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별을 쓸쓸이라 부른다 (유병란 시집)

나는 그 별을 쓸쓸이라 부른다 (유병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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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쓸쓸’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끝내 제거할 수 없는 존재의 조건에 더 가깝다. 사랑했기 때문에 쓸쓸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쓸쓸하며,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쓸쓸하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무언가를 잃고, 밀려나고, 늙어가며, 어떤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이동한다. 중요한 것은 그 쓸쓸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상실된 상태의 존재들을 별이라고 부른다.
이 명명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다. 반짝이는 법을 잃어버린 존재를 다시 ‘별’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은 빛을 잃었을 뿐, 별이라는 이름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서랍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더라도 언젠가 다시 푸른 날개를 펼 가능성 역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별을 쓸쓸이라 부른다』에서 ‘쓸쓸’은 허무의 다른 이름이라기보다는 사라져가는 존재를 끝까지 ‘바라보려는’ 인간적 시선이 만들어낸 새로운 존재의 호명이다.
시인은 화려한 중심보다 오래된 골목을 보고, 높은 곳보다 바닥을 보며, 건강한 몸보다 병든 몸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동물을 보고, 동물에게서 사람을 보며, 낡은 사물 속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의 시간을 읽는다. 이러한 시선 속에서 서로 아무 관계가 없어 보였던 존재들이 잠시 하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 김춘식(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저자

유병란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14년 《불교문예》 등단.
시집 『엄마를 태우다』 『그러려니가 있다』.
이어도문학상 수상.
불교문예 편집위원.

목차

시인의 말

1부

서쪽 하늘
안목
낯선 하루
늦가을
환절기
물멍
그래도 장미
폐사지
채혈의 시간
무늬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습격
페이크
젤리피쉬레이크
난분분


2부

무인모텔
로그아웃
늦가을 동창회
방폭
응급실 벽에 N극과 S극이 산다
깔끔한 운구식
네바도 데 톨루카
실업
핑퐁게임
기린의 방
달팽이
블랙아이스
고독, 어디쯤
혹등고래
은자부호


3부

절벽 의자
건초봉지를 들고 양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왼손 별자리
목련의 뒤편
오래 전 봄이 나에게 왔다
포항초
파도를 건너다니는 말
겨울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사각지대
누워 있는 버드나무
요즘 세상
하염없이 낮은 부처
능소화 엽서


4부

옛 골목에 우리의 봄이 살고 있다
바닥
꽃가루
구월
보이지 않는 적
트롤퉁가
실업자
입춘
회오리
수빙
밀려나다
사람임을 증명했습니다
그 섬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새


■ 해설
‘쓸쓸’이라는 별 | 김춘식(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실업>

서랍속으로들어가는별이있다

반짝이는법을잃어버린별은
내방창문을넘어거실천장에붙어
어둠속에서말소리를엿듣곤했다

나는그별을쓸쓸이라부른다

어둠이깊어질수록별의눈에고이던눈물

아침이오면별똥별처럼떨어져나간양어깨에
희미하게드러나는돌기들
아무도눈치채지못하게숨소리를숨긴다

그별이푸른날개를펼칠때까지
나는넓은식탁에서밥을먹는다

가끔어둠을열어쓸쓸의얼굴을만져본다

새벽의고요가별그림자를밟고멀어지면
시린발을접어서랍속으로몸을숨긴다

<달팽이>

그는오늘도가판대안으로들어갑니다그가이거리에나앉은건오래전일이지요신문과껌과쓸쓸함을파는그곳으로들어갈때마다그는달팽이에요

작은네모에얼굴을내밀고하루종일앉아있어요네모밖은태어나고사라지는그들만의세상보이는것도보이지않는것도네모밖의일

가끔발가락이사라진비둘기가지나가요

몸을움직일때마다벽과벽이부딪치는한평은그의초원
서로헐뜯는세상은네모밖의일이라는듯하품을늘어지게할때도있어요

두팔을내밀어천천히구름을당겨봅니다노모의나긋한털실처럼줄줄이딸려오는그것들을가지런히그러모아가판대위에걸어놓아요

이곳은고여있는물같아요누군가삐죽이며지나가요그러거나말거나네모속달팽이는저녁이멀어질때까지초원에떠오를은하를기다려요

어쩌면달팽이집속에서는대평원을달리는말의등뒤로붉은노을이빛나고있을지도모르죠

달빛이플라타너스꼭대기에걸릴때쯤네모속달팽이는기지개를켜며천천히밖으로나옵니다

<당신과당신의새>

당신의새는늘한쪽으로기울어있었다

당신의날개를조그만더펼쳐보세요
날개속에또다른날개가자라날아가는동안
듬성듬성깃털이빠져나간곳마다없는계절이자라났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울어진날개에서로의날개를덧대고날아간다
내가날고싶은곳보다함께날아야만했던그곳은
수시로바람이불고비가내렸다

구름을뚫고나온새가날개를푸득이며
어디로불지모르는바람길을가늠해본다
공중을향해날개를펴며균형을잡는다

통증이굳은살처럼박여있는서로의날개를바라보며
지나온길을올려다본다

선명하게남아있는그길,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