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명의거장들을통해본세계사!
-르네상스와종교개혁시대15-16세기유럽
이책은르네상스와종교개혁시대살았던레오나르드다빈치,마키아벨리,토마스모어,에라스무스,마르틴루터등5인의거장들을다룬인물사이자세계사입니다.
이들중에는오늘날천재라불리는인물도있고,당대최고위직에오른고관대작도있었습니다만이들모두평탄하고쉬운인생을살진않았습니다.<모나리자>의작가로유명한레오나르도다빈치는누구보다도앞선상상력으로시대를앞서살았던인물이었고평생을자연의원리를탐구한과학적마인드의소유자였지만사생아라는사회적편견과제약속에서힘든삶을살았고후원자를찾아이리떠돌아다녀야했습니다.
당시여러국가로분열되어있었던이탈리아피렌체의고위관리였던마키아벨리는평생정치에나가열심히일했지만,정권이바뀌면서한순간에쫓겨납니다.군주에게자신의경험을녹여쓴책을헌정했지만인정받지못했고죽을때까지복귀를꿈꾸었으나이루지못하고기다림에지쳐아쉬운일생을마감합니다.
또토마스모어는국왕헨리8세의신임을받아재상의자리까지올랐지만왕의이혼과새결혼을반대해사형에처해지게됩니다.
이렇듯이분들의파란만장한일대기를따라가다보면,15,6세기유럽의사회상과역사적흐름이자연스럽게그려지실것입니다.그리고그들의인생을통해시대는다르지만21세기를살고있는우리의인생을새롭게비춰보실수있을것입니다.
중세기독교적세계관의붕괴와르네상스휴머니즘의시작
-레오나르도다빈치와마키아벨리
중세기독교적세계관에서볼때,인간은죄로물든타락한존재입니다.따라서인간은세속적욕구를억제하고경건한생활로끊임없이구원을갈구해야합니다.그러나도시가발달하고사회가변화하면서교회의힘이약화되자사람들은현실에서의인간의세속적욕구와희노애락을긍정의눈으로바라보기시작했습니다.이제인간은죄로물든나약한존재가아니라,이성을활용해세상을변화시킬수있는,능력있는존재들로인식되기시작했던것입니다.
이러한새로운사고방식에모범이된것은바로고대그리스,로마의옛문화였습니다.고대그리스,로마문화는인간의감정을존중하고,이성의힘을믿는인본주의적성격을가지고있었습니다.사람들은고대문헌들을더깊이연구하기시작하여자신들이혐오하던중세문화에대한대안으로,그러한고대의문화적,학문적경향을부활,재생시키고자하였던것입니다.
프랑스어‘르네상스(Renaissance)’란,고대문화의부활과재생을꾀하는문화적운동을총칭하는말이었습니다.그부활되고재생된새로운문화의본질은‘휴머니즘(Humanism)’이란단어로표현되었는데,당대에‘휴머니즘’은두가지뜻을가진단어였습니다.즉,고전고대문헌을연구하고거기서교훈을얻어내려는지적학풍(인문주의),그리고인간을긍정적시선으로바라보는새로운경향(인본주의)이라는두가지뜻모두를가지고있었습니다.
이러한새로운문화운동이가장먼저시작된곳은이탈리아였습니다.당시이탈리아는지중해무역을통해부를획득한도시국가들이여럿부상하면서세속적분위기가크게성행하였고옛로마제국의터전이어서유럽어느곳보다고대적유산에대한친밀감이강했던곳이었습니다.
이시기이탈리아에서태어나고살았던,그리하여이러한새로운흐름을온몸으로받아들이고표현했던두명의인물은바로레오나르도다빈치와마키아벨리였습니다.
레오나르도다빈치
레오나르도다빈치는이탈리아의도시국가피렌체에서1452년사생아로태어났습니다.아버지피에로는법률가로피렌체에서생활했지만,레오나르도다빈치는피렌체근교빈치(Vinci)라는곳에서2-3Km떨어진시골마을에서할아버지와삼촌의보호아래자랐습니다.10대에그는피렌체의탁월한조각가이자장인인안드레아베로키오(AndreadelVerrocchio,1453-1488)공방에견습생으로들어갑니다.당시의‘공방’은회화,조각뿐아니라건축이나일상적인가구제작에이르기까지,다양한기술을제공하는장인들의작업장이었는데,베로키오공방은귀족들을위해그림과조각,식기류,장식품들을만들고있었습니다.페루지노(PietroPerugino,1450-1523),기를란다요(DomenicoGhirlandaio,1449-1494),보티첼리(SandroBotticelli,1445-1510)등촉망받는동료들이바로이공방출신이었습니다.
1472년20세견습생활을끝낸다빈치는‘장인’자격을취득하고스승인베로키오와함께「그리스도의세례」(TheBaptismofChrist)라는그림을그렸고,선원근법과극적인명암효과를사용한「수태고지」(TheAnnunciation)라는작품을그립니다.
1477년경공방을나와독립적인작가의길로들어섰지만사생아에다동성애자라는딱지까지붙은레오나르도는공방동료였던보티첼리같은당대의다른피렌체예술가들과는달리,군주인메디치(Medici)의인정과후원을받지못했습니다.
1482년30세에레오나르도는피렌체를떠나밀라노로갑니다.당시밀라노지배자는루드비코스포르차(LudvicoMariaSforza,1451-1508)공작이었는데,용병출신의스포르차가문의눈에들기위해레오나르도는화가나조각가가아니라,다양한종류의공격용,수비용기계를제작할수있는무기기술자로서자신을채용해달라고제안서를냅니다.하지만소식도없고허송세월만할수없어프레디스가두형제들과<암굴의성모>를그렸고,스포르차공작의부탁으로<청동기마상>작업에착수했지만당시프랑스의공격으로청동이부족해미완성에그칩니다.
그러나그는결국벽화<최후의만찬>을그려명성을얻게됩니다.이벽화는축축한회반죽이마르기전에색칠을해그려내는전통적인프레스코화가아니고,달걀을안료에섞어쓰는템페라(Tempera)기법을썼는데,이기법은보존성이약해심한훼손을피할수없었습니다.
그후프랑스루이12세의밀라노침공으로밀라노를떠나피렌체로(1500년)귀향한다빈치는교황알렉산드로6세의아들로중부이탈리아를수중에넣은(마키아벨리가군주론에서잔혹하지만냉철한리더십의대가로보았던인물)체사레보르자의군사기술자로1502년부터일하기시작합니다.그는체사레가점령한지역을측량하고조류를기록하고다리를놓고지도를제작하는일등을합니다.
다시1503년피렌체로돌아온다빈치는조콘도(Giocondo)라는한직물상인부인의초상화제작을의뢰받습니다.이초상화가바로“세상에서가장유명한그림”「모나리자」(MonaLisa)입니다.이작품은특이하게도귀족이아닌중산층을그린그림으로,여인의표정이자연스러우면서도신비롭게묘사되어있는놀라운걸작으로평가됩니다.특히이그림은레오나르도가창안한‘스푸마토(Sfumato)’기법(한형태와다른형태사이의경계선을희미하게하고색채를부드럽게하는기법)이사용된대표적사례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르네상스를대표하는또하나의거장미켈란젤로와너무나대조적인것으로도유명합니다.레오나르도는외모에서부터수려하고아름다운미남자이자,온화한멋쟁이라면미켈란젤로는단정하지못한외모에등이굽었지만몸은딱바라지고동료조각가와싸우다가코뼈가부러질만큼너그럽지못하고격한성격의싸움꾼으로알려져있습니다.또레오나르도가서자로태어나정규교육을거의받지못했던반면,미켈란젤로는귀족가문출신으로고등교육을받았고,일종의귀족적자부심도가진인물이었습니다.레오나르도가회화를선호하였다면,미켈란젤로는조각가로불리기를원했으며,레오나르도가과학적이면서낙천적이었다면,미켈란젤로는강박적이기까지한완벽주의자였다고하겠습니다.어쨌든20년이상나이차이가나는두거장사이는좋지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시대를넘어선탁월한상상력의소유자였고자연의원리를탐구한과학자였습니다.빛과그림자에대한연구는물론이고기중기,방직기,압연기,장갑차,대형석궁,잠수함등많은발명품들을고안하였습니다.귀족들의축제나연극을감독했으며새처럼하늘을날수있다는비행기계를만들려고했고30구이상의시체를해부했다고알려져있습니다.그의이러한탐구정신은그가남긴수천장의수기메모에서잘나타납니다.
마키아벨리
니콜로마키아벨리는1469년5월3일이탈리아중부토스카나(Toscana)지방의피렌체에서비교적명성이있는중간계급가문에서태어났습니다.그의집안은경제적으로빈궁하였지만인문주의에심취한아버지의영향으로마키아벨리는어린시절에이미리비우스의『로마사』를비롯한여러고전들을접하고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의조국피렌체는작은도시국가였습니다.경제적으로는번성해교황청을비롯한많은군주들의금고역할을했고,수많은작가와예술가를배출한탁월한문화의중심지였지만,군사적으로는자국군대도가지지못한약소국이었습니다.그래서이나라는이탈리아내국가들간의경쟁과국제정치의역학관계속에서,크고작은정치적소용돌이에시달려야했습니다.어린마키아벨리는백주대낮에피렌체의집권자를노린암살음모가벌어지고가담자들의목이줄줄이걸리는과정을직접보았고여러차례전쟁을경험하며자랐습니다.
메디치가문의몰락후권력을잡았던사보나롤라의신정정치가몰락했을때29세의청년이었던마키아벨리는새로구성된피렌체공화정의제2서기장으로선출됨으로써그의파란만장한공직자생활을시작합니다.
이초기외교관시절,피렌체가직면한가장큰현안은‘피사(Pisa)’문제였습니다.본래피렌체의속국이던피사가1494년샤를8세의이탈리아침공을틈타,피렌체의지배로부터벗어났던것입니다.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피렌체가선택한방법은,용병을고용해피사를치는것이었습니다.피렌체공화정부는유명한용병대장이었던파올로비텔리(PaoloVitelli)를고용하였지만승리를목전에앞두고막바지공격을준비하고있을때용병대장파올로비텔리(PaoloVitelli)가갑자기군대를철수해버리는일이발생합니다.결국코앞에서다잡은물고기를놓친피렌체사람들은,비텔리를잡아처형하기에이릅니다.이‘비텔리사건’은마키아벨리에게자국군의필요성을각인시켰습니다.
마키아벨리의사상에영향을끼친또하나는프랑스궁정에서의경험이었습니다.새프랑스왕루이12세(LouisXII,1462-1515,재위:1498-1515)가밀라노를무력점령하자피렌체정부는이번에는강력한프랑스군을이용해피사를탈환하기로합니다.마키아벨리는프랑스의피사공격을독려할2명의군사고문을보좌해프랑스에파견됩니다.그러나프랑스에서그는약소국관리의설움을체험해야했습니다.국왕은피렌체대사들을잘만나주지도않았고프랑스사람들은피렌체를돈이나밝히는상인집단들이라고폄하하였습니다.이경험을통해그는자신의조국피렌체가얼마나약한나라인지를뼈저리게느낄수있었습니다.
1502년에마카아벨리는자신에게특히큰영향을줄한인물을만나게됩니다.그는바로교황알렉산드르6세의아들로이탈리아중부지방에대한무력정벌을하고있던체사레보르자(CesareBorgia)였습니다.1502년6월우르비노에서처음그를만난마키아벨리는체사레에게매료됩니다.그는후일이인물을자신의책
<군주론>
에서이상적정치인으로칭송합니다.
1505년부터마키아벨리는피렌체공화국의방위군을조직하는일에착수합니다.용병비텔리사건,프랑스궁정에서의모멸감,그리고국제적역학관계가바뀔때마다강자들에게달려가돈을바치고굽신거려야했던약소국외교관리로서의한을,군대를조직하며풀고있었던것입니다.훌륭히피렌체방위군을조직해내자,그의위상은높아졌습니다.이제피렌체공화정부에서마키아벨리는,없어서는안될주요인물이되어있었던것입니다.
그러나운명의여신은그의인생을나락으로떨어뜨립니다.1512년교황율리우스2세의명령으로스페인군이피렌체를공격하여피렌체공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