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설탕이 아니라 마스코바도 (필리핀 빈농의 설탕이 공정무역 상품이 되기까지)

흑설탕이 아니라 마스코바도 (필리핀 빈농의 설탕이 공정무역 상품이 되기까지)

$16.00
Description
설탕으로 쌓아올려진 나라, 필리핀
필리핀 설탕사史이자 설탕으로 본 필리핀사,
그리고 필리핀 설탕을 둘러싼 공정무역사

≪대한민국 치킨展≫, ≪라멘의 사회생활≫에 이어 ‘따비음식학’ 시리즈 세 번째 책이 나왔다. 이번엔 필리핀 설탕 이야기다. ‘음식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자’ 하는 시리즈 기획 의도답게, 비단 필리핀 ‘설탕’ 이야기만이 아니라 ‘필리핀’ 설탕 이야기이며, 또한 필리핀 설탕을 둘러싼 공정무역사를 다룬 책이다. 그렇다면 질문. 한국에 치킨, 일본에 라멘이야 너무나도 분명한 연결고리가 보이지만,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설탕을 통해 필리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물론이다. 설탕은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먹는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설탕 원료인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아)열대 기후가 필요하다. 이는 다시 말해 사탕수수 재배지이자 설탕 생산지가 일정한 지역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설탕을 대체할 각종 감미료가 개발된 지금과 달리) 한정된 생산지에서 가능한 한 많은 설탕을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설탕의 역사는 세계의 착취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리핀은 사탕수수 재배지이자 설탕 생산지, 식민 지배로 착취당한 나라이자 그렇게 생산된 설탕으로 쌓아올려진 나라였다. 설탕을 통해 필리핀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단순히 필리핀의 기후, 지형, 산업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의 근현대사 전체가 설탕과 맞물려 있다.
저자

엄은희

서울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선임연구원으로정치생태학자이자동남아전문가다.한국과동남아시아의환경이슈,농업·농촌·농민,개발협력,대안개발,해외한인기업등을연구해왔다.
논문으로〈공정무역생산자의조직화와국제적관계망〉,〈환경부정의의공간성과스케일의정치학〉,〈메콩의에너지경관〉,〈팜오일의정치생태학〉등이,공저로《말레이세계로간한국기업들》(2014),《세계의시장을가다》(2017),《통합사회를위한첫걸음》(2018)이있다.

목차

1장‘마스코바도’를아십니까?
설탕계의현미,마스코바도
세계속의설탕,한국의설탕
설탕의세계사
필리핀에서의설탕의의미

2장일곱개의키워드로필리핀이해하기
바랑가이:전통사회의기원
동남아의관문국가:태평양건너찾아온이방인들
종아래사는사람들:스페인식민시대의유산
영어와미국화:미국식민시대의유산
필리핀의최대수출품?
피플파워의기억:변화의희망은풀뿌리에

3장필리핀역사에서설탕의위치
전통사회의설탕:자연의선물
스페인식민시대의설탕:하시엔다의출발
개항(1834)이후필리핀설탕(1):영국의영향과수출의본격화
개항(1834)이후필리핀설탕(2):설탕산지의확대와토착엘리트의등장
미국식민시대의필리핀설탕:약속된시장
독립이후필리핀의설탕산업:슈가블록의승리
마르코스집권기의설탕산업
설탕때문에울다:1984년설탕섬최악의기아사태
마스코바도로다시일어서다:원조가아닌교역의시작

4장파나이섬과마스코바도
파나이로가는길
파나이공정무역센터의출발
마스코바도생산의시작
사회적경제를실천하는PFTC
파나이의마스코바도생산자들
PFTC의지역사회에대한경제적기여
PFTC의조직적발전과정체성
한국의생협과파나이마스코바도생산자의만남
설탕공장이선물한지역사회의변화
AFTC설립이후PFTC의변화

5장공정무역,연대로만드는희망의거래
공정무역이해하기
공정무역의태동과지구적확산
지금,세계의공정무역
공정무역운동의지역화,공정무역마을운동
공정무역과설탕
한국의공정무역:15년의역사

6장나가는글

부록1루스살리토의이야기
부록2로메오카팔라이야기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마스코바도’를아십니까?

이렇게묻는다면‘예’라고대답할이가몇이나될까?생소하게들리는이단어는‘필리핀에서전통적인방식으로생산된비정제설탕’을가리킨다.이간단한설명만으로는잘이해가가지않는다.좀더부연하자면,마스코바도나우리가시중에서구입하는백설탕이나원료가사탕수수인것은같다.다만이둘을구분짓는것은기계식정제과정을거쳤느냐,거치지않았느냐다.사탕수수원액을설탕입자로만들어주는이정제과정에서는불순물이걸러지지만,동시에사탕수수에포함된미량의영양물질까지걸러진다.이러한영양물질은곱고일관적인설탕입자가만들어지는것을방해하는당밀형태를취하고있어대량생산공정에서는이를제거하고순수자당을추출해낸다.이것이백설탕을만드는근대식설탕공장에서핵심적인공정이다.이에반해마스코바도를비롯한비정제설탕은제조공정에서불순물을제거하되,대형공장에서와같은당밀제거과정을거치지않기때문에사탕수수에함유된영양물질이고스란히남아있다.요컨대마스코바도는설탕계의현미나다름없는존재다.
세상에꼭필요한것들을설명할때흔히‘빛과소금’이라는비유를들곤하지만,우리는하루에소금보다도설탕을더많이섭취한다.커피,청량음료,빵,과자등만이아니라일상적으로먹는찌개며반찬에도들어가기때문이다.이는비단한국에서만그런것이아니다.전세계적으로도그렇다.양으로만따진다면,설탕은전세계인이가장많이,가장자주먹는것중하나다.
가와기타미노루가쓴≪설탕의세계사≫에따르면,설탕은최초의세계상품이다.설탕은전세계인이좋아하는것이자,근대초기부터세계적으로널리거래된상품이다.16세기이래근대의역사는이러한세계상품(설탕,차,커피,향신료등)에대한패권을놓고유럽열강들간치열한경쟁을벌여온역사였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그중하나인향신료는(이미너무나도잘알려져있듯이)세계를재편하다시피했다.포르투갈,잉글랜드,네덜란드의아시아식민지들은향신료를찾아떠난항해에서시작됐다고할수있다.향신료로인해수많은이들이부를축적하거나목숨을잃었고,제국들이조성되었다가파괴되었으며,심지어새로운대륙이발견됐다.
그렇다면설탕은어땠을까?

설탕의세계사,설탕의필리핀사

프랑스소설가베르나르댕드생피에르는이렇게말했다.“나는커피나설탕이유럽의행복을위해서꼭있어야하는것인지는잘모르겠다.그러나그것들이지구상의커다란두지역에불행을초래했다는사실은잘알고있다.”
주지하다시피설탕이세계상품으로등장한과정은매우폭력적이었다.아메리카는사탕수수를경작할땅으로충당되느라인구가줄었고,아프리카는그것들을재배할인력에충당되느라허덕였다.다양한생태종이어울려살던열대우림은대규모로벌채됐다.토착민공동체의땅은강탈되어대규모플랜테이션으로조성됐다.요컨대아주오랫동안상류층만이향유할수있었던이‘하얀금’이지금처럼일상적인식품으로자리매김하는과정이면에는다른세계의‘저발전’이자리하고있었다.노예노동,대규모단작플랜테이션은막대한희생을필요로했다.생태계파괴는물론,인적구성까지도뒤바뀌었으며,그렇게재배한농산물가격이폭락하기라도하면엄청난경제적타격을입어야했다.
필리핀은그러한저개발국중하나였다.정확히말하자면설탕산지(중·남아메리카),노예들의출신지(아프리카),설탕의주소비처(유럽,특히영국)를중심으로서술된설탕의세계사에서필리핀은조금비껴나있다.필리핀에사탕수수플랜테이션이들어온것은이미노예제가폐지된이후였으며,이마저도다소뒤늦게이루어졌다.333년간필리핀을식민지배했던스페인은,200년이상필리핀을선교지혹은중개무역의중간기착지로만활용하다가18세기말에서야사탕수수플랜테이션을도입했다.식민지경영비를현지에서조달하기위해서였다.그리고같은일들이벌어졌다.나무가베이고,정글이사라지고,(노예대신)가난한임노동자들이사탕수수재배지로들어왔으며,다른산업이발달할여지없이설탕산업이비대해지면서미국시장(미국은필리핀농산물의가장큰수입국이었다)에대한의존도가비할데없이커졌다.여기에는사탕수수를재배하던농업자본가들이국가나사회의발전보다사적이익을추구하면서미국에의존적인농업국가로남기를원했다는점도작용했다.즉필리핀설탕사를살펴본다는것은,설탕을통해부를축적한필리핀지배계층의형성배경을,나아가필리핀근현대사를살펴보는것이기도하다.

설탕에울고설탕으로다시일어서다

≪흑설탕이아니라마스코바도≫라는제목대로,마스코바도는언뜻보기에흑설탕처럼생겼다.시중에서흔히볼수있는황설탕보다색깔이짙어서다.굵은입자에,일정량의수분을함유하고있어약간끈적거리는점도닮았다.그런데,이비정제설탕에대해우리가더알아야할것이있을까?백설탕에비해건강에좀더좋으리라는점말고?
앞서말했듯설탕은전세계인이가장많이,가장자주먹는것중하나다.쌀이나밀가루처럼주식삼아먹는것은아니더라도생필품이된지오래다.그리고이‘설탕’은점점하나로좁혀지고있다.바로입자가고운백설탕이다.필리핀에서전통적인방식으로만드는마스코바도는점차자취를감추고‘슈가센트럴’(근대식제당공장)이가파르게늘어난것도입자가고운백설탕을생산하기위해서였다.미국시장은새하얀설탕을선호했기때문에.이과정에서마스코바도는정제설탕에비해가치가떨어지는것혹은낙후된것으로받아들여지기시작했다.요컨대설탕의대중화를떠받친것이세계의불균형이었듯이,필리핀설탕산업을떠받친것역시이러한세계의불균형이었다.필리핀은미국을위해설탕을생산했고,미국은이를싼값에사들였다.이러한불균형한판위에서,설탕을대체할감미료들이개발됨에따라설탕수요가줄어들고국제설탕가격이하락하자필리핀설탕산업이고꾸라진것은어쩌면당연한일이었다.
마스코바도는그에대한대안으로서제시된것이었다.일반마트진열대에서야쉽게찾아볼수없지만,생협매장에서는진열대한편을차지하고있다.‘공정무역상품’으로서말이다.흔히공정무역하면턱없이많은마진을떼어가는중간유통업체없이농부들에게제값을치르고사는상품들을떠올리곤한다.공정무역커피,공정무역차,공정무역초콜릿등.맞다.마스코바도역시불균형한판위에올라서는대신,공정한값을치러줄소비자들에게연결되고자애쓰고있다.그렇지만이책이말하고자하는바는단순히마스코바도를,공정무역상품을사자는것이아니다.제3세계의농부들에게서‘제값’에상품을사는것은너무나도당연한일이다.우리가넘어서야할것은좀더싼대량생산품에대한유혹이아니라,‘착한무역’이라는프레임이다.공정무역은플랜테이션농업을기반으로한불균형한판을바꾸지못한다는비판에자주맞닥뜨리곤하지만,그러나(원조가아닌교역으로서)공정무역을이어가는일은생산지에작지만구체적인변화를가져다준다.사탕수수생산자들에게적정한수입과지속적인고용을보장함으로써삶의안정성이높아졌을뿐만아니라,이들은미래를‘계획’할수있게됐다.말하자면무언가를계속도모할수있는발판을마련한것이다.모두가알고있듯이,변화는쉽게찾아오지않는다.무언가를바꿔내기위해서는아주오랜시간이,크나큰인내심이,지난한싸움이필요하다.따라서공정무역은거래에앞서생각을바꾸는적극적마주침이어야하며,사회를변화시키는운동이어야한다.
어쩌면이렇게다시보는설탕혹은설탕의역사는단맛보다는쓴맛에가까울지도모른다.그렇지만단맛뒤에숨은쓴맛을맛보는순간,또하나의세계를좀더잘이해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