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정에 결혼했다 - Endless 2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 - Endles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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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2006년 등단 후 첫 출간된 한지수 작가의 소설집으로 문단에서 호평받은 작품성이 탁월한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었다. 일곱 편의 작품들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수작들로, 특유의 빛나는 감성과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주변부에 머무르지 않고 먼 나라 낯선 이국의 심층부까지 이르고 있어 서사의 영역이 두루 광범위하다. 화자가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 몸속의 자궁이 되기도 하고 외국에서 이주해 온 동남아 여성이 되기도 한다. 국적과 성별, 사회적인 지위를 아우르는 작가의 시선과 주제의 스펙트럼이 눈부시다. 동시에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고 성실한 자료 조사와 깊이 있는 사유로 등장인물의 내면과 환부의 고통 한가운데를 직시하는 끈질긴 산문정신이 소설 쓰기의 전범을 보여준다. 생명의 기원, 사랑의 고뇌, 인간 관계의 단절, 야만적 폭력에 저항하는 절박한 외침이 담긴 그의 작품들은, 소설가 서영은의 표현대로 삶의 오묘하고도 격정적인 지도로서, 독자를 사로잡을 것이다.

당신에게 내 주소를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당신이 지금처럼 배꼽에 손목을 대고 아래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면, 바로 그 위치에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내가 있다. 횡격막 아래의 골반 안쪽에서 당신과 더불어 39년째 살아왔다.
나는 당신의 자궁이다.

저자

한지수

저자:한지수
경기도평택에서태어났다.한신대학교국어국문학과를졸업하고동대학대학원에서문예창작학과석사학위를받았으며,명지대학교대학원에서문예창작학과박사과정을수료했다.2006년《문학사상》신인문학상에중편소설〈천사와미모사〉가당선돼등단했다.소설집《자정의결혼식》,장편소설《헤밍웨이사랑법》《빠레,살라맛뽀》《파묻힌도시의연인》《40일의발칙한아내》를펴냈다.

목차


작가의말
미란다원칙
열대야에서온무지개
천사들의도시
배꼽의기원
이불개는남자
페르마타
나는자정에결혼했다

출판사 서평

‘내몸의피를갈고싶은’사람들의슬픔

‘내몸의피를갈아버리고싶은’사람이있다.소심한성격에서벗어나기위해,타인의요구로부터자유롭지못한삶을살아온우유부단함때문에,또는열등감과소외의식때문에그들은자신의피를모두다른피로갈아넣고싶을만큼고통스럽다.『페르마타』에서주인공인치과의사는성공을강요하는어머니에게서악착같이의사가되길바라는아내의삶으로이동하며자신의정체성과존재가치를잃어버린다.한번도자신이원하는삶을살아보지못했던그는‘공황이가장고통스러운순간에,자신을구하는수단’이라는말처럼탈출구를끝내찾지못한사람이다.작가는『미란다원칙』의착하게살고싶지않은사회복지사와공황장애를앓는치과의사를위해잠시쉬어갈수있는『페르마타』를구상했다고말한다.(이탈리아에서는정거장을페르마타라고표시한다.)한편『열대야에서온무지개』에등장하는사이란은태국에서이주해한국남자와살고있는여성이다.그녀는남편과의관계를어렵사리회복하면서서툰한국말로‘한우를낳고싶다’는고백을한다.소를수입해서3년간기르면‘국내산’이라고표기할수있지만진짜한우는본래이땅에서태어나자란소를말한다는남편의설명을듣고그녀가내린결론이다.진짜가되고싶은열망,이주민이아닌정착민으로서온전히그들과동등해지고싶은꿈은어떤사람들에게는‘생존’의의미가되기도한다.

불친절한세상에대한화답

저자는2010년10월첫소설집을내면서‘나를둘러싼불친절한세상에감사한다’라고말했다.‘만약세상이내앞에서언제나친절했다면,소설쓰기를계속했을까’라는질문을던지며,그러한환경이의식을확장하고세계관을갖는데밑거름이되었다고밝힌다.이소설집에실린일곱편의작품들은모두저자가소설을쓰기위해직접그공간을방문하고문제의식에치열하게천착한끝에얻어낸결실이다.『천사들의도시』주인공인제임스를만나기위해방문했던필리핀의앙헬레스시티.그곳에서본이민자들의모습이소설로이어졌고,오산시청에서주최하는다문화가정의도우미로일하며여성들에게한국어를가르친경험이『열대야의무지개』로피어났다.여성과자궁에대해공부하여『배꼽의기원』을창작했으며마감날짜에쫓겨소설의배경이된모텔방506호에입실해피말리는자기와의싸움끝에쓴소설이『이불개는남자』이다.르네마그리트의그림에빠져초현실적인세계의풍경속에서그리듯쓴소설이『나는,자정에결혼했다』이다.저자는이소설속에등장하는모든이들이진심으로행복하기를,간절한마음으로응원한다.

책속에서

어딘가에서‘똑똑’문두드리는소리가들리는것같았다.그렇게해서서툴고조심스러운그꽃들의위로가시작되었다.마치내마음의문을노크하듯이,뜨겁고축축한아이들의손이다투어가며내등을두드렸다.
---p.27

‘여우는팔부능선의전망좋은언덕에굴을판다.’사이란은내레이터를따라‘여우’라고발음하면서티브이앞에섰다.화면안에서는은색빛이흐르는여우가필사적으로땅을파헤치고있다.
---p.47

소를수입해서3년간기르면‘국내산’이라고표기할수있어.하지만,한우는이땅에서태어나고자란소들에게만‘한우’라고할수있는거야.
---p.56

내가샤워를오래하는날이면아내는여지없이생리하는것이다.세상의아내들은다생리를자주하는지궁금하다.이번달에는벌써세번이나했으니,네번못하라는법도없다.한달내내생리를하는셈이다.언젠가참다못한내가물컵을소리나게내려놓으며화를냈더니,아내는그컵에다시물을따라주면서조용히말했다.정신적인출혈도있는법이에요……그러나아내는내머리에서일어나는뇌출혈은전혀모른다.게다가아랫도리에서일어나는혈액순환장애는더심각하다는걸.
---p.111

“억울해하지말아요,당신이갇힌곳은오만한자들의교도소니까요.때가되면다나오게되어있어요.물론나도거기갇혀있기는마찬가지고요.”
---p.134

다시한번발을구르는데,어디선가내이름소리가들린다.제임스으.귀신이내는소리가저럴까.‘스으’하고부르는신호처럼이상한울림이느껴지다가바람속으로사라져버린다.미모사잎을떼어내려고엎드리는데,다시내이름이들린다.‘스으’하는여운이길게남는다.내가막고개를돌리는순간,팡소리와함께눈앞에서하늘거리던미모사잎들이일제히움츠러든다.
---p.155

당신에게내주소를다시말해주어야겠다.당신이지금처럼배꼽에손목을대고아래를향해주먹을쥐어보면,바로그위치에주먹보다조금작은크기의내가있다.횡격막아래의골반안쪽에서당신과더불어39년째살아왔다.
나는당신의자궁이다.
---p.163

당신은옆을응시하고있는독수리의눈동자가,재킷에채워진한개의단추와정확히일직선상에놓여있는것을발견한다.그것이무슨수수께끼같아서또다시섬뜩해진다.혹시당신이모르는삶의잔혹한비밀이숨어있는게아닐까.
---p.273

당신몸은쑥쑥자라난다.뇌수를갉기전에당신은잠시고개를든다.그리고몸통을길게한번꿈틀거리고는뇌수속으로들어간다.잎은순식간에앙상한잎맥만남는다.잠시후,거대한나뭇잎한장이쓰러진다.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