았을뿐이었다.재위20년부터영조는학생에서군사(君師),즉임금이자스승으로탈바꿈했고,30년부터는스스로성인으로행동했던것이다.
영조는유교적군주에게부여된도덕적요구를감수함으로써군주의권위를되찾으려노력했다.결국영조는성인군주를추구하는데자기생애를바쳤는데,이는한인간으로서사회를어떻게바라보고평가했는지에따른것이기에영조가성학을추구한것은그의사고방식이자동시에시대정신이었다.
유교적통치의수사,영조의군부일체론
최고위사제,학자,전범(典範)과같은다양한역할의주된목표는현실적인정책시행에서관료들에게도덕적우월성을세우는데있었다.이책은영조가사회정책을시행하는데유교적통치의수사를어떻게사용하는지를잘보여준다.영조가판단하기에양역변통(균역법)보다시급한것은없었다.양반은양역(良役)에서면제되었는데,이것이국가의재정을고갈시키고백성에게부담을지우는결과를가져왔다.또한양역문제는양반이단순히면세되었을뿐아니라면세층의절대적인숫자와인구중비율이모두증가하고있었기때문이었다.그러나국왕에게세제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