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건국시기는조작되었다
고구려건국시기에대한사료는『삼국사기』,『삼국유사』,중국사서로『삼국지』,『후한서』,『책부원귀』(冊府元龜),『북사』(北史),『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등이있다.
①김부식의『삼국사기』본기사론(史論)에서,몇가지단서를찾을수있는데,고구려는기원전221년건국했던진(秦)나라,기원전206년건국했던한(漢)나라시대즉진한(秦漢)시대부터존재했을뿐만아니라중국과국경을마주했던큰나라였다고기록하고있다.
②『책부원귀』외신부(外臣部)를보면,한나라건국(기원전206년)초기고구려추모왕(鄒牟王)이죽었다고분명히밝히고있다.*고구려는한나라초에왕인고주몽이죽고아들여율(如栗)이즉위했다.여율이죽고아들막래(莫來)가즉위했다.(高句麗漢初其王高朱蒙死子如栗立如栗死子莫來立)
③『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보장왕(寶臧王)27년(668년)2월당(唐)시어사(侍御史)가언충(賈言忠)이당고종에게한보고에서보듯,당시당나라사람들은고구려가900년역사의나라라고인식했으며,이런내용이『당회요』(唐會要)와『신당서』(新唐書)고려전에도있는것으로보아이는매우광범위하게유포된것이분명하다.
④『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시봉(始封)에서1124년북송(北宋)서긍(徐兢,1091~1153년)이한말의문맥을보면,위만이나라를차지하여80여년을지나는기간에앞서는때에고구려건국이이루어졌다고서술하여,위만조선건국연대인기원전194년이전에이미고구려건국이이루어졌음을알수있다.
⑤기원전108년고조선이멸망할때이미고구려가있었다는것은『삼국지』및『후한서』에도확인되고있다.
위에서건국시기를추산해보면,고구려는기원전232년이전에는없었고,기원전107년이전에는있었으므로추모왕즉위의간지인갑신년이바로고구려건국시기이다.따라서갑신년에해당하는기원전217년(885년),기원전157년(825년),기원전97년(765년),기원전37년(705년)중에서기원전217년이가장유력하다하겠다.
고구려의핵심강역요동(遼東)
중국고대문헌에나오는요동은본래구주(九州,중국전역을총칭하는말)에서동쪽으로멀리있는지역을의미했다.그런데기원전300년경전국시대연(燕)나라장수진개(秦開)가동호(東胡)를급습하여1천여리의땅에요동군(遼東郡)등5군(郡)을설치하면서요동은요수(遼水)동쪽지역을의미했다.(『전국책』(戰國策),『사기』,『한서』(漢書)등)이때요수는일관되게하북성보정시(保定市)역현(易縣)의남역수(南易水)를가리키고,『사기』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역수(易水)유역에갈석산(碣石山)이있다고하였다.
구체적인예로『전국책』에는연(燕)나라동쪽에조선(朝鮮),요동이있다하였고,『염철론』에는연나라가요동을넘어조선을공격했다는설명이있으며,『산해경』을주석한4세기초의곽박(郭璞)은조선이요동에있던낙랑과동의어라고하였다.
고구려장수왕(長壽王)부터문자왕,안원왕,양원왕,평원왕등에이르기까지중국으로부터받은관작명은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이다(『삼국사기』).고구려가요동군에서나라를열었다는뜻이다.또연개소문장남인연남생(淵男生)묘지명에요동군평양성(平壤城)사람이라고나온다.이는고구려최후의수도인평양성이요동군에있었다는근거다.
『삼국지』는구려(九麗)에서갈라져나간종족이소수(小水)에의지해나라를세웠으므로소수맥(小水貊)이라했는데바로고구려를말한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사론에서“고구려가진한(秦漢)동북쪽에있었다”고했듯,고조선도진한동북쪽요동(遼東)에서진한과경계를접하고있었다.이후고구려가강역을확장하면서고구려영토는요산(遼山)을중심으로사방2,000리였다고전한다.(『주서』(周書)이역(異域)열전과『양서』(梁書)동이열전.여기서요산은바로갈석산(碣石山)을말한다.)이에대한근거로『회남자』(淮南子)추형훈(墜形訓)고유(高誘)주(註)에따르면,요수는갈석산에서발원하여북동쪽에서요동의서부를흘러해로들어간다고하였다.
또수양제(隋煬帝)가제1차고구려정벌에나서면서내린〈벌고구려조서〉(伐高句麗詔書)에서도“고구려사람들이발해(渤海)와갈석산사이에살고있다”고했다.이처럼모본왕과태조대왕때부터요동을놓고다투던고구려는다시선비족의전연(前燕),후연(後燕)등과요동을놓고혈전을벌였다.391년광개토태왕이즉위하여요동지역을모두회복하게되었고,마침내장수왕시절수도를요동가까이에있는평양성(平壤城)으로옮기면서고구려는본격적으로대륙경영에나서게되었다.그리하여『통전』에서기록한바와같이동서6,000리의대제국이되었다.
고구려역사를가공한주체는누구인가?
『책부원귀』(冊府元龜)를보면,한나라건국(기원전206년)초기에고구려추모왕이죽었다고분명히밝히고있다.이는고구려가한나라건국이전에이미건국되었으며,기원전3세기에건국되었다는900년설이당시널리알려져있었다.또한각종고대사서를모아1,000권의책으로집약하던『책부원귀』편찬자들이고구려역사700년설을모르고기술하였을가능성도별로없어보인다.
그런데『삼국사기』에기록된광개토태왕은혈통의부자지간으로계산하면추모왕의12세손에불과하다.그러나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비문에는시조추모왕이후고명세자인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등호태왕이추모왕의17세손이라했다.따라서추모왕17세손으로나오는광개토태왕때까지고구려역사는최소5대이상의왕이누락되었다.
고구려건국시기를끌어내리려는첫시도는신라중기문무왕(文武王)때에확인된다.곧『삼국사기』신라본기를보면,고구려건국이한무제(漢武帝)의고조선침략이후라는고구려건국800년설을취했다.이후8세기에오면신라의역사편찬자들은고구려건국시기를추가로100년이상끌어내려,기원전37년세워졌다는705년설을주장하였다.예를들어『해동고기』는추모왕의고구려건국연도가한나라효원제건소2년(기원전37년)이라고기록하였다.이는신라정통설을확보하기위해조작한것으로보인다.
결정적인것은김부식의『삼국사기』이다.『삼국사기』지리지에서김부식은『통전』에따르면고구려건국이한나라건소(建昭)2년이라고기록했다.그러나『통전』에그런원문은보이지않는다.가필한것이다.
무엇보다김부식의『삼국사기』는짐과태자대신과인과세자란호칭을쓰는등중국에대해사대주의적관점에서쓰였다.또삼국시대를신라중심으로바라보고삼국시대이전역사와고구려,백제,발해역사의상당부분을누락시켰다.
결국고구려역사를가공한주체는후대의신라와고려시대김부식의『삼국사기』이다.
길림성환인현과집안현일대가고구려평양성이아닌이유
중국길림성환인현과집안현일대는고조선은물론부여,고구려의도읍지가아니다.왜냐면고구려도읍지였음을증명할수있는고고학적유물이출토된적이없기때문이다.또북위로부터요동군개국공으로책봉된장수왕이,요동을개척했던부왕의업적을기록한광개토대왕비를왕릉도없는수천리떨어진한반도압록강의외딴곳에세워놓았다는것은설득력이없다.이는일제가조작한고구려수도를기존역사학계가그대로추종한것일뿐이다.
요동은대륙을경영하기위해서는꼭필요한요충지이다.때문에장수왕(長壽王)은광개토태왕이수복한요동근처평양성(平壤城)으로천도했다.중국사서들은고구려도읍지가당나라평주(平州)노룡현(盧龍縣)구체적으로요수(遼水)와패수(浿水)동쪽이라고기록하고있다.고대요수는하북성보정시에있는남역수(南易水)이고,패수는보정시정흥현의계조하(鷄爪河)이다.
따라서고조선왕검성과고구려평양성은남역수와계조하의동북쪽하북성보정시(保定市)정흥현(定興縣)고성진(固城鎭)지역으로추정된다.
고구려평양성은어디인가?
패수에인접했던고조선왕검성(王儉城),고구려평양성,발해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고대요동혹은낙랑에속했던우리민족의핵심강역으로오늘날하북성보정시정흥현일대다.
장수왕은15년(427년)평양(平壤)으로왕도를옮겼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했는데,남조송(宋)나라효무제때에편찬된『송서』(宋書)는“이때고구려가한나라때의요동군을지배했다”고기록하고있다.또연개소문아들연남생과연남산(淵男產)묘지명에는“연남생은요동군평양성사람,연남산은요동조선인이다”고기록하고있는것으로보아평양성이당시요동군(遼東郡)에있었음을알수있다.
“평양성은한나라시대낙랑군(樂浪郡)옛땅이다”(『구당서』와『신당서』)는지적처럼,결정적으로『통전』(通典)은“진(晉)나라가한나라낙랑군땅에평주를설치하였고,후위(後魏)즉북위때고구려가평주를점령하고도읍(평양성)으로정했다”고쓰고있다.
또한남송(宋)시대왕응린(王應麟,1223~1296년)이편찬한『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후위시대에고구려가평주에도읍을정했고,고구려가멸망한이후당나라가평주에안동도호부를설치했다”고했다.
그러면장수왕평양성이있었던평주노룡현은구체적으로어디일까?
『통전』에의하면,당나라평주치소인평주성은노룡성으로불렀고,노룡현(盧龍縣)에있었다.평주위치는『구당서』와『여지광기』(輿地廣記)를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구당서』는당나라번진(藩鎭)가운데하나인노룡군치소가평주성에있었고,평주치소와더불어노룡군치소도겸했다고했으며,『여지광기』는당나라천보(天寳,742~756년)연간유주범양군(范陽郡)이노룡군으로승격되었다고하였다.노룡군은본래범양군이었으므로평주와더불어노룡군치소였던평주성역시범양에있었다는의미다.결정적인것은송나라나필(羅泌)의『로사』(路史)인데,노룡에조선성(朝鮮城)이있다하였다.여기서노룡의조선성은당연히고조선왕성,왕검성(王儉城)을가리킨다.『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도“평주노룡현에조선성이있다”고기록하고있다.
따라서장수왕평양성은바로평주성,노룡성,조선성,왕검성이고,당나라평주노룡현에있었다.
천문학으로확인하는고구려초기왕도평양성
〈천상열차분야지도〉의별자리와『삼국사기』일식기록을연구한박창범교수는당시별자리와일식을관찰했던최적지를밝혀내고구려초기왕도위치를비정했다.
먼저〈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중앙부별들의최척의관측지는한반도서울이었으나바깥지역별들은기원전후고구려초기별자리로관측되었다.그러므로고구려초기왕도는위도39°~40°범위에서찾아야한다.
둘째『삼국사기』일식기록은일식을볼수있는지역이늘같은지역으로나왔으므로,삼국이각각의왕도에서꾸준하게관측한실측자료임을뜻한다.그런데관측의정확성을위해일식의실현율을연구한결과고구려,백제,신라의일식기록은모두평균80%의높은실현율을보인반면중국사서는가장높을때가78%이고낮을때는63~75%로나왔으며,일본사서는950년이전기록은33%〜35.2%이고950년에서1550년사이에는실현율이72.5%였다.
셋째2~3세기고구려는하북성북쪽과내몽골지역이었고,백제의관측위치는발해만유역이었다.반면201년이전상대(上代)신라의일식최적관측지는장강(長江)유역이었으나787년이후하대(下代)신라는한반도남부였다.
넷째이는삼국모두일식의최적관측지가한반도가아니라중국이었음을시사하며,삼국의왕도또한마찬가지로중국이었음을짐작하게한다.
『삼국사기』일식기록은삼국이각각독자적으로관측하여나온자료이며,우리사서기록이중국과일본보다더과학적임을알수있다.
사서(史書)에기록된평양성위치를구글지도로검증한다.
1.패수하구부터평양성까지거리가약60리였다는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