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고조선, 부여)

한국 고대사 (고조선,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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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잃어버린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를 찾는다!
현재 중국과 일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긍지를 살리려고 과장된 역사를 가르치지만, 우리는 대륙으로 한 번도 진출해 보지 못하고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민족으로, 도저히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를 가르친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조선시대까지 한민족의 고대 사료는 『단군고기』와 『신지비사』, 『배달유기』,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 표훈(表訓)의 『삼성밀기』, 『조대기』 등이 있었다. 특히 『신지비사』와 『배달유기』는 고조선 건국에 관련이 깊은 내용이 담겨 있던 책으로 조선 초까지 전승되어 서운관(書雲觀)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개국 직후 편찬했던 『고려사』를 다시 고쳐 종래의 자주적인 내용을 제후국에 맞도록 편찬하였고, 특히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고서를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리고 고기류(古記類)를 수거하고 불태우는 등 조선판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으며, 그나마 민간에 숨겨둔 것마저 일제는 1910년 수거령을 내려 이 땅 곳곳에서 51종 20만 권 정도의 서적을 수거해 불태우거나 본국으로 가져가 버렸다.(조선총독부 관보)
때문에 한국 고대사 사료는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중국 25사 및 관련된 사료를 연구하는 사학자들 덕분에 고조선과 부여가 실존의 역사임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 손작운(孫作雲)은 『산해경』을 동이 고서(古書)로 규정하고, 해내경을 아예 조선기(朝鮮記)라고 불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도 만이(蠻夷) 세력이 옛 연(燕)과 제(濟)까지 미쳤다는 기록, 『설문해자』에서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고, 동시에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 BC403∼BC221 기록)에서 연(燕)나라가 북쪽으로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 예맥(穢貊), 조선(朝鮮), 진번(眞番)과 교역이 있다고 하였다. 강단사학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임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일제식민지 사관과 동북공정 문제


우리 민족의 역사는 그동안 심하게 왜곡되고 부정되어 전해왔다. 1945년 광복이 되어 80년이 지났지만, 사학계는 여전히 식민사관의 잔재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이 있는데, 하나는 사대주의 노론 사관이고, 또 하나는 식민 사관이다.
노론 사관은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들의 인조반정에서 시작됐다. 성리학을 받든 존명반청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이후 노론과 노론 벽파로 이어지면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300년간 나라를 말아먹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팔고 관작을 받아먹은 양반들 대다수는 노론이었고, 그 후예들이 일제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했으며 광복 뒤에도 사학계 주류가 되었다. 식민사관(植民史觀) 역시 노론 사관과 다를 바 없는데, 영토(領土)적 개념(槪念)이 한반도 내로 국한되어 비슷하기 때문이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이란 한반도 북부에서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해 400년간이나 식민지를 경영했고, 남부에서는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백제와 신라를 경영했다고 하는 역사 조작에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사관이다. 특히 청천강 패수설과 평양의 낙랑군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핵심 요소이다.

지금도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식민사학의 주구 노릇을 하던 학자와 그 후예들에게 잠식되고 있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 아래 교묘히 숨겨 그대로 수용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발굴한 유적과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증되지 않은 사료는 대부분 불신한다. 7~8천 년 이전의 고대 유적과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지만, 고조선과 단군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되고 있다. 이러한 실증사학에 따라 우리 역사 대부분이 잘려나갔다.
이렇게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제의 식민사관, 여기에 더해 실증사학에 의한 우리 역사 변질이 매우 심각하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의 결과로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한민족 역사의 활동무대가 한반도 내로 축소되었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에서 동북 지방은 지금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을 일컫는 말이다. 식민사관에 따른 억지 주장으로 이 지역의 역사가 공백으로 남았고, 그래서 이 지역을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그러나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역사만 바로 정립되면 동북공정의 논리는 저절로 무너진다. 확실한 사료와 유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부정할 수 없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역사 교육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때다.

고조선과 홍산(紅山) 및 하가점 하층(夏家店下層) 문화(文化)와 연관성

기원전 4,500년경 홍산문화는 황하문명과 별개인 동이족의 선진 문명으로 ①여신을 모신 사당 ②원형 제단(祭壇) ③적석총(積石塚)이 특징이다. 요녕성 조양시 건평(建平)과 능원(凌源) 지역에서 발견된 우하량(牛河梁) 유적은 홍산문화 만기(晩期, 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되는데, 거대한 제단, 여신묘(女神廟), 적석총(積石塚) 등이 출토되었다. .
또한 BC 2,200년~ BC 1,600년경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는 전기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데, 조양(朝陽), 능원(陵源), 객좌(客左), 건평(建平) 등과 내몽고와 요녕성 접경지역인 적봉(赤峰) 삼좌점(三座店)과 성자산(城子山)에서 엄청난 규모의 석성과 돌무덤 떼, 제단, 주거지 등 출토되었다.
하가점 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BC. 1,000년~ BC. 600년경)는 후기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며,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석관묘 안에서 출토되어 동이족의 대표적인 유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들 홍산문화의 유물 중 특히 여신묘에서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의 발도 함께 출토되어, 홍산(紅山) 사람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단군 신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1980년대부터 통일적(統一的) 다민족국가론(多民族國家論)을 들고나와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소수 민족과 역사는 고대부터 중화민족의 일원이고 중국사라고 주장하면서, 고조선과 후예인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모든 우리 고대국가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고, 동북 지역의 모든 고대 민족인 숙신, 동호, 선비 등을 황제의 후예로 보고 중화민족의 일부로 만들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 기원전 2천 년경 무렵부터 홍산(紅山)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이어지는데, 기원전 2천 년경 요하 유역에 존재할 수 있는 국가는 사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고조선 외에는 없다.

사서(史書)로 보는 고조선

사료1 『산해경』 해내경: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사료2 『산해경』 해내북경: 조선은 열양(列陽) 동쪽에 있다.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으며,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사료3 『사기색은(史記索隱)』: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세 강이 합해져 열수(列水)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이름을 취한 듯하다.

유적과 유물로 입증되는 고조선 건국은 청동기 출현 시기인 기원전 20세기, 늦게 보아도 지석묘 출현 시기인 기원전 18세기에는 건국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먼저 가장 오래된 선진시대 사료인 『산해경』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하북성에 있다고 하였다. 『산해경』을 주해한 곽박은 조선은 지금 낙랑군이며, 열양은 대방이고 연나라 땅이므로, 중국 동해 안쪽 (곧 현재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과 북해인 발해의 모퉁이인 하북성 곧 하북성 동북쪽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평양에 조선을 건국하여 1,500년을 다스렸고, (아사달은 빛나는 아침의 땅이란 뜻) 평양,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臧唐京) 순으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허목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는 조선은 유주(幽州)에 있었다 하였는데, 유주는 중국 하북성 보정시와 북경시 지역을 말한다.
또 『시경(詩經)』 한혁편(韓奕篇)과 『제왕운기』에도 고조선은, 많은 부락 연맹체의 우두머리를 거수(渠帥)로 삼아 자기 봉지를 다스리도록 하는 거수국(渠帥國)을 거느린 고대국가라 하였다.
각종 문헌에 나오는 거수국들은 부여(夫餘), 고죽(孤 竹), 고구려(高句麗), 예(濊), 맥, 추(追), 진번(眞番), 낙랑(樂浪), 임둔(臨 屯), 현도(玄兔), 숙신(肅愼), 청구(靑丘), 양이(良夷), 발(發), 유(兪), 옥저 (沃沮), 진(辰), 비류(沸流), 행인(荇人), 개마(蓋馬), 구다(句茶), 조나(藻 那), 주나(侏那), 한(韓) 등이 있으며, 부여와 고구려도 단군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거수국으로 출발하여, 단군조선이 중앙통치력을 잃게 되자 독립한 나라였다.

고조선의 강역
1) 도장으로 추정하는 고조선 영역
내몽골 나만기(柰曼旗) 유적에서 발견된 옥인장(玉印章) 등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옥인장(玉印章) 연대는 기원전 6,500년 전에서 5,000년 전으로 은나라에서 발견된 도장보다 적어도 2,000년 이상을 상회한다. 이는 황하문명으로 전파되었다.
2) 비파형 동검으로 추정하는 고조선 영역
『삼국유사』에서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을 주듯, 천부인은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을 말한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내몽골과 만주지역 및 한반도까지 두루 발견되었으며 특히 하북성 승덕시 칠로도산과 내몽골 적봉시 노로아호산 부근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3) 탁자형 고인돌로 고조선 영역 추정
고인돌을 지석묘(支石墓)로 부르는데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 역할을 한다.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지석묘(支石墓)도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산동성, 절강성 및 한반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지만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4) 명도전으로 추정하는 고조선 강역
북경과 하북성, 요동 지역, 한반도 서북부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은 고조선 강역과 대부분 일치한다. 이를 기존 사학계에서는 기원전 3세기 초에 연나라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고조선과 교역했던 증거로 보지만, 당시는 연나라 말기로 국력이 쇠퇴했던 시기이고, 연나라가 화폐를 사용했다는 어떤 사서 기록도 없다. 또 고조선 팔조법금(八條法禁)을 보면, 고조선이 화폐를 사용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데, 명도전은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 고인돌 등 고조선의 대표적인 지표 유물과 출토 지역이 같다.
더 결정적인 것은 명도전이 연나라 실제 강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미미한 수준으로 출토된다는 점이다. 이로 보면, 명도전이 가장 많이 발견된 북경과 하북성 북부는 고조선 핵심 강역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저자

박준서

저자는대전고등학교와고려대학교경영대학경영학과를졸업했다.공인회계사시험에합격하고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에입사하여회계감사업무를담당하였다.현재는독립하여세무회계사무소를운영하고있다.
평소역사에관심이많았던저자는틈틈이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등의한국고대사를공부하였다.『삼국사기』(김부식),『삼국유사』(일연)등의우리사서와중국정사인25사중에서특히우리역사와관련이있는『사기』(사마천),『한서』(반고),『후한서』(배송지),『삼국지』(진수),『수서』(위징),『당서』(구양수),『요사』(탈탈,脫脫)뿐만아니라『잠부론』(왕부),『논형』(왕충),『자치통감』(사마광),『죽서기년』,『산해경』등의관련사료를두루공부하였다.그러면서중국사서(史書)에기록된〈한국고대사〉가우리가알고있었던역사와전혀다르다는점을깨닫게되었다.결국중고교시절에배웠던한국고대사가대부분거짓임을파악하고본격적으로중국사서(史書)공부에매달린저자는사서의교차검증과정을통해우리고대사의실체를어느정도파악하게되었다.

사학자들은본격적인우리역사가중국의식민지인한(漢)사군부터출발했다고주장하지만,오히려중국사서에기록된우리민족은중국동부대륙을호령했던찬란했던역사를가졌다.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를건국했던우리한민족(한,예,맥)은기마민족,농경민족,해양민족의특성을모두갖추고대륙과동남아해양을지배했던강력한민족이었음이중국사서와유물로입증된다.오늘날대한민국의K-팝과K-푸드등한류문화가세계로뻗어나가는근본동력은우리민족의이런복합적인특성에서비롯되었다고생각한다.
한국고대사공부에매달린지난17년간세월은무모할정도로지난한시간이었다.하지만접근이쉽지않았던중국사서공부를통해우리고대사의숨겨진진실을찾을수있었고,이기간이저자에게는인생에서가장보람차고값진시간이었다.끝으로이책에대하여언제든기탄없는비판을해주시길독자여러분께당부드리고싶다.

목차

서문

1부단군조선
1장단군조선의실재성(實在性)
2장기자조선은실재했는가?
3장고조선(단군)과연나라의경계

2부위만조선과삼한
4장고조선(단군)의멸망과위만조선의건국
5장조한(朝漢)전쟁과한사군
6장위만조선과진국및삼한의관계

3부부여
7장부여의기원과건국신화
8장부여,북부여,동부여에대한개념
9장부여,고대국가의성립과변천

출판사 서평

고조선왕검성은고구려(장수왕이천도한)평양성

『삼국사기』는“고조선의왕검성은고구려장수왕이천도한평양성(平壤城)”이라하였고,왕부(王符,85~162년)의『잠부론』은“한성서쪽에준왕이다스리던고조선왕검성이있다”고하였으며,후한때반고(班古,32~92년)의『전한서』지리지는“고조선의왕험성에훗날한나라낙랑군(樂浪郡)이설치된다”고하였다.
현재보정시정흥현(定興縣)고성진(固城鎭)에폐허가된고성(固城)즉범양고성(範陽古城)이있는데,이것이왕검성이다.이는『전한서』지리지에서왕험성은낙랑군패수의동쪽에있다는신찬주석과정확히일치한다.
또당태종아들이태(李泰)의『괄지지(括地志)』는“고구려치소인평양성은본래한나라낙랑군왕험성으로곧고조선땅이다”고하였고,당나라장수철주석의『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고조선왕검성과같은자리에훗날고구려평양성이있었다”고하였으며,유득공의『발해고(渤海考)』는“평양성이훗날발해중경현덕부치소가되었다”고하였다.
한편왕검성이있었던낙랑군은서진시대에는평주속군이되었는데,“276년당시요동,창려(昌黎),현토,대방,낙랑등의5군은평주에속했다”는신찬의『진서』지리지기록과일치한다.더결정적인기록은원나라탈탈(脫脫)의『요사』이다.요나라의“동경요양부는본래고조선땅으로동경(東京)이바로옛평양성”이며,“발해의홀한주도바로옛평양성으로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라고한다“하였다.
현재학계에서정흥현(定興縣)고성(固城)이한(漢)나라패수현(浿水縣)이자발해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상락현(常樂縣)위치로밝혀졌다.따라서계조하(鷄爪河)일명패수동쪽7㎞에있는정흥현(定興縣)고성(固城)이바로고조선왕검성치소로추정된다.

왕검성(王儉城)위치

한사군은실재했는가?
한나라는군(郡)을설치하면황제직할지이기때문에중앙에서태수등을파견했다.그런데사마천의『사기』는한사군(漢四郡)을설치했다면서그와같은기록이없다.왜일까?
1.반고의『한서』(약180년후기록)는,『사기』의5군이황제직할지인한사군으로바뀌고5군제후들의이름까지삭제해버렸다.당시직할통치가어려운곳은제후가다스리는국(國)을설치하지군(郡)을설치하지는않는다.또(『사기』보다약5백년뒤인432년편찬)『후한서』는『사기』에나오는조선평정(平定)기사에서정(定)자를멸(滅)자로바꿔조선을멸망(滅亡)시킨것으로변조했다.
사료『후한서』:마침내조선을멸해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했다(遂滅朝鮮爲樂浪玄免臨屯眞番).낙랑,현토,임둔,진번등4군을두었다(爲樂浪玄免臨屯眞番)
위에서만약한4군이실제로설치되어직할통치했다면,위(爲)자가아니라치(治)자를써야한다.그보다더결정적인문제점은전한에서서진까지(전한,왕망의신(新)나라,유수(劉秀)의후한,220년조조아들조비(曺丕)에의한한나라멸망,위(魏),서진에이르기까지)5개왕조가바뀌는400년간한사군만생존했다는것은이치에맞지않는다.

한반도에있었다는낙랑군이거짓인이유!

사학계는대동강남안의토성리에있는약1.5km토성(土城)과목곽묘(木槨墓)고분100여기를한사군의지배시기의토성과무덤이라고보고,낙랑군의증거라고주장하고있다.
그러나『사기』조선열전에보면,우거왕이험준한곳에서저항했다고기록되어있는데,대동강주변토성은적의공격을방어할수있는지형이아니다.또낙랑군고분으로추정되는목곽묘(木槨墓)고분100여기도BC108년훨씬이전목곽묘이며,한사군이설치되는시기에는사라진무덤이다.결국대동강낙랑구역에서출토된유물은세형동검류의고조선계문화가주류를이룬다.또봉니200여개발견을근거로우리사학계는평양일대가낙랑군이었다고주장한다.그러나북한사학계는관직명이전한당시관직제도와맞지않고크기가제각각이라는점을들어위조되었다고추정한다.특히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라고쓰인봉니가위조품인이유는왕망의신나라때만들어진봉니라면당연히낙선대윤장(樂鮮大尹章)이되어야하기때문이다.
점제현(秥蟬縣)신사비는뜨거운감자다.동경대세키노다다시교수가평남온천군성현리에서발견했는데,(점제현은낙랑군25개속현중의하나-『한서』지리지)비석이발견된평안도온천면일대는2천여년전,한나라시대에는바다밑에있었다.또비석의성분은대동강유역에서생성된화강암이아니고외부에서옮겨온것일뿐만아니라2000년전에만든비석기초에시멘트가발라져있었다.


세키노다다시(関野貞):동경대교수점제현신사비

고조선과진국및삼한의관계
대한민국의국호와한민족의뿌리는조선과삼한에있다.여기서삼한이란고구려,백제,신라의삼국(三國)을말하는것이아니라마한,진한,변한의삼한을의미한다.조한전쟁시“(고조선의)조선상역계경(歷谿卿)이우거왕에게간하였으나들어주지않으므로동쪽에있는진국으로갔으며그때백성2천여호가따라갔다(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申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는『삼국지』기사에서알수있듯,진국은위만조선의남쪽이아니라동쪽에있었다.또대조영이세운발해의나라이름도진국(振國)이었다.
『후한서』도마한,진한,변진의삼한모두가진국에서발전했고,진왕이목지국(目支國)에도읍하여삼한전체를다스린다고했다.다만도읍을『삼국지』는월지국,『후한서』는목지국이라고하였다.결국진국이삼한전체의전신이었고,어떤계기나사건을통해삼한으로분할된것으로보인다.(『후한서』:한(韓)은3개종류가있다.마한,진한,변진으로나뉘어있으며78국이다.모두옛진국이다(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凡七十八國皆古之辰國也).
그런데일제강점기이래우리사학계가신라,백제,가야가삼한소국들에서발전한국가라고주장했는데,속셈은임나일본부를살리기위해서였다.그래서백제와고구려라는강력한고대국가가기원전에이미존재했다는『삼국사기』의초기기록도부정하였을뿐만아니라원삼국(原三國)시대라는말도이런주장에맞추다보니등장한조어였다.
여기서특이한점은『삼국사기』에고구려태조왕시기고구려와마한연합군이한나라현토성을공략했던기사가있다.또한『삼국사기』백제온조왕기록에서,멸망한마한세력은사학계주장처럼한반도서남부로간것이아니라한산이북에,강제로이주했다고나온다.이어서이지역의주민들이고구려로이주했다는기록이나온다.이것은김부식이추론한마한이온조왕때에멸망했으나고구려와함께요동정벌을할수있는지역에부활했음이사실이라는점을시사한다.또한“마한은고구려,변한은백제,진한은신라다”라고단언하는최치원의삼한론과도일맥상통한다.

부여의기원과건국신화
『논형』에따르면부여는북이(北夷)고리국(槀離國)출신맥족동명(東明)이남하해예족의땅에세운국가이며고리국은탁리국(橐離國)혹은색리국(索離國)이라불린다.『산해경』과『상서대전』및『사기』화식열전기록으로미루어,부여의건국시기는기원전1046년경이전이고,고대국가의성립시기는기원전3세기이전으로추정된다.건국위치는예맥의결합이이루어진상곡북쪽지역곧상곡군(上谷郡)이다.『삼국사기』는북부여는해모수,동부여는해부르를시조로보고있지만,중국사서는동명신화만기록하고있는데,고구려와백제가동명왕사당을만들고제사를지낸것으로보아동명부여가전체의건국시조로보인다.동명신화의기본자료는1세기경에채록된『논형』에근거한다.
한편동명부여는한나라와우호적인관계를맺었다.『한서』에따르면,한나라유방의건국과정에서북맥은군사적지원을했으며,서기121년과122년두차례고구려와마한연합군의한나라현토성을공략시부여가수만병력을보내고구려연합군을깨뜨렸다.그리고신나라왕망의새인수명단에도현토,낙랑,고구려,부여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