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불교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경전 중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지혜를 안겨준 동양 철학서 중의 철학서라고도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말씀하신지 2천년이 넘었지만, 금강경은 여전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선물하고 있다. 이에 송강스님의 금강경은 아름다운 글과 디자인 그리고 방혜자 선생님의 그림으로 금강경의 가치를 더욱 높여 현대화 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동안 금강경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송강 스님의 금강경을 한번 보실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인류의 유산 중 하나인 금강경을 곁에 두고 소장하고 싶다면 또한 송강 스님의 금강경이 적합할 것이다.
최근 송강스님의 번역으로 출간된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세상에 나왔다.
송강스님의 금강경이 돋보이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짚어본다.
첫째, 금강경을 현대 말로 번역한 송강스님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체와 아름다운 구절들의 조합이다.
군더더기를 배제해 의미를 명쾌하게 살리고, 문장이 아름다워 불교 공부를 깊이 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그 뜻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없다. 독송을 고려하여 더욱 문장을 다듬어서 읽기에 편안하다.
둘째, 큰 서체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읽기에 편리 하다.
경은 바닥에 놓고 읽는 경우가 많다. 무릎 아래에 놓고 읽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큰 서체를 사용하였다. 또한 노안이 있어 글 읽기에 부담이 있으신 분들에게도 매우 편리하다.
셋째, 각주가 자세하여 원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불교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금강경을 읽을 때에도 거부감이 없도록, 중요한 단어들에 대한 뜻풀이를 자세히 다루었다. 또한, 번역에 대한 근거와 해설까지 제시해 줌으로써 독자들의 의문을 최소화시켜 준다.
넷째, 방혜자 선생님의 작품이 금강경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빛의 탄생’은 빛의 화가인 방혜자 선생님의 작품이다. 오랜 세월동안, 우주 근원적 존재로서의 빛의 세계를 탐구하고, 그림 속에서 일관되게 그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방혜자 선생님의 작품은 금강경의 근본정신과 맥을 같이 하며 감상의 즐거움에 폭을 넓혀준다.
다섯째, 편집 디자인이 아름다워 가독성이 높다.
아름다운 색과 서체들의 조화는 읽기에 편안함을 주는 요인이 된다. 문자의 크기와 색깔의 구분별 배치는 필요한 부분들을 잘 찾아낼 수 있게 하려는 편집자의 섬세한 배려이다. 늘 곁에 두고 독송해야하는, ‘경’에 꼭 맞는 디자인이라 할 만하다.
여섯째, 실제본 양장본으로 소장용으로 손색이 없다.
책을 16페이지 단위로 실로 묶은 후 풀질을 한 양장 제본으로 책의 속까지 잘 펼쳐지며 펼쳐 놓아도 다시 넘어오지 않게 편리하게 제작 되었다.
금강경이 불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소중한 유산이라고 볼 때, 송강스님의 오랜 연구를 통해 번역된 이 금강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유산일 것이다.
<경전을 찬탄하는 게송>
가장 높고 깊으며 미묘한 가르침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워라
제가 이제 듣고 보아 지니게 되었으니
부처님의 참된 뜻을 밝게 깨쳐 알아지다.
<책속으로 추가>
172쪽 우리말 독송본 주석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범어의 제목은 바즈라체디까아 쁘라즈냐아빠아라미따아 수우뜨라(Vajracchedika Prajnaparamita Sutra)이다. 바즈라(Vajra)는 금강석(金剛石) 또는 다이아몬드를 뜻하며, 체디까아(cchedika)는 ‘잘 자르다’라는 뜻이다. 쁘라즈냐아(Prajna)는 초월적 지혜인 반야(般若)이며, 빠아라미따아(paramita)는 ‘완성(完成)’의 뜻으로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수우뜨라(Sutra)는 ‘지름길’이며 ‘바른길’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고 해탈·열반에 나아가는 바른길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중국식으로 옮길 때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체디까아(cchedika, 잘 자르다)의 뜻을 살려서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금강(金剛) 그 자체에 잘 자르는 성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능단(能斷-잘 자른다)’을 빼고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해도 뜻에는 변함이 없다.
금강[金剛, vajra]: 금강은 다이아몬드이다. 이 다이아몬드는 ‘반야’를 설명하는 것인데 반야가 불성(부처 성품)에서 비롯되므로 불성을 가리키는 말도 된다.
반야[般若, prajna]: 반야는 초월적 지혜이다. 지식과 경험의 한계성을 뛰어넘는 지혜이다. 어스름한 빛은 이상한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다시 온갖 공상을 일으키게 되며, 이 공상은 두려움을 일으키고, 이 두려움은 갖가지 문제와 괴로움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이다. 그러나 한낮이 되면 모든 것이 그 실체가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므로, 부질없는 공상과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 태양의 광명과 같은 것이 참된 지혜인 반야이다. 맑은 거울에 모든 것이 그대로 비치듯 물들지 않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지혜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빛이며, 온갖 집착을 떨쳐 버린 영혼의 빛이 곧 반야이다.
바라밀[波羅蜜, paramita]: 괴롭고 고통스런 이 언덕에서 절대 자유이며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인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으로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는데, ‘완성(完成)’을 뜻하기도 한다.
경[經, Sutra]: 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부처님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중생들에게 제시하셨고, 그 길은 바르고 정확하며 최상이다. 그러므로 경에 의지하면 반드시 행복의 세계에 이른다. 그것을 깨달음의 세계라 한다.
173쪽 우리말 독송본 주석
제 1. 법회가 이루어지는 인연
나[我]: 이 경을 듣고 기억했다가 서술했다는 아난다존자이다. 아난다존자(Ananda)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출가해서는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는 시자(侍者)를 맡았다. 또한 기억력이 워낙 뛰어나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기억했다고 한다. 늘 곁에서 모셨기 때문에 거의 모든 가르침을 기억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십대 제자 중 가장 많은 것을 듣고 기억한 ‘다문제일(多聞弟一)’로 존중되는 분이다.
세존[世尊]: 한역(漢譯)에는 불(佛)로 되어 있으나 범본에는 브하아가와완(Bhagava?n∼)으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세존으로 바로잡았다. 세존은 부처님 열 가지 존칭 중의 하나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世尊)’이라는 뜻이다.
사위성[舍衛城]: 구마라집역본에는 사위국(舍衛國)으로 되어있으나 바로잡았다. 사위성은 부처님 당시 인도 중부에 있던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인 스라아와스띠이(Sravasti)이다.
제따동산: 한역(漢譯)의 기수(祇樹)는 ‘기타(祇陀, Jeta) 태자의 숲’이라는 뜻으로 제따와나(Jetavana)의 번역이다. 제따태자의 동산을 수닷따(Sudatta)장자가 사길 원하자 태자가 농담으로 동산을 금으로 덮으면 팔겠다고 했다. 장자는 동산을 얇은 금판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태자가 놀라서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려고 하느냐고 묻자,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곳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태자는 감동하여 팔기로 결심했는데, 나무는 금으로 덮을 수 없으니 자기가 기증하겠다고 하였다. 사원이 완성되었을 때 그런 연유를 따라 제따동산을 넣게 된 것이라 한다.
201쪽 한문 독송본 주석
法會因由分 第一
불[佛]: 범본에는 브하가와안(Bhagavan)으로 되어 있으니, 세존(世尊)으로 한역(漢譯)되어야 한다.
사위국[舍衛國]: 부처님 당시 인도 중부에 있던 Kosala 국의 수도인 Sravasti로 엄격히 하자면 사위성(舍衛城)이라 해야 한다.
善現起請分 第二
아누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 범본에는 bodhisattvayanna로 되어 있고 현장역, 달마급다역, 의정역에서는 보살승(菩薩乘)으로 되어 있다. 오랫동안 독송하며 익숙해진 것이기에 그대로 두기로 한다.
운하수행[云何修行]: 범본 및 다른 다섯 역본에는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降伏其心이다.
여금제청[汝今諦聽]: ‘諦聽’은 字典에서의 발음은 ‘체청’이지만 금강경 독송에서는 ‘제청’으로 읽는 것이 관행이다.
여시수행[如是修行]: 구마라집본에는 없으나 범본 및 다른 역본에 의거하여 넣었다.
원요욕문[願樂欲聞]: 樂의 뜻이 ‘기꺼이’로 될 때는 ‘요’로 읽는다.
大乘正宗分 第三
마하살[摩訶薩]: 訶는 ‘꾸짖을 가’로 읽지만, 摩訶는 ‘마하’로 摩訶薩은 ‘마하살’로 읽어야 한다.
항복기심[降伏其心]: 범본에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로 되어 있고 현장본에는 發起如是之心, 보리류지역과 의정역에는 生如是心, 진제역에는 如是發心이라 되어 있다.
202쪽 한문 독송본 주석
竗行無住分 第四
보살어법[菩薩於法]: 法은 범어 vastu를 번역한 것인데, vastu는 物·事·法·諸法·事物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이때의 法은 dharma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 진제역은 不着已類而行布施로 되어 있다. ‘집착하지 않고 베푼다’로 옮길 수 있다.
住에 해당되는 범어 pratistha는 住·所住·依止·依處·所依·着 등으로 한역되었다.
布施에서 布는 ‘베 포, 펼 포’로 읽지만, ‘베풀다’는 뜻인 布施는 ‘보시’로 읽는다.
부주어상[不住於相]: 相은 nimitta-samjna를 한역한 것으로 다른 역본에는 相想으로 한역되었다. nimitta는 목적·목표·상징·이유·동기·수단 등의 뜻이 있고, 相·瑞相·標相·事·像·義·因 등으로 한역되었다.
가사량부[可思量不]: 이때의 不는 ‘아닌가 부’로 읽고, ‘아닌가?’로 풀이되는 의문의 미정사(未定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