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爲堂)정인보(鄭寅普)의《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조선사연구》는1935년1월1일부터1년7개월간〈오천년간조선의얼〉이란제목으로《동아일보》에연재되었던국학자정인보의한국고대사저술이다.저자인위당(爲堂)정인보(鄭寅普:1893~1950)는대대로조정에출사(出仕)한집안내력과조선양명학을대표하는‘강화학파(江華學派)’의영향으로오랜기간유가경전과제자백가를위시하여불교,역사,언어,민속등다양한분야의서적을섭렵하여‘한국학의독보적인거성’으로추앙받은학자였다.그는일제강점기인1923년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전임교수를맡은이래주로한문학과양명학등사상사방면의강의,연구에주력하면서《조선고서해제(朝鮮古書解題)》(1931)《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1933)등관련저술들을차례로선보이는한편정약용(丁若鏞)의《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등선인들의문집편찬을주도하기도하였다.동양의전통적인지식인들이그랬던것처럼그는문,사,철(文史哲)에두루관심을가지고또그경계를넘나드는글쓰기를즐겼으며우리역사또한깊이연구하였다.
위당의역사연구참여와《조선사연구》저술의배경
위당은1915년쯤에상해에서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를처음만난이래직ㆍ간접적으로교류를가지면서그의고대사연구에지지를보내고그자신역시단군조선(檀君朝鮮)의실재,고조선(古朝鮮)및한사군(漢四郡)의위치,전삼한과후삼한에대한이원적접근,낙랑(樂浪)유물의진위여부,백제의요동진출등에대한고증,연구를통하여그역사주장들을계승ㆍ발전시키는데에적극적이었다.
당시일본의관변역사학자와그들과‘맞장구’를쳐대는국내식민사학자들은한일합병직후부터식민통치의정당성을확보하기위해구관제도조사(舊慣制度調査),고적조사(古蹟調査),고전복간(古典復刊)등의사업을펼치는등식민사관에입각하여한국고대사를멋대로재단하고왜곡ㆍ조작함으로써한민족의역사와‘얼’을말살하기에바빴다.1913년일제의고적조사단이평남용강군해운면에서이른바‘점제현신사비(신蟬縣神祠碑)’를발굴하자당시일본인식민사학자금서룡(今西龍,이마니시류)이“해당비의발굴은한사군이한반도안에있었다는증거”라고강변한일도이같은맥락에서이해할수있다.
1915년3월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펴낸《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는일제에의한역사조작과왜곡의결정판이었다.자신들이멋대로개발해낸식민사관에힘입은식민사학자들은몇년후평양을낙랑군의치소로단정하고그후부터공공연히한민족의역사를타율ㆍ정체ㆍ당파적인폐습의본보기로선전하고나섰다.당시일제의조선사왜곡과음모들에대한위당의심경은다음의술회를통하여짐작할수있다.
나는국사를연구하던사람이아니었다.어렸을때부터내선친께서늘“우리나라역사책을좀잘보아두어라.남의것은공부하면서내일은너무들모르더라”라고말씀하셨건만다른노릇에팔려많은세월을허비하였다.그러다가어느해인가우연히일인들이《조선고적도보》랍시고낸‘첫책’을보게되었는데그속장두세쪽을넘기기도전에벌써‘분’이터지면서“이건가만히내버려둬서는안되겠구나”하는생각을가지게되었다.또어느해인가는일인들이이른바“한일병합몇주년”이랍시고《경성일보(京城日報)》인지《매일신보(每日申報)》인지에다기념호를내었는데거기에이른바‘점제비(점蟬碑)’사진이최근몇년내의대표적인대사건의하나로올라왔다.……그것을보고나는일본학자들의조선사에대한고증이라는것이저들의총독정책과얼마나밀접한관계가있는지더욱깊이깨닫게되었으며그들의음모를“언제든지깡그리부셔버리리라”라고다짐하게되었다.
위당은그일련의날조극들이조선사를왜곡ㆍ조작하려는일제의식민정책과밀접한관계가있다는판단에따라1935년1월1일을기하여《동아일보》에〈오천년간조선의얼〉이라는제목으로한민족의역사를소개하는글을연재하게된다.이연재물은원래단군조선으로부터이씨조선까지5,000년을관통하는한민족의역사를전부개괄한다는야심찬계획에따라1년7개월동안총282회에걸쳐계속되었다.그러나일제가‘일장기말쇄사건’을빌미로민족운동을탄압하면서1936년8월29일《동아일보》는강제로정간되고〈오천년간조선의얼〉의연재역시중단되고말았다.
《조선사연구》의선행판본
위당이동아일보에연재한〈오천년간조선의얼〉이독자들에게다시선을보인것은민족해방을맞은후였다.1946년《서울신문》에서는위당의동의를얻어1년7개월동안연재되었던내용을단행본으로묶어《조선사연구》라는제목으로출간했고(이하‘서울본’)당시“많은사람들의관심속에두루읽혔다.”
1983년10월31일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는《담원정인보전집(담園鄭寅普全集)》(전6권)을간행하면서《조선사연구》(이하‘연세본’)의상ㆍ하권을해당전집의제3권과제4권으로출간하였다.
《조선사연구》에나타난위당의‘얼’역사관
위당은《조선사연구》의서문격인제1장〈서론〉에서고조선역사연구의근본을단군조선이래로5,000년간면면히이어져온‘얼’에서찾고한민족의역사는바로이‘얼’의역사임을강조했으며‘국학(國學)’이라는말을처음으로사용하면서국학연구의기초를실학(實學)에서찾았다.
그는이‘얼’이야말로주체적인자아이자보편적인인간존재의‘고도리(가장중요한본질)’이며빈것과찬것,참과거짓을판단하는가치의척도라고보았다.
위당은역사연구를이같은보편타당한진리이자가치로서의‘얼’을탐구하는과정으로인식하고5,000년한민족의역사에서민족의‘얼’을찾아내고가려내어외세로부터자아를지킬역량으로승화시켜야하며그낱낱의역사적자취들을탐구하여역사의골간을이루는얼의큰줄기를찾는것이역사학자의소명이라고보았다.그의‘얼’사관은“동시대에서유럽의역사발전법칙을한국사에기계적으로적용한사회경제사학이나,민족정신과신념을도외시하고개개의사실규명에치중한실증주의사학과좋은대조를이루고있다.”
위당은이같은인식에따라《조선사연구》에서한국의역사를한민족과이민족의투쟁을중심으로인식ㆍ기술하면서그투쟁의역사속에서의연히살아있는민족의‘얼’을찾으려했고,또일제의타율성론을타파하기위한애국적,민족적목표를가지고한국고대사연구를실천으로옮겼던것이다.나라를빼앗겨도정신만굳게지키면언젠가는국권을회복할수있다고역설하는이러한역사관은어떤의미에서는박은식(朴殷植)의‘국혼(國魂)’,신채호의‘낭가사상(郞家思想)’,문일평(文一平)의‘조선심(朝鮮心)’등의민족주의정신사관과도일맥으로상통하고있다.
위당의역사접근방법
①문헌고증에는정조(正祖)시대이래로조선실학이사용해온훈고학적방법론을원용하고②기존의전쟁사,교섭사중심의역사접근에만머물지않고사회,풍속,언어,문예전반에까지시야를넓혔다.
③자신의해박한학식과현지답사의경험을무기로삼아단순한문헌고증으로그치지않고언어학,지리학,금석학적분석까지병행함으로써보다객관적이고다각적인검증을지향함으로써초기민족사학의한계를극복하고자노력하였다.
④문헌고증에사용되는사료는선택과정에서부터각별한주의를기울여야사,소설등허구성이강한문헌자료들은지양하는반면정사,지리지등공신력이높은사료들을주로활용함으로써고증의객관성,엄정성을확보하고자하였다.
⑤‘실증주의’를전가의보도처럼떠드는식민사학자들의도발을회피하지않고당대의어느학자보다도치열한열정과노력으로문헌고증에최선을다하였다.《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삼국사기(三國史記)》등역대국내외사서와문집들은물론이고멀게는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증국번(曾國藩)등의명ㆍ청대학자들로부터가깝게는양계초(梁啓超),장병린(章炳麟)등의당대학자들에이르기까지다양한학자들의“줄잡아130여종류가넘는”방대한저술과주장들을고증에서활용하고,출전(出典)도확실히밝히는등마무리에까지각별한신경을쓴것은그같은노력의일환이었다.
위당사학(史學)의치밀한문헌고증과유물검증
위당은약1년7개월동안〈오천년간조선의얼〉을연재하면서단재에의하여처음제기되었던주요한역사주장들,즉
①고대사인식체계를기존의‘단군-기자-위만/삼한’이아니라‘고조선-부여-고구려’구도로이해한점,
②중국사서의주신(州愼),숙신(肅愼),직신(稷愼),식신(息愼)을‘조선’과동일한이름으로이해한점,
③권람(權擥),홍여하(洪汝河),신경준(申景濬),이익(李瀷)등의학맥을이어고조선의강역과‘한사군(漢四郡)’의소재를한반도가아닌요동(遼東)지역으로파악한점,
④한나라무제[漢武帝]를전후하여예맥조선(濊貊朝鮮)과위만조선(衛滿朝鮮)2개의조선이병립했다고본점,
⑤고조선여러겨레들의언어가서로일치하고통했다고본점,
⑥‘북삼한(北三韓)’이고조선의해체로한반도로남하하여‘남삼한(南三韓)’을이루었다고본점,
⑦백제의요서(遼西)경략을주장한점등에대한논의를발전시키는한편,거기서더나아가그주장들을실증적으로뒷받침하는데에매진하였다.
《조선사연구》에서위당이분석,고증에주력한쟁점들은
①단군의위상문제:
위당은첫장을열면서“조선의시조단군은신이아니라인간이었다”라고선언하였다.그의이선언은일제의단군조선부정론(檀君朝鮮否定論)에대항하기위한것으로신화의영역에머물러있던단군(조선)을역사의범주로귀속시켜본격적인역사연구의대상으로재인식하였다.그는‘단군’이특정인의이름이아니라‘천제의아들[天帝子]’에비견되는최고통치자에대한존호이며,그‘역년(歷年)’역시특정인의생물학적수명이아니라해당왕조전체의존속기간을가리킨다고해석하였다.
②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부정:
위당은기자의무덤이박현(薄縣),몽현(蒙縣)등중국하남성(河南省)에있음을근거로기자가조선으로건너왔다는기자동래설을정면으로부정했으며,기자가주나라무왕[周武王]의책봉을받아들여‘조선후(朝鮮侯)’가되고주나라에입조했다는《사기》의기자책봉설(箕子冊封說)에대해서는은(殷)나라에대한절개를목숨보다도무겁게여겼던기자의위인이나원수의나라인주나라와모든관계를끊고떠난기자가그먼거리를다시되돌아갔다는말자체가앞뒤가맞지않는다고보았다.
그는이같은주장들자체가《사기》나기타중국문헌들의사료로서의공신력을의심하게만드는일이라고보았다.조선의도읍왕검성(王儉城)에대해서는지금의평양이아니라요동군의험독(險瀆),즉지금의요녕성(遼寧城)해성현(海城縣)으로비정하였다.
③삼한의성격:
‘삼한(三韓)’은지명이아니라‘한(汗)’이나 ‘간(干)’처럼‘크다’또는‘임금’이라는뜻을가진일종의존호이며이것을지명으로오해하여고조선과별개의정치세력으로봄은잘못이라하였다.
④요수난하설(遼水난河說):
위당은중국사서에등장하는‘요수(遼水)’를지금의하북성영평(永平)일대를흐르는난하(난河)로비정하였다.위당의이같은‘요수난하설’은1960년대에북한의역사학자리지린에의하여보다구체적인형태로보충,개진되었다.
⑤한사군설치시점및위치:
위당은《사기》,《한서》,《후한서》등의기록검토를통하여원봉(元鳳)6년(기원전111)이전에낙랑(樂浪),현토(玄토),임둔(臨屯)3개군이먼저설치된뒤를이어진번(眞番)이설치되었으며,그위치역시진번은대릉하(大凌河)부근,임둔은초자하(哨子河)인근,현토는우북평(右北京)부근으로모두가한반도너머에있었으며낙랑도그치소를요동의험독이었다고주장하였다.위당은관할지역이수시로변동되었던한사군은고정된땅을안정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