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왼손 (이경학 엽서그림)

나의 왼손 (이경학 엽서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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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경학

이경학은 1957년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87년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스물일곱 되던 해, 원인을 알 수 없는 뇌혈관 이상과 척수병변으로 머리와 오른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마비됐다. 왼손잡이 화가에게 더 이상 왼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건 죽음과 같은 선고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선긋기부터 이 악물고 연습한 끝에 오른손으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었다.
대형 캔버스에 맘껏 붓을 휘두르던 그가 택한 건 가로 14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의 엽서. 소소한 일상과 생각을 그림엽서에 담아 지인들에게 보내면서 새로운 소통의 장을 열었다. 팔순이 가까운 아버지가 그의 곁에서 그림 재료들을 일일이 챙겨주고 엽서를 부쳐주었다. 2008년 봄, 20여 년 간 보낸 그림엽서 수백 장 가운데 170여장을 모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는 KBS 제1TV <문화지대>(5월 16일 방영)에 시인 함성호가 진행하는 섹션 ‘함성호의 수작’에 소개되어 많은 시청자들의 감동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홍익대 미대 동문들에 의해 그의 모교인 홍익대학교에서도 다시 개최되었다.
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이경학은 계간 《문학마을》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2006년에는 《허공에 내가 묻어 있다》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청주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걸음으로, 힘차게 그리고 자유롭게!

목차

서문 엽서 한 장의 나비효과
1 부치지 못한 편지
2 풍경은 꼭 흑백사진처럼
3 싱그러운 숫자들
4 하늘이 한 옥타브 높아졌다
5 나의 왼손
6 조용히 사고치는 스타일
발문 10년 전의 약속

출판사 서평

1. 왼손잡이 화가의 오른손 엽서그림 전시회
2008년 5월 중순 청주에서는 조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한 그림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경학 그림엽서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전시회였다. 하필이면 그 작은 ‘엽서’ 그림전이라니! 그렇다, 이 전시회 작가 이경학의 말씀을 빌리자면, “엽서란 한 조각의 마음일 뿐, 세상의 수많은 사물 가운데 이렇다 할 비중이 없는 것일 터이며, 물리적인 질량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엽서 한 장이 어떤 사람의 인생에는 실로 의미 있는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데, 그 어떤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이 전시회의 작가 이경학과 같은 사람일 터이다.
전시회가 개최되기까지의 사연은 꼭 십년 전, 그러니까 화가 이경학이 대전고등학교 졸업 20주년이 되던 1998년 봄으로까지 거슬러 오른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해 봄은 우리 사회 전체가 외환위기로 몸살을 앓으면서 젊은 가장들을 거리로 내몰던 시절이었다. 이경학은 성치 않은 몸으로 기념식장에 나와서 직장을 잃고 힘들어 하는 친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했다. 휠체어에 탄 채 단상으로 들려 올라간 그는 성하게 남아 있는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들고서 축시를 낭송했으며, 이렇게 오른손밖에 남지 않은 자신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데,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좌절하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부탁과 아울러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야기했다.
당시 그의 희망은, 오른손으로밖에는 그릴 수 없는 그림의 크기인 엽서로나마 친구와 지인들에게 축하와 격려와 위안의 마음을 실어 보내어 먼 훗날 그것들을 한데 모아 자그마한 규모나마 전시회를 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0주년이 되는 올 봄에 이경학의 엽서그림을 받았던 그때의 친구들은 드디어 이 왼손잡이 화가의 오른손 엽서그림 전시회를 열어 ‘10년 전의 약속’을 지켰다.

2. 지은이 이경학
《나의 왼손》의 지은이 화가 이경학은 1957년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87년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스물일곱 되던 해, 원인을 알 수 없는 뇌혈관 이상과 척수병변으로 머리와 오른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마비됐다. 왼손잡이 화가에게 더 이상 왼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건 죽음과 같은 선고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선긋기부터 이 악물고 연습한 끝에 오른손으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었다.
대형 캔버스에 맘껏 붓을 휘두르던 그가 택한 건 가로 14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의 엽서. 소소한 일상과 생각을 그림엽서에 담아 지인들에게 보내면서 새로운 소통의 장을 열었다. 팔순이 가까운 아버지가 그의 곁에서 그림 재료들을 일일이 챙겨주고 엽서를 부쳐주었다. 2008년 봄, 20여 년 간 보낸 그림엽서 수백 장 가운데 170여장을 모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는 KBS 제1TV <문화지대>(5월 16일 방영)에 시인 함성호가 진행하는 섹션 ‘함성호의 수작’에 소개되어 많은 시청자들의 감동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홍익대 미대 동문들에 의해 그의 모교인 홍익대학교에서도 다시 개최되었다.
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이경학은 계간 《문학마을》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2006년에는 《허공에 내가 묻어 있다》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청주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걸음으로, 힘차게 그리고 자유롭게!

3. 엽서 그림의 의미
왼손잡이였던 화가가 오른손과 머리를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을 병마에게 전당잡힌 후, 그는 작은 엽서가 마련해 준 화폭에다가 세상에 전하고픈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사랑과 우정의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왼손잡이에게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상황은 화가를 힘들게는 만들었을지언정 그에게서 그림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의 인고와 피나는 노력 끝에 이경학의 오른손은 왼손 못지않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날선 칼처럼 매서웠던 붓끝은 이제 세월과 성찰의 무게를 동반한 예술적 환희와 고뇌로 다듬어져 많이 부드러워졌으며, 그림의 깊이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림엽서 만들기는 이경학에게 소박한 창작의 즐거움을 넘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 확인의 장이 되었다. 그렇게 자신의 전 존재와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보낸 엽서가 어언간 수백 장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를 받았던 이들이 잘 간직하였다가 다시 한데 모아서 앞서 말한 엽서그림 전시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신변잡담처럼 했던 ‘10년 전의 약속’을 질기게 품고 있던 이경학의 친구 류춘호(홍익대 경영학과) 교수가 억척스레 저 전시회의 일을 추진했고, 홍익대 미대에서 동문수학했던 친구와 선후배들이 실무를 맡아 자기 전시회를 하듯 발 벗고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처럼 《나의 왼손》은 한 예술가의 끝나지 않은 예술적 혼과 존재 확인의 기록이자 헌신적인 가족들의 성원과 사랑의 결실이며, 또한 친구와 선후배들의 변함없는 우정과 신뢰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아,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병마가 예술가의 몸을 점령하기 전까지 이경학은 전도유망한 화가이자 수재였고, 지금도 그의 친구들은 그를 천재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대전고등학교 시절에는 연대장을 지내면서 음악과 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또한 대학 시절에는 스킨 스쿠버를 포함한 거의 모든 운동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러한 젊은이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병마와 그로 인해 자신의 몸속에 갇히게 된 한 예술적 영혼의 고독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설 것이다. 당연히 자살 기도가 뒤따랐고,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의해 자살을 포기하기까지에는 꽤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젊은 화가는 끝내 그 모진 시간과 세월의 풍화를 이겨냈다.
이경학이 다시 그림을 시작하기까지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밑바탕이 되었다. 앞날이 구만리 같은 3대독자 아들에게 병마가 닥치자 아버지는 자신이 경영하던 사업체를 몽땅 정리하고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자식을 위해 낯선 독일 땅으로 달려갔다. 이후 3년 동안 독일의 모든 병원을 돌아다니며 아버지는 아들의 회복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병명은 뇌혈관 질환으로 알려졌지만, 의사들도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었다. 수술 권유를 받았으나 90%의 사망 가능성을 놓고 고민 끝에 아버지는 이런 상태로나마 살아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수술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 후 아버지는 25년간 단 한 번도 직장을 가지지 않은 채 오로지 아들의 병수발을 위해 전념했다. 전혀 운신을 할 수 없는 아들을 위해 그림을 그릴 때는 언제나 곁에서 화구나 물감을 챙겨주고, 또 간혹 아들의 동창 모임이 있을 때에는 당신 손수 휠체어에 아들을 태워 이동시켜주고 모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집으로 데려오는 등 아들의 수족 노릇을 해왔다. 지금도 이 아버지 없이는 이경학은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문조차 열어줄 수가 없는 형편인 터이다.

5. 화가의 일상
하루를 25시간으로 쪼개도 이경학에겐 늘 시간이 모자란다. 아침 7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한다. 인터넷 서핑도 하며 부단히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다보면 보통 새벽 2-3시에 잠자리에 든다. 그러니, ‘하루 종일 누워있으니 얼마나 따분할까’라는 일반 사람들의 통념은 여지없이 깨어지는 셈이다. 바쁘다. 이경학의 입에서 바쁘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바쁘다’는 말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들은 가을볕에 이불 말리듯 가뿐하게 날아가 버린다. 이경학은 그야말로 바쁘면서도 생의 의미를 놓치지 않는 열정적인 예술가이자 건실한 생활인인 것이다.
이경학의 방에는 컴퓨터, 원고지, 붓, 기타, 보내야 할 엽서와 몇 십 년 동안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낡은 의자, 그리고 그의 왼손이 아닌 다른 손이 닿을 만한 네 모서리의 책상이 있다. 그는 바쁘다. 거기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곡을 쓴다. 하루 종일 그가 네 모서리의 책상과 낡은 의자에서 벌이는 작업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상대적으로 그의 방에는 바쁜 그의 일상에서 소외된 침대가 있다. 소외된 침대가 이경학의 몸을 받아주는 시간은 언제나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 다 되어서다. 거기서 그는 상상하고, 생각하며, 꿈을 꾼다. 그 시간에도 침대는 이경학에게서 소외되어 있다.

6. ‘나의 왼손’에서 ‘나의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은 모진 병마와 싸운 25여년을 한결같은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온 이경학의 예술과 삶을 오롯이 담고 있다. 아울러 그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의 옆을 지키면서 손과 발이 되어 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안타까움과 염원도 함께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경학의 그림과 시 속에 나타난 마음의 풍경은 절망과 실의 속에서도 끝내 희망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불의에 닥친 병마의 고통과 그로인한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생명의 존귀함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으로 감동적인 예술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삶의 쓸쓸함과 비애가 깊게 배어있다 할지라도, 이경학의 그림과 글은 가족이나 주위 친지 및 친구들의 삶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해 있다. 최근에는 새롭게 장편소설을 시도하는 등 그는 자신의 삶을 부단히 변화,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왼손》은 한 불우한 화가의 꺼지지 않는 예술혼과 인간 삶의 승리를 보여주는 지울 수 없는 증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