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

$28.00
Description
중국 연변 조선족 형성사
“두만강 국경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_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원제: Making Borders in Modern East Asia: The Tumen River Demarcation, 1881-1919)는 전반부에서 수십 년에 걸친 두만강 경계 획정을 추적하고, 후반부에는 두만강 너머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과 토지를 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펼친 경쟁의 양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한 이후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될 때까지의 역사가 상세하게 복원된다. 두만강 경계 획정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국경을 정하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이 일어났던 위험한 시기에 ‘간도’라는 변경에서 서로 경쟁했던 여러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주목한다. 이 지대의 땅과 인민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중국의 변경 건설 사업을 촉진했다. 한국은 국가를 잃은 상황에서 간도를 민족 결집의 상징적 공간으로 삼았으며, 일본은 식민사업을 촉발했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후기 제국(late imperial)’의 단계에서 저자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근대’라고 명명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복잡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가 두만강 북안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했다면 쑹녠선의 신작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교류와 소통의 기억을 소환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단절하고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는 민족국가 중심의 분절적 서사는 자칫 충돌과 대립을 필요 이상 강조하기 쉬우며, 두만강이란 변경에서 동아시아의 근대가 태동했던 그 지역사·지구사적 의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형성 과정을 새롭게 선보인 이 책은 국민국가를 초월한 대안적 역사 연구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의 전작으로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2020, 역사비평사)가 있다.
저자

쑹녠선

宋念申
미국UMBC(UniversityofMaryland,BaltimoreCounty)역사학과교수를거쳐현재중국칭화대교수로있다.청조후기와근현대사가운데중국-한국간의변경(邊境),동아시아의초지역적네트워크,역사지리,국제관계등의주제를중심으로연구를진행하고있다.주요저서로『동아시아를발견하다_임진왜란으로시작된한중일의현대』(역사비평사,2020),『发现东亚』(北京:新星出版社,2018),“TheJourneytowards“NoMan’sLand”:InterpretingtheChina-KoreaBorderlandwithinImperialandColonialContexts”(TheJournalofAsianStudies,Vol.76,Issue4,Nov.2017),「在延边发现中国」(『文化纵横』,2016.6)등이있다.

목차

한국어판서문
옮긴이서문

들어가며:사라진비석과실체가불분명한강
동아시아의역사적공간
다변적로컬
지역적차원의로컬
지구적차원의로컬

1장경계를넘다:두만강지역의사회생태학
두만강지역:청의동북대조선의동북
청과조선의초기협상
위기의동아시아,연계망속의두만강

2장왕조의지리학:경계획정의수사
국경회담이전의지리지식
감계:의례적경쟁
청국경형성의연계망
국경지대의지도제작
왕조의변경지리학:이중하와오대징

3장간도만들기:경계를넘나드는사회의유동성
간도의형성
토지소유권,생산관계,민족관계그리고교역
토비:국가와사회의사이

4장변경길들이기:국가권력의침투와국제법
청:내지화와귀화
러시아:철도식민주의와공동행정구역
한국:군사화와영토화
일본:아시아를선도하고만주를정복하고한인을‘보호’하다
국제법의도래:새로운담론

5장다시정의된경계:다층적경쟁
국가·비국가행위자들의경쟁
간도협약을향하여:갈등의세가지층위
공간적상상:나이토코난,송교인그리고신채호

6장다시정의된인민:연변과정체성의정치학
연변사회:새로운발전
일본인이된다는것:식민지의경제와정치
중국인이된다는것:한인의수용과배제
한국인이된다는것:한국너머의민족정치학

맺으며:우리땅,우리민족
목극등비의실종과만주의변화
한국계중국인의정체성
다시그어진경계
경계와역사

에필로그:영화〈두만강〉
감사의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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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서쪽으로압록,동쪽으로토문(土門)”
토문강이송화강인가?해란강인가?아니면두만강인가?

이책은1880년대조·청국경분쟁에앞서세계에서가장오래되었을뿐아니라어쩌면가장안정적인국경인두만강과압록강의분계를표시한비석인1712년(숙종38년)의백두산정계비(중국에서는이를세운청관료이름을따서‘목극등비’라칭한다.)로거슬러올라간다.
숙종36년(강희49년)한범죄사건이양쪽조정의주목을받았다.조선인아홉명이인삼을캐려고압록강을몰래넘어갔다가청나라사람다섯명과마주치자그들을살해하고물건을훔친사건이었다.이월경사건이계기가되어백두산정상동남쪽의어느산마루를압록강과두만강의‘분수령’삼아“서쪽으로압록,동쪽으로토문(土門)”으로경계를정했다.그런데문제가끝난것이아니라오히려시작되었다.문제는토문강이었다.당시압록강은수원지가분명했지만또하나의분계강인두만강은산림의물줄기가복잡하고단속(斷續)적이어서진짜수원을찾기가매우어려웠다.얼마후조선인들은청의목극등이선택한그물줄기가틀렸다는사실을알았다.그물줄기는북쪽으로흐르다가훨씬북쪽에있는아무르강의한지류인송화강으로연결되었던것이다.조선조정은내부에서격론을벌인끝에사소한실수로청을귀찮게하지않기로했다.북경의청조정은이오류를알지못했고국경지대의안보는비교적안정적이었으므로이후어떤청관리도다시조사할일이없었다.
비석이세워지고170년도넘어조선인빈농수천명이두만강을건너만주동남부의황무지를개간하자이모호함은결국공식적인영토분쟁을불러일으켰다.과연토문강이경계인가?그렇다면어느강이실제‘토문강’인가?송화강인가?해란강인가?아니면두만강인가?두만강이라면복잡한물줄기중어느것이그수원인가?이논쟁적인질문을둘러싸고1880년대청과조선사이에영토분쟁이반복되었다.이문제는한국에서는‘간도’라하고중국에서는옌볜(延邊)이라하는두만강북쪽지역의한인이주민에대한통치권이어느나라에귀속되느냐는문제와밀접하게연결되어있었던것인데사안의급박함은러시아의팽창과결부되어있었다.제2차아편전쟁이후러시아는외만주를점령하고두만강하구까지팽창하여연해주에한국인정착민을불러모으기시작했던상황이었다.즉두만강지역(또는만주전체)이이미몇몇신구강대국의싸움터가되어있었던것이다.그리고이논쟁적이고다변적인분계강을둘러싼모순은일본이조선통제를확립한뒤만주를식민화하려던20세기초에청과일본의정치적분쟁으로비화하며장기화했다.

국경의역사적의미가서로다른시대에도똑같았을까?

이책은두만강이한국과중국,러시아의국경선으로확정되기까지의역사적과정을추적한다.1885년의1차국경회담결과양측은두만강이토문강임에동의했으나1887년의2차국경회담에서조선은두만강의가장북쪽물줄기인‘홍토산수’를,청은남쪽‘홍단수’를주장하다가가운데물줄기인‘석을수’를타협안으로제시했으나조선의거부로최종합의에이르지못한채중단되었다.1909년이른바청·일간의‘간도협약’에서청의타협안인석을수를일본이받아들이는대신만주의수많은이권을보장받는대가로경계가획정되었다.(참고로1962/64년북·중간에다시그어진경계선은천지의중앙과홍토산수를거쳐두만강과압록강의물길을연결한것이다.1887년국경회담당시에홍토산수를두만강원류로지목했던조선의주장을이번에중국이수용했다는것을의미할뿐아니라백두산의남쪽부분과천지의절반이상(54.5%)을북한이확보했음을의미한다.)
쑹녠선은수십년에거친국경분쟁의맥락을중국어,한국어,일본어,영어등여러언어로작성된자료를조사하여한중일3국의시점에서이문제를다층적으로설명한다.국경의역사적의미가1712년의정계비설치에서1885-7년의1,2차조·청국경회담,1909년의간도협약까지각기달랐기때문이다.서로다른시대의문제상황을당시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의맥락에서이해하며그전화(轉化)와생성의원인을탐구한다.
일본은러·일전쟁(1904-5)의승리,일본의한국보호국화(1905)를거치면서1907년,두만강국경분쟁에공식적으로개입했다.그리고1907년부터1909년까지의중·일국경협상은1885-7년에있었던조·청간국경협상과비교할때그내용과목적모두달랐다.더이상종번과포용에기초한‘왕조의지리학’차원의경쟁이아니었다.논쟁에서새로운증거제시도없었고현장합동조사도없었다.실제갈등은한국이주민들로구성된사회에서중·일양국의국가건설을둘러싼것이었다.또한그것은수백년전에형성된경계를어떻게국제법과영토국가라는새로운체제에맞게재규정할지를둘러싼담론차원의경쟁이었다.간도분쟁은이제인구와국경을둘러싼청과조선사이의충돌에서중국과일본사이의국가건설경쟁으로국면이전환된것이었다.
쑹녠선은이작은변경지대에서발생한충돌과담판,타협에는심각한지역사·지구사적의의가담겨있다고했다.두만강국경‘만들기’과정은바로동아시아삼국이새롭게건설되는과정이었다.간도사람들이‘국민’으로편입되는과정이동아시아근대국민국가의건설과정과밀접하게연동되어있었기때문이다.간도(연변)는동아시아근대의바로미터였던것이다.

간도를둘러싼갈등은궁극적으로근대국민국가건설을향한경쟁

청은19세기말길림-조선통상국을설립한후아예‘한인무단점거자들을위무’한다는뜻의‘무간국(撫墾局)’이란지방행정기구로전환하며본격적으로이민사회의초기국가건설프로젝트에나섰다.한국(대한제국)은1903년이범윤(친러정권기의관료이범진의동생)을‘간도관리사’로임명했다.이범윤은총5백정을보유하고러시아고문의훈련을받은1천명이넘는병력을확보한뒤그해말간도를한국영토라선포했으나청의압력으로해임되고이후의병장으로반일전선에뛰어들었다.가장눈에띄는것은일본의‘간도파출소’설치였다.1906년영국의동인도회사에상당하는일본의식민지통치기구인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설립된직후설치되었는데행정체계와경찰력의구축,간도의영유권을둘러싼역사학적·고고학적연구를포함한광범위한현지조사,농업실험과교육·위생사업등을전개했는데일본의식민지건설을위한프로젝트였다.이상설이설립하고많은항일활동가를불러들인용정의‘서전서숙’을폐쇄한것도간도파출소였다.
당시간도파출소법률고문이자총무과장이었던시노다지사쿠의이력은주목할만하다.그는1920-30년대이왕직장관으로근무하며일본의검열과왜곡으로심각하게변질되었다고비판받는『조선왕조실록』의마지막두편고종실록과순종실록의편찬을주재했고,1940년대현재서울대의전신이자제국대학의하나였던경성제국대학의총장을지냈다.시노다는간도(시노다의간도는북만주는물론남만주를전부아우르는광범위한지역이었다)를‘무인지대’,즉버려진황무지라주장하는논문은발표하면서중국과한국의영유권을모두부정했는데,공교롭게도이무주지개념이1960-70년대한국에서‘북방영토’에대한향수로되살아난다.한때일본식민주의적담론이었던것이한국민족주의적동기와결합하면서식민주의,제국주의,민족주의사이의상당히역설적인협력사례를형성하게된것이다.
간도(연변)를둘러싼한·중·일의갈등은궁극적으로근대국민국가건설을위한경쟁이었다.일본에게간도는러시아를견제하면서장차만주,몽골,심지어시베리아동부까지정복하려는제국주의의도약판이었다.청은연변을중국동북3성의본보기로간주했다.연변을만주에묶어두지못하는것은곧동북3성전체를중국에묶어둘수없다는것을의미했다.승부에서이기려고각국은군사화에서관료화,인구조사에서치안유지,인프라구축에서공교육과공공의료등에이르기까지다양한‘근대적’국가장치를강화함으로써통치력을강화했다.중·일의변경건설시도들은차별성보다유사성이더많았다.여기에는식민주의,제국주의,민족주의등이모두반영되었다.서로다른시기에여러국가에서도입한이장치들이상호작용하면서이국경지대에서국가권력의힘이빠르게강화되었다.
간도를둘러싼중국과일본의경쟁에서한국인들은전혀침묵하지않았다.다양한정치세력이각자정치적청사진을가진채양국의경쟁에개입했다.일진회는한국근대화의희망을일본에걸었다.또다른다양한세력들은일본을한국불행의원인이라생각했지만그렇다고모두친중국적이지는않았다.실제대립하는두진영에속했던한국인이의식적이든무의식적이든일본이나중국과연합을결성하기는했지만어느쪽도강한한국을재건한다는핵심적인정치적이상을버리지않았다.
이책은청의‘내지화’와일본의‘식민화’,한국의‘독립’이라는세종류의‘탈(脫)변경’의각축전속에서국민,국경,국가,영토등에대한새로운이해가등장했으며,동아시아3국이모두국가와국민을완전히새롭게정의하기시작했다는것을보여준다.경계에서동아시아의근대가창출된것이다.

만주에대한새로운이미지,신채호·나이토코난·송교인

간도협약을전후로두만강북안또는더큰범위에서만주는다양한지정학적관점에따라새롭게정의되었다.이공간을둘러싼경쟁은한국과중국,일본에서엄청난대중적관심을불러일으켰고,세나라의지식인들은만주에대한새로운이미지를적극적으로만들어냈다.이책에서는일본의오리엔탈리즘의선구자나이토코난,국제법을이용한주권수호를역설한중국의송교인,역사를통해민족을수호하고자한신채호등의논의를분석한다.신채호에게역사의주체는국가라기보다는민족이었다.그는‘한민족’의옛영광에대한민족주의적향수를불러일으키려고기존의역사서술을혁명적으로바꾸어한국사의지리적중심을한반도에서만주로옮겼다.그렇게함으로써두만강지역은물론이고그보다훨씬넓은공간을포함하는한국의역사적공간관념을만들어냈다.이책은하나의지리적공간이서로경쟁하는정치적목표에따라어떻게다르게상상되었는지그리고이러한다양한개념이서로모순적임에도어떻게서로영향을미치며서로를규정했는지도설명하고있다.

두만강이만들어낸중국조선족형성의역사

1860년대부터많은조선인들이두만강을넘어청지대아래의만주로들어갔다.초기이주자의대부분은함경도지방출신으로,연이은자연재해로인한기근에도당시조정이이들의남하를통제했기에살아남기위한여정이었다.이들은두만강중류지역즉두만강과그3대북부지류인해란하,부르하통하,가야강에의해조성된부채꼴모양충적평야주변에주로모였다.1880년대수천명이었던것이1910년대말에는한반도남부사람들까지이주해오면서약30만명으로늘었다.중국과일본의한국인과그토지를지배하기위한경쟁속에서도그들은비록하나의통합된집단은아니었지만정치적이든사회적이든각자한국에가장이익이된다고믿었던것을추구했다.
국권피탈로토지와인민이분리되고민족과국가가따로나뉘자간도는‘나라를잃은민족’에게그들의‘상상된공동체’를건설한공간을제공했다.교육하나만놓고보더라도1910년대간도는당시의한국자체보다더‘한국적’장소였다.1919년3월13일이른아침명동학교와다른학교에서온학생과교사들을포함하여한국인약2만명이인근지역에서용정으로모여들었다.3·1운동이‘근대’라는이름이붙는한국민족주의의시대를출범시킨것은사실이지만이‘근대’의시대가실제로는한국국경너머두만강이북의간도에서시작되었다고해도크게틀린말은아닐것이다.
1930년대일본관동군의만주침략으로한국과만주의국경이사실상없어졌을때일본인에이은2등시민의자격으로더많은한국인들이모여들었고1940년대초연변에는이미63만4천명이넘은한국인이터를잡고있었다.만주의한국인들은글자그대로든비유적으로든국경을초월한사람의집단이었다.2차세계대전이후한반도는분단되었고그들은한국계중국인이되었다.이책은두만강국경이만들어낸중국조선족집단형성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