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연구(하) (오천 년간 조선의 얼)

조선사연구(하) (오천 년간 조선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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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국학총서」제3권『조선사연구』하권. 1935년 1월 1일부터 1년 7개월간 《오천 년간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국학자 정인보의 글을 엮은 책이다. 조선사를 왜곡·조작하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맞서, 단군조선부터 조선왕조까지 5,000년 한민족 역사의 흐름을 개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위당 정인보는 이 책에서 고조선 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선 이래로 5,000년간 면면히 이어져 온 ‘얼’의 역사에서 찾는다. 한국의 역사를 한민족과 이민족의 투쟁 중심으로 인식하고 기술하며, 그 투쟁의 역사 속에 의연히 살아 있는 민족의 ‘얼’의 가치와 효용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위당의 ‘얼’ 역사관은 일제의 탄압과 역사 왜곡이 극단으로 치닫던 1930년대에 민족주의 역사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저자

정인보

저자정인보(鄭寅普,1893~1950)는근대국학자,민족사학자,독립운동가,시조시인,언론인,정치인.본관은동래,호는담원(?園),위당(爲堂).1893년서울출생.한학수학후1910년조선강화학파의거두난곡(蘭谷)이건방(李建芳)의제자가되었다.1910~1914년중국안동,봉천,서간도,상해등을수시로다니며신규식,박은식,신채호,김규식,문일평,홍명희등과교유.독립운동비밀결사조직인동제사(同濟社)에가입하였다.1920년대연희전문교수와동아일보,시대일보논설위원으로활발한저술활동벌였다.1930년대독립운동의일환으로역사학연구에몰두하였다.일제식민사학자들의우리고대사왜곡과말살에분노,1935년~1936년동아일보에「오천년간조선의얼」제목으로우리역사를집필,연재하였다.위당은고조선의전역사를우리민족사로체계화하였으며,단재(신채호)사학을계승,발전시켰다.해방후국학대학초대학장,대한민국초대감찰위원장을지냈다.삼일절,광복절,개천절,제헌절등주요국경절의노래말을지어주신분이다.1950년6.25동란으로납북.1990년대한민국건국훈장독립장을추서하였다.저서:《조선고서해제》(1931),《양명학연론》(1933),《조선사연구상하권》(1946-1947),《담원시조집》(1948),《담원국학산고》(1955),《담원문록》(1967),《담원정인보전집》(1983),《담원문록(번역본)》(2006).

목차

「우리국학총서(國學叢書)」를펴내며
해제
일러두기
17.기루왕이후백제와신라
1.장령,사도의방어시설
1)장령(長嶺)2)사도(沙道)
2.신라의지속적인내치정비와사치금지령
1)징병2)군사편제3)병기관리
3.이때의백제
1)양국의장단점과그원인2)나·제충돌의재개
3)나·제의거듭된공방과수시로뒤바뀌는승부
4)말갈의침입을제지5)고이왕의법제개혁
18.명림답부의반정
1.고구려태조대왕의양위와차대왕의폭정
1)직언자의수난2)태조대왕의변함없는우애3)왕위선양
2.요해(遼海)의정세변화
1)국경방어선의후퇴2)강성해지는선비(鮮卑)세력
3)백성들의폐위운동
19.고구려의부흥
1.요동출병과좌원(坐原)대첩
1)요동출병2)좌원싸움의경과
2.고국천왕(故國川王)의치적
1)국경을침범한공손도의군사를대파하다
2)세습귀족제도의붕괴와을파소의등용3)진대법의시행
3.발기의자결
1)고국천왕의국상과왕위계승문제2)발기의원군요청과자결
20.수많은전쟁속에개척된강토
1.동천(東川)의왕위계승
1)동천왕의생장과그사람됨
2.활발한대외정벌과복잡한외교관계
1)동천왕초기의국력2)요동토벌과위,오와의교류
3.위나라관구검의약탈
1)서안평싸움과그관계2)낙랑국통치문제
3)대격돌을앞둔양측의준비와부여의국론분열
4)비류수,양맥곡에서의위군의연전연패
5)동천왕의몽진과유유의살신구국
4.반도내의한인세력제거
1)과거의정세2)백제의요해기습3)고구려와백제의협공
5.평양천도와동천왕의붕어
1)대동강위에세워진또다른왕성2)9월의국상
6.고구려의성진(城鎭)확대와잇따르는외란
21.요해수복
1.첫단계의현토토벌
1)미천왕의왕위계승2)전쟁의시작
2.점차수복되는옛강역
1)서안평수복2)낙랑,대방두군의수복
3)극성출병4)난하부근에서잇따르는충돌
22.백제의해상진출
1.요서패권쟁탈전
1)책계왕과분서왕의전사2)산동의백제유적
3)녹산에서의부여습격4)모용씨와의전쟁5)비류왕의즉위
2.요서에‘진평’군을두다
1)모용,우문,단료의각축속에점차확장되는백제의영토
2)전쟁속에도이어지는통상
23.고구려와모용연
1.의도된화친과석조와의제휴
2.북부의피습
1)고국원왕이후의국력2)북도(北都)와우문씨의관계
3)모용연의침입4)무의북도대첩과모용황의창황한퇴각
3.볼모들의복수
1)고구려의볼모2)이후의고구려와부진의관계
24.아아,대외진출이내부분쟁으로
1.고구려의남도(南都)와백제
1)고구려와백제의대립2)남도에집중하다
2.치양(雉壤)싸움에서평양공방전까지
1)전쟁의서막2)고구려군의연패와고국원왕의전사
3)백제의한수이북으로의천도
25.신라의내정과외치
1.어진임금의왕위계승
2.심화되는정치개혁
1)국법적용에는친소와귀천을따지지않다
2)화백전통의제도적확충3)관리의임용
4)중농정책의지속5)호민(豪民)과외래민호의정착
3.신라의해상방위
1)‘동우(東憂)’의시작2)각간우로의죽음
3)유례왕의일본정벌4)변방의성들
5)강세(康世)의농성과내물왕의섬멸전
26.고구려의패업과영락태왕
1.고국원왕전쟁이후의국내외정세와상호관계
1)거란의당시위치2)후연(後燕)의두도읍화룡과계의위치
2.고구려군의서진과부여회복군의동진
3.신라와의관계회복
4.영락연간의업적
1)즉위와연호사용2)사방으로펼쳐진정벌
3)관미성정벌과그위치4)거란토벌의장거(壯擧)
27.전고갑(典故甲)
1.종교와학문에관한전고들
1)우리겨레공통의종교와그종지2)학관(學官)제도와학교시설
2.제사에관한전고들
1)천제(天祭)2)국사(國社)와산천3)시조묘
3.예문(藝文)에관한전고들
1)저술과문헌2)문자
3)문자의발전단계4)과연누가그렸을까
4.불교에관한전고들
1)부진과의교류와불교수용2)백제불교와인도승려마라난타
3)도랑(道朗)의삼론종(三論宗)확립
부록1.조선사연구부언(附言)
「부언의서두」
1.정무론(正誣論)상편2.정무론(正誣論)중편
3.정무론(正誣論)하편4.정무론원문
「부언의결어(結語)」
「부언에다시덧붙임(附言補遺)」
부록2.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부록3.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
부록4.태대형,대형,소형에관하여

쉽게풀이한《조선사연구》뒤에
번역을마치면서
위당선생연보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위당(爲堂)정인보(鄭寅普)의《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한글역주본완간

1.《조선사연구》하권의체제상의특징


하권에서는1936년「동아일보」의일장기말쇄사건으로위당선생이‘오천년간조선의얼’의원고집필을중단할때까지연재되었던제17장「기루왕이후백제와신라」로부터제25장「신라의내정과외치」에이르는고구려ㆍ백제ㆍ신라관련역사를수록하고,추가로세나라의종교ㆍ학문ㆍ제사ㆍ예문ㆍ불교의유래와발전에대하여문화사적관점에서접근을시도한「전고갑」을제27장에수록하고있다.또,그동안초고형태로보관되었던「고구려의패업과영락태왕」부분을제26장으로새로배치하였다.그리고부록의형식으로위당선생이고대사연구에투신하게된계기와일제의역사왜곡을경계하는당부의말을담은「조선사연구부언」,광개토대왕능비비문에대한연구논문이라고할수있는「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고구려관명에대한글인「태대형ㆍ대형ㆍ소형에관하여」를모두수록하였다.역자는이와함께최초의발견이래위당선생을거쳐100여년이흐른오늘날의독자들에게도주요한관심사가되고있는「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에대하여문법학ㆍ어원학적측면에서분석ㆍ보완한역주내용을추가로수록하였다.
하권에서체제상으로특기할만한점이라면무엇보다도지금이순간까지도여전히논란이거듭되고있는광개토대왕과그능비에관한내용이집중적으로소개되어있다는것이다.즉,본서제26장「고구려의패업과영락태왕」과순한문체연구논문「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그리고역자가새로역주한「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이그것이다.위당선생이단재선생이후로유일하게일제식민사학자들의우리역사왜곡ㆍ조작에맞서이일련의논문을집필하여반론을제기한이래로70여년이지나는동안한ㆍ중ㆍ일세나라에서광개토대왕과그능비에대한연구와비문해석이지속적으로이루어져양적ㆍ질적으로많은진전이있었다.따라서새로운역사적사실의발견이라는측면에서는「고구려의패업과영락태왕」과「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에서특기할만한내용을찾기가쉽지않을것이다.그럼에도불구하고다음몇가지부분에있어서는지금에와서도주목할만한메시지를담고있다고할수있다.

2.「고구려의패업과영락태왕」에관하여

위당선생의《조선사연구》는「동아일보」일장기말쇄사건으로제25장「신라의내정과외치」를마지막으로사실상중단되었다.이「고구려의패업과영락태왕」부분은원래위당선생이「동아일보」에연재해온‘오천년간조선의얼’의기고문으로집필된것이다.그러나1936년8월29일갑작스러운「동아일보」의정간으로‘오천년간조선의얼’의연재가중단되면서초고상태로다른곳에보관되었으나,1947년「서울신문」을통하여그동안의연재내용을《조선사연구》라는제목으로정식출판할때에도미처수록되지못하였다.그러다가1983년무렵연세대학교에서위당선생의저술ㆍ시작들을수집하여엮고《담원정인보전집》이라는제목으로정식출판할때《조선사연구》의마지막장으로수록되면서비로소다시빛을보게되었다.
이장의기술내용은고국원왕시기의국내외정세,고구려의서진과부여회복군의동진,신라와의외교관계,영락연간의업적으로구성되어있다.이중에서광개토대왕에관한기술부분의경우‘영락’이라는연호의역사적의의와함께그의대외정벌,백제정벌,거란토벌등의대외정벌활동을기술하는한편그이동경로를고증하는데에역점을두어지금의학계에서도참조할만한내용들이많다.단적인예가광개토대왕의정벌경로를확인하는데있어중요한단서가되는‘염(나)수’의위치에대한고증이다.위당선생은염(나)수가지금의눈강인데사학자들이그위치를고증하는과정에서혼선을빚게된결정적인이유로역대중국역사가들이요동쪽해구의존재만알고북동해저편해구의존재는전혀알지못했던점을꼽고있는데,지금의학자들도주의를기울일가치가있다고본다.

3.「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에관하여

위당선생은이무렵「고구려의패업과영락태왕」과는별도로「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이라는제목의고구려사연구논문을집필하였다.위당선생의제자이자연세대교수였던민영규선생의논문에따르면,위당선생이이논문을집필하게된결정적인동기는1930년대당시식민사관에입각한일제관변학자들의광개토대왕비문에대한억지해석에서찾을수있다.
위당선생은이논문에서능비비문의문체상의특징에대해서먼저소개한후문헌고증과현지지형에주의하면서해당비문을총7개단락으로나누었다.여기서그는“來渡海”,“百殘聯侵新羅”,“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등그후로오늘날까지끊임없이논란이되고있는주요쟁점들에대하여정밀한분석을시도하고말미에서는일제관변학자들의이같은억지해석이“세상이어지러운데다예문의법도가사라져이런글을읽는일이드물어지고거기다편견과사심까지끼어들어멋대로재단하다보니문맥이뒤틀리고의미도딴판으로변해버리고만것”이라고질타하였다.
이논문은능비비문의문구해석을놓고그후로많은학자들에게계발과논쟁의여지를남겼다.

4.「전고갑」에관하여

당대최고의국학자로서의위당선생의위상이가장돋보이는부분은「전고갑」부분이다.위당선생은여기서한ㆍ중ㆍ일세나라의고금의문헌ㆍ전적들을폭넓게활용하여문화사적측면에서고구려ㆍ백제ㆍ신라세나라의전통신앙ㆍ교육제도ㆍ국가제의ㆍ문학예술ㆍ천문역법ㆍ문자언어ㆍ불교신앙등의문화적현상과제도들의유래및발전양상에대하여상당한지면을활용하면서심도있는탐구와분석을시도하고있다.그중에서도중국의‘삼론종’확립에큰역할을한고구려승도랑,불교를신라에전파한아도등,당시까지연구가충분히이루어지지않았던불교승려들과불교경전및교리에대한해박한지식은그의학문적깊이와통찰력을느낄수있게해준다.

5.「정무론」-우리고대사조작을비판하다

하권에서또하나주목할만한부분은‘조작을바로잡는글’,즉「정무론」이다.위당선생이한국고대사연구에나서게된동기는일제치하의어용학자들이식민사관에입각하여우리역사를조작하려하는시도에맞서기위해서였다.물론《조선사연구》자체가그같은위당선생의역사적인식을반영한책이지만이같은인식이집중적으로반영된부분이바로「정무론」이다.위당선생은당시의관변학자들이낙랑유물을조작했다는의혹이불거지자「정무론」을써서일제식민사관사학자들의한국고대사조작ㆍ왜곡을경계하였다.위당선생은중국송대에옛비석을옮기거나관중땅의당대‘석경’이강남의필원에게소장된일,북조시대의조각상이강남의손성연에게소장된일,촉땅의조각상이남조에전해진일등을예로들어운반ㆍ이동이가능한물건들은마음먹기에따라서는수시로위치변동이나‘원산지조작’이얼마든지가능하기때문에지금그자리에있다고해서그것을처음부터거기에있었다고믿으면곤란하다고보았다.(“그글귀가하도반반해서그돌을옮겨왔다는것이너무도티가나는데도그저‘여기가옛점제이다’라느니‘여기가점제현의치소자리이다’라느니하고우기고있으니어쩌면이다지도방자하고거리낌조차없을수가있단말인가!”)위당선생은또이런말로유물조작의가능성을경계하였다.
“……사방팔방으로나가서그증거가될만한것들을찾아언덕이나고랑사이를돌아다니면서그속에위조물이나조작거리를슬쩍끼워놓은다음자기궤변을합리화하려고든다.심할때에는일부러그런것들을묻어놓고남들이발굴하게하기도하고일부러그런것들을버려놓고남들이발견하게하기도한다.또,어떨때에는일부러그것에묻은흙을털고닦은다음그글귀를판독하는척하다가뛸듯이기뻐하면서‘정말이땅에서이런물건이나왔네?’하고떠들어댄다.그렇게하면그광경을보는사람은청동기나비석따위가줄줄이쏟아지는것을지켜보다보면아무리‘안다하는’사람이라고해도전혀의심을하지않게되는것이다.……불순한목적으로그런짓을벌이다보니오로지자신의그런목적을이루기에만바쁠뿐옳고그르고는아예따지지도않는것이다.”(842-843)
“아무영문도모르는사람들은저들의작태를보면서도저(어용학자)들의작태를보면서도그저‘옛것을찾는고생을하는구나’,‘역사고증을할준비를하나보다’하고여기면서되려그들편을들어‘남들은우리역사를찾는데에돈과공을이만큼이나쏟아붓고있는데예전에이런일에종사한우리네학자들은대체해놓은것이뭐야?’하고개탄만할뿐저들이그일에매달리는것이남의옛역사를찾으려는것이아니라남의옛역사를허물려는짓이며남의역사를고증하겠다는것이아니라남의역사를없애려는짓인줄은모르기일쑤이다.”(844)

6.끝으로하는말

과학과기술이하루가다르게발전과변화를거듭하는21세기를살면서새삼느끼는것은우리가그동안‘불변의진실’이라고굳게믿던사실이나가치들도언제든지뒤집힐수있다는사실이다.역사의세계도그러하다.지금눈앞에펼쳐져있는유물이나역사기록만을역사적진실그자체라고단정하는것쯤은누구라도할수있는일이다.그러나진정한역사학자라면거기에서머물지않고상상력을발휘하여그것들이‘누구’에의해‘어떤경로’를통하여‘그자리’에존재하게되었는지거침없이반문하고또기존의결론과정설에끊임없이도전할줄알아야한다.
위당선생은《조선사연구》에서역사는곧민족‘얼’의발현이라고보았다.그동안우리역사학계일각에서는주로역사방법론에만집착하여위당선생의‘얼’사관이“민족내의계급투쟁을간과했다”라거나“극단적인정신사관이었다”라고비판하는경우가적지않았다.물론,《조선사연구》에서위당선생이제기한주장이나관점들중에서문제나논란이되는부분이있다면지적하고비판하는것이당연하다.그러나한가지부인할수없는사실은《조선사연구》로상징되는위당선생의한국고대사연구와그성과들은그것이위당선생에대한긍정이었든부정이었든,심지어위당선생에대한표절이었든간에이후의남ㆍ북한학자들이역사관을정립하고방법론을모색하는데에많은계발과자극을주었다는점이다.그런의미에서위당선생은훌륭한역사학자이며,또역사학자로서의진면목을유감없이보여주었다고할수있으니,그의‘얼’사관과연구업적에서수용하고계승할것들이있다면당연히그것들을오롯이인정하고발전시켜나가야할것이다.
지금이순간까지도우리이웃나라는“고구려가중국의지방정권이었다”라거나“독도가일본땅이다”라는식의강변을서슴지않고있다.거기에는학자로서의자존심도객관성도보이지않는다.자신들이정한행동강령에따라우리역사를자의적으로왜곡하고또그것을기정의사실로만들려고발빠르게움직이고있다.위당선생은일제강점기에‘오천년간조선의얼’집필과신문연재,역사강연등을통하여,일제의역사왜곡으로부터우리의역사,우리의‘얼’을지키고자진심으로노력하고최선을다하였다.그로부터70여년이지난지금우리역사학계는이웃나라의역사왜곡으로부터우리의역사와‘얼’을지키기위하여과연얼마만큼노력하고있는지진지하게반문해보아야할것이다.(글:문성재)

[중앙일보]2012.11.07.4단
식민사관에맞선정인보대표작한글로본다
『조선사연구』완역본첫출간일제때신문연재뒤75년만에‘낙랑군위치는평양’설반박


20세기전반한국학의초석을놓은위당(爲堂)정인보(1893~?)선생의대표작『조선사연구』(상권,우리역사문화재단)한글완역본이처음으로출간됐다.1935년1월1일부터36년8월29일까지‘오천년간조선의얼’이라는제목으로동아일보에연재된지75년만의일이다.
 해방직후인46년서울신문사에서국한문혼용체원문을영인한단행본이나왔고,83년연세대출판부에서펴낸『담원정인보전집』(전6권)에도포함됐으나한글완역은이번이처음이다. 한글본의상권만848쪽방대한분량이다.중국문학을전공한번역자문성재박사가조사한각주800여개가포함됐다.하권도약900쪽분량인데내년초나올예정이다. 
문박사는“번역에3년이걸렸다.고대한자어는물론만주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