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후는 누구인가
윤이후는 자가 재경載卿, 호가 지암支菴이며,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이다. 윤이후는 지금껏 그 조부와 아들에 비해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윤선도의 실질적인 계승자로서 해남윤씨 집안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윤선도의 여러 손자들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윤이후 혼자였고, 윤이후 항렬의 모든 이들이 후사를 두지 못하여 윤이후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갔다. 정치나 사회적으로 가문의 가장 큰 울타리가 될 수 있었던 이가 윤이후였고 가문의 미래를 짊어질 이들도 모두 윤이후의 혈통이었기에, 윤선도의 빈자리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는 윤선도의 정치적 유산과 가문의 사업을 이어 받아, 외적으로는 중앙 정계에서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역할 하였고, 내적으로는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집안의 장토를 늘리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말년에는 해남 죽도에 정사를 짓고 은거하여 「일민가逸民歌」라는 가사 문학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윤선도가 보길도에 은거하여 「어부사시사」를 지은 것과 닮아 있다. 그의 삶은 마치 윤선도의 거울과 같았다. 할아버지 윤선도의 문명文名과 아들 윤두서의 화명?名에 가려 있던 윤이후는, 어쩌면 할아버지의 글과 아들의 그림보다 더 소중한 선물을 후대의 우리에게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윤이후의 지암일기』최초의 완역본
하영휘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외 7인이 2013년 11월 번역에 착수한 이래 6년 만에 빛을 보는 이 책은 지난한 공동 작업의 결실이다. 역자들은 마멸이 심한 원본에서 행초로 흘려 쓴 원문을 한 자라도 더 살려 읽기 위해, 그리고 개인의 사적 기록이기에 파악하기 힘든 문맥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번역을 제시하기 위해 오랜 기간 함께 모여 분투했다. 그 가운데 얻은 여러 지식을 토대로 독자가 옛 일기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읽을 수 있게끔 여러 장치를 마련하여 제공하였다.
하루하루를 순차적으로 기록한 편년체 자료로서 개별 사건을 파악하기 어려운 일기의 단점을 고려해, 일기에 담긴 주요 사건을 추려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각 연도별 일기 앞에 설명하고, 중요한 사건의 경우 그 배경이나 맥락을 해설하는 박스를 일기 중간 중간에 배치하였다. 기록이 자세한 만큼 허다한 인물과 지명이 등장하여 자칫 읽는 이가 길을 잃기 쉽기에, 등장인물 및 지명의 정리에도 따로 공을 들였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비중을 따져 고른 180여 명의 인물 소사전을 책 말미에 덧붙이고, 일기에 언급되는 600여 곳의 고지명에 대한 현재 위치(주소)를 책 말미에 제시하였다. 그와 함께 일기의 주요 무대가 되는 해남, 영암, 강진 일대의 자세한 지도도 실었다.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최초 완역본이라는 의의도 크지만, 번역 가운데 이루어진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함께 담아냈다는 측면에서, 단순 번역본을 넘어선 해설서로서의 기능 또한 갖추고 있다.
『지암일기』의 시대_ 대기근과 정쟁으로 얼룩진 환난의 시대
윤이후가 『지암일기』를 쓴 17세기 말은 사회적으로는 혹독한 대기근이 닥치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정점으로 치달은 시대였다. “길을 떠난 후 나주 위로는 보이는 참상이 더욱 심하다. 논 값이 1섬(15말) 혹은 2섬에 불과한 경우가 많고, 사람 값은 1섬에도 못 미친다. 죽은 사람도 이루 셀 수가 없다. 광호촌만 해도 죽은 사람이 70여 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1696년 4월). “5, 6년의 흉년과 작년, 올해의 독한 전염병으로 사람이 많이 죽었다.”(1699년 5월). 길가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강도가 들끓었던 을병대기근(1695~96)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일기는 여실이 보여준다. 심지어 큰 부자였던 윤이후도 양식이 떨어져 걱정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딸린 식객이 많은 데다 오랜 흉년에 의탁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윤이후 또한 기근의 혹독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문을 두드려 구걸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도망친 노비들이 굶주림에 지쳐 스스로 돌아오는 풍경들을 보면 당대의 참혹했던 실상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기사년(1689)에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남인이 득세했지만, 갑술년(1694)에는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아 남인들은 모조리 쫓겨났다. 권대운, 권규, 목내선, 민암, 김덕원, 정유악, 류명천, 류명현, 이의징, 이운징, 이현기 등 당시 남인계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파직되어 해남 부근의 강진, 진도, 고금도, 신지도, 우이도 등지에 유배된 정황이 『지암일기』에 자세히 나온다. 윤이후는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물러나 있기는 하였으나,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인의 선봉에서 서인에 강하게 맞섰던 윤선도의 손자이기도 하고, 한때 그들과 동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방문하거나 자주 편지를 보내 위로하는 한편, 식량과 생필품을 보내며 보살폈다. 일기에는 그들과의 교류 내용이 1694년 5월 10일자에서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기록되어 있다. 갑술환국으로부터 3년 후인 1697년 셋째 아들 종서가 ‘세자 저주 무고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반대당의 끈질긴 공격으로 죽게 되는데, 이 사건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윤이후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이지만 『지암일기』는 당대 중앙 조정 정변의 정황을 다른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는 단서를 무수히 품고 있다.
『지암일기』의 공간_ 간척과 경영 및 풍수와 유람의 공간
조선시대 양반은 유자儒子로서 경세經世의 큰 원칙을 논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실생활에서 토지 경영이나 거래 등 실물 경제를 언급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윤이후는 명문가의 일원으로서 선대로부터 이어진 해남윤씨 가문의 경제력과 그로부터 파생된 독특한 경영 문화를 바탕으로 경영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전원에 묻힌 생활을 추구하는 가운데 ‘간척’과 ‘농업’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여러 사업을 벌였던 이유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윤이후는 은퇴 후 해남 일대 해안과 섬에 제언을 쌓고 그 안을 간척하여 농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언전堰田(제언 내부의 농지)을 조성하는 것은 해남윤씨 집안이 대대로 재산을 증식하는 한 방식이었다. 윤이후는 죽도, 속금도, 두모동의 제언 공사의 전 과정을, 계획 단계에서부터 실행, 사후처리(작인과 마름의 지정)에 이르기까지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제언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은 물막이 작업이었는데, 그 때는 인근 면민과 사찰의 중이 동원되고 관의 허가와 협조 하에서 이루어졌다. 속금도 제언 공사의 경우 동원된 역군만 1,587명, 이들이 평균 2일씩 일해 연인원으로 3,187명이 동원되었다. 적지 않은 지역의 인원이 동원되고 관의 허가가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조선시대 지역 양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간척 공사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공사가 끝난 다음 개간을 거쳐 수확한 곡식을 간척지 마름에게 나누어준 기록 또한 보인다.
죽도는 은퇴 후 윤이후가 둑을 쌓고 초당을 지어 별업으로 삼았던 공간이다. 종래 죽도의 위치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현지답사를 다녀온 역자들의 노력을 통해 죽도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윤이후는 1692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죽도에 제언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야 완료했다. 죽도는 밀물 때는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이 되고 썰물 때는 흘러가는 강물을 발 아래로 굽어보아, ‘호남에는 상대가 없을’ 정도로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윤이후는 그곳에 아담한 초당을 짓고 제방을 쌓아 경지를 만들어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스스로 꿈꿔 온 ‘강호의 삶’의 중심 공간으로서 죽도에 대한 윤이후의 애정은, 그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수많은 운문과 산문 그리고 그곳을 방문한 친우들의 시문까지 포함해 『지암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독자들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죽도의 풍광을 그려볼 수 있다.
윤이후는 해남과 영암 및 강진 일대 명소를 꾸준히 유람하였다. 대흥사, 백련사, 도갑사, 무위사, 미황사 등 큰 절은 물론, 도장사, 합장암, 수도암과 같은 작은 절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사찰뿐만 아니라 강진의 백운동, 영암의 구림 등 지역의 명소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고 시절과 경치를 완상한 기록 또한 많이 보인다. 지역뿐만 아니라 『지암일기』는 서울을 두 차례 오간 기록 그리고 거제를 오간 기록, 총 세 차례에 걸쳐 장거리 여정을 다녀온 기록이 실려 있다. 길을 가는데 만난 사람들과 마주친 풍경, 묵었던 장소, 지역의 특산물, 오가는 데 걸린 시간 등 조선시대 장거리 여행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다채로운 정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특히 해남에서 거제를 오간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는 호남 양반의 영남 유람기로서 그 가치가 뚜렷하다고 하겠다.
『지암일기』의 사람_ 신분을 초월한 교유와 애정으로 기록된 사람들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가족과 친족, 이웃과 노비, 관리와 지역민 등 17세기 해남이란 시공간을 무대로 한 생활 및 친교의 기록이며, 인간관계의 기록이다. 자신의 동정과 부인 및 자식들에 관한 기록은 물론이고, 자기 집에 내왕한 인물과 외출하여 만난 사람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기록했다. 편지의 수발과 그 인편도 기록했는데 특히 세 아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서울 소식과 소문도 담았다.
일기에는 총 25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370여명은 지식 엘리트 계층의 인물(문·무과 급제자 240여명, 사마시 합격자 120여명, 음서직 10여명)이고, 이외 승려(60여명), 노비(250여명), 공인工人, 석수石手, 점쟁이, 풍수장이, 의원, 침의, 재인, 악사, 가수, 화가, 기생, 걸인 등 다양한 하층민들의 생활상이 실려 있다. 윤이후는 가풍에서 비롯한 문화적 소양과 오랜 기간 갈고 닦은 학문적 배경을 토대로, 양반ㆍ평민ㆍ천민을 아우르는 인간에 대한 소박한 관심과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