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찾아보는 이중섭 흔적 - 예술문화총서 11

부산에서 찾아보는 이중섭 흔적 - 예술문화총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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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중섭의 삶이 바뀐 1950년 12월 9일
흩어진 조각을 이어붙여 부산에서의 삶을 복구하다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중섭. 그는 1950년 12월 9일 6·25 전쟁을 피해 부산에 도착했다. 1956년 사망 전까지 부산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가장 오래 머물렀으나 부산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왜 부산은 그를 잊어버렸을까. 이 책은 그 의문에서 시작됐다. 피란민으로서 이중섭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화가로서 부산 어디서 무엇을 그렸을까. 가장으로서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을까. 저자는 책과 회고담, 기사를 이어 붙여 부산에서의 이중섭을 재구성했다. 『부산에서 찾아보는 이중섭 흔적』을 통해 1950년 부산에서의 화가 이중섭을 만나보자.

이중섭에게 부산, 부산에게 이중섭

이중섭에게 부산은 ‘피란민이라는 원형’을 꼬리표로 달게 된 곳이자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장소이다. 가난한 생활과는 반대로 북에서 억압당했던 예술 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부산은 이중섭에게 예술 정신의 자유를, 생활의 어려움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심어준 곳이다. 그렇기에 부산에서의 이중섭을 복원하고 부산에서의 예술 활동을 살피는 것은 이중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중섭이 부산에서 그린 그림 중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1953년 11월 발생한 부산역전 대화재로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빈 여백을 메우기 위해 여러 자료를 면밀히 조사했다. 〈판잣집 화실〉의 배경을 주장하는 여러 가설 중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 속 집의 형태를 근거로 부산 영주동 설을 지지한다. 나아가 영주동 판자촌 모습을 통해 이중섭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또한 이중섭의 상징인 은지화가 시작된 부산 다방가의 풍경을 묘사하고 이중섭이 자주 다녔을 경로를 추측하며 이중섭의 발자취를 좇는다. 〈문현동 풍경〉과 〈범일동 풍경〉의 배경이 된 부산의 과거 모습과 현재 모습을 함께 보여주어 그의 그림을 현재 부산과 겹쳐보기도 한다. 부산은 이중섭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감정을 안겨주었고, 이중섭은 부산에게 피란수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주었다.

궁핍한 피란민 생활 속에서도 타오른 예술에 대한 열정

원산에서 LST를 타고 부산에 기항한 이중섭은 부산 적기 피란민 수용소에 들어갔다. 당시 이중섭이 가진 것은 입은 옷가지와 미술도구가 전부였다. 저자는 당시 피란민의 모습을 통해 부산에서의 이중섭의 삶을 추론한다. 피란민의 생활상을 알 때 이중섭의 예술적 열의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의 생활은 궁핍했다. 배급받는 식량은 적었고 추운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자야 했다. 피난소 안에서 얼어 죽기도 했다. 부두 노동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생각을 했던 이중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중섭은 예술을 놓지 않았다. 장소와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담배 속 은지, 장판지에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는 예술지상주의자였다.
당시 피란민들의 고달픈 삶은 이중섭을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미군이 버린 ‘씨-레이션’ 박스로 판잣집을 만들어 생활했던 피란민의 거주 환경을 우리는 이중섭의 〈판잣집 화실〉과 〈범일동 풍경〉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피란 수도 부산의 어제와 오늘

이 책은 부산에서의 이중섭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집중한다. 우암동에 존재했던 적기 피란민 수용소와 피란촌의 모습, 범내골, 문현동, 영주동의 내력을 통해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버티고 피란민을 수용했던 부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한국전쟁과 피란민의 흔적은 옅어졌지만 역사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저자가 보여주는 과거의 부산과 현재의 부산을 통해 부산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저자

정석우

저자:정석우

안가본길가보는것이취미이기는하나대개부산근교일뿐이다.부산에관심이있는것은무슨사명감이있어서가아니고살다보니자연스럽게생긴호기심때문인것같다.부산여기저기를오가며만나는것들을기록할수있으면좋겠다는생각을가지고있다.

목차

들어가면서

1장50년12월6일,원산
2장50년12월9일,부산적기피란민수용소
3장51년12월범내골,“범일동‘하꼬방(판잣집)’”
4장52년6월,이남덕의일본행
5장이중섭과돈
6장52년여름,동천아틀리에
7장52년가을,영도대한도기작업실
8장52년겨울,문현동판잣집
9장부산의다방과이중섭
10장53년봄,대청동1가20
11장53년여름,가을,영주동〈판잣집화실〉
12장광복동검문소

맺음말

출판사 서평

이중섭에게부산,부산에게이중섭

이중섭에게부산은‘피란민이라는원형’을꼬리표로달게된곳이자가족을일본으로떠나보낸장소이다.가난한생활과는반대로북에서억압당했던예술활동을마음껏펼칠수있었던공간이기도하다.부산은이중섭에게예술정신의자유를,생활의어려움을,가족에대한그리움을심어준곳이다.그렇기에부산에서의이중섭을복원하고부산에서의예술활동을살피는것은이중섭을이해하는데중요하다.

이중섭이부산에서그린그림중현존하는것은많지않다.1953년11월발생한부산역전대화재로그의작품대부분이소실되었기때문이다.저자는빈여백을메우기위해여러자료를면밀히조사했다.〈판잣집화실〉의배경을주장하는여러가설중이중섭의편지와그림속집의형태를근거로부산영주동설을지지한다.나아가영주동판자촌모습을통해이중섭의일상을구체적으로파고든다.또한이중섭의상징인은지화가시작된부산다방가의풍경을묘사하고이중섭이자주다녔을경로를추측하며이중섭의발자취를좇는다.〈문현동풍경〉과〈범일동풍경〉의배경이된부산의과거모습과현재모습을함께보여주어그의그림을현재부산과겹쳐보기도한다.부산은이중섭에게새로운정체성과감정을안겨주었고,이중섭은부산에게피란수도의모습을그림으로남겨주었다.

궁핍한피란민생활속에서도타오른예술에대한열정

원산에서LST를타고부산에기항한이중섭은부산적기피란민수용소에들어갔다.당시이중섭이가진것은입은옷가지와미술도구가전부였다.저자는당시피란민의모습을통해부산에서의이중섭의삶을추론한다.피란민의생활상을알때이중섭의예술적열의를오롯이느낄수있기때문이다.수용소의생활은궁핍했다.배급받는식량은적었고추운바닥에가마니를깔고자야했다.피난소안에서얼어죽기도했다.부두노동으로가족을먹여살릴생각을했던이중섭도마찬가지였을것이다.그럼에도이중섭은예술을놓지않았다.장소와재료에구애받지않고담배속은지,장판지에그림을그렸다.이중섭은어떤상황에서도그저그림을그리고또그리는예술지상주의자였다.

당시피란민들의고달픈삶은이중섭을통해서도읽어낼수있다.미군이버린‘씨-레이션’박스로판잣집을만들어생활했던피란민의거주환경을우리는이중섭의〈판잣집화실〉과〈범일동풍경〉을통해유추해볼수있다.

피란수도부산의어제와오늘

이책은부산에서의이중섭뿐만아니라부산에도집중한다.우암동에존재했던적기피란민수용소와피란촌의모습,범내골,문현동,영주동의내력을통해일제강점기를지나한국전쟁을버티고피란민을수용했던부산의이야기를들을수있다.한국전쟁과피란민의흔적은옅어졌지만역사성은그대로남아있다.저자가보여주는과거의부산과현재의부산을통해부산의의미를되새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