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 걸린 현대사의 ‘생생한’ 기억
“상상하고, 잃어버리고, 발견하고, 만들어내고, 즐기고, 태어난,
…우리 역사, 우리 말”
‘언어 코드’로 잡아낸 현대사 21장면
이 책에는 갖가지 형태로 된 언어가 주제어로 등장한다. 우리가 쓰는 일상어와 유행어,영어,특정 표현,한자,한글 등 ‘협소한 의미의 말’뿐만 아니라, 삐라,국가보안법,근로기준법,저항시,국어사전,한글맞춤법,문법 등 언어를 매개로 구성된 각종 역사적 사건과 지표 등 ‘광의의 말’이 망라돼 있다. 구체적으로는 1945년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삐라 공방전’부터 1970년대 전개된 ‘국어순화운동’까지다. 물론 그 이후 논의된 얘기들이 어떻게 5공화국(1980년 광주를 포함하여)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서술돼 있다.
‘말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 혹은 역사
사실 우리 현대사에서 말(언어)과 역사의 관계는, 말하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의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직후 ‘삐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뿌려주었지만, 그 이후 전개된 상황은 이 상상력과 권리를 뺏고 빼앗기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1945~1948년 미군정이 실시한 ‘문화정치’가 그랬고, 1948년 제주 4?3항쟁이 그랬으며,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최근까지도 이어진 반공이데올로기 때에는 이 투쟁이 극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 사람들은 말을 잃었고, 1970년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분신을 했으며, 김지하는 「오적」을 썼다.
뒤바뀐 말, 뒤바뀐 역사
말이 뒤바뀌면, 역사도 바뀌는 법. 해방으로 ‘말’을 찾는가 했던 우리 민족은, 또다시 미군정에게 말을 빼앗기고, 지배권력의 ‘말싸움’에 눌리고 말았다. 일장기가 있던 자리엔 성조기가 올라갔고, 사람들이 원했던 ‘진실’ 대신 ‘기만’과 ‘위협’의 언어가 판을 쳤다. 심지어 막걸리 한 잔 걸치며 불평했다고, 대통령 사진을 보고 욕했다고 잡아가는 세상이 찾아왔다. 법전과 사전, 책에 나오는 말들조차 사람들을 배반했다. 사람들은 정색하고 말하진 못하고, 기껏해야 비꼬고 야유하고 암시하는 말들만 밖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속에 꾹꾹 눌러담아야 했던 말, 기도 안 차서 돌아도 보지 않은 말, 자신도 모르는 새에 사기당한 말들을 책 속에 담았다.
그래서 나온 형식이 ‘진성서’이다.
막혔던 말문을 여는 역사‘진정서’
진성서란 실제 사정을 털어놓고 말하는 문서 형식이다.
우선 ‘실제 사정’이란 말에서, 실제와 다른 표면상 사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털어놓는다’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야 할 것이 있는데,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솔직하면 안 되었던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울분이 치밀고, 눈물도 나고, 헛웃음도 나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멀지 않은 과거사이기에, 속시원히 털어놓고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 시비를 가릴 건 가리고 털어낼 건 털어버려야 한다. 이제 털어놓을 수 있게 됐으므로…… 그래서 진정서가 됐다.
‘국어’ 만들기, 역사 만들기
우리가 진정할 대상에는 우리말, 곧 국어의 역사도 들어 있다. 근대민족국가의 형성과 국어의 성립은 맥을 같이한다. 사실 이 책이 접근하는 권력은 크게 ‘국가권력’과 ‘언어권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직접 다루는 대신, “근대적 체제화에 개입하는 국가권력의 얼굴을 들춰내고, 다시 근대민족국가의 지평 안에서 이데올로기화되고 언어권력화된 국어의 풍경을 전경화”했다. 이 책의 저자 고길섶은 감히 말한다. “언어는 권력!”이라고.
해방의 언어, 해방의 역사
“우리는 ‘국어’에 어떤 순수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국어의 탄생 뒤에는 엄청난 갈등이 숨겨져 있다.” 반세기 동안 진행된 이 대립과 갈등, 멍에 속에서 언어 선택의 자유는 억압됐고, 마침내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고!” 소리도 못하는 삶이 이어졌다.
저자는 바로 이것이 ‘국어’라는 깰 수 없는 신화였고, 1945~1970년대에 형성된 근대민족언어의 역사이자 풍경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제 그 주술에서 벗어나 국어 이데올로기, 국가 이데올로기를 전복하고, 자유와 해방(의 언어)을 만끽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