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존재하는 인간 - Endless 3

겨우 존재하는 인간 - Endles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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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997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오랫동안 절판되어 희귀도서로 고가에 판매되었던 이 도서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징후를 포착하여 쓴 도발적인 작품으로 형이상학적 삶의 불안과 실존의 문제에 천착한 알베르 카뮈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연상케 한다.
소설가 정영문의 데뷔작이자 첫 소설이기도 한 이 장편소설은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적인 삶의 궤도를 의심하고 해부한 작품이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분노 범죄가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이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예언적 통찰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기도 하다. 일상의 탈출 욕구가 한순간에 파괴 충동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독자는 삶의 맹목성에 저항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본질을 꿰뚫고 나아가려는 집요한 시선과 끈질긴 문체가 독창적인 소설의 압도적 경지를 보여준다.

나는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나의 움직임 속에서도 살아있지 않다.

유리창에 비친 나는 이미 죽은 나이다.

나는 부재 속에서 존재하고, 그 부재는 나의 삶의 환경이다.

저자

정영문

저자:정영문
1965년경남함양에서태어나서울대학교심리학과를졸업했다.1996년『작가세계』에장편소설《겨우존재하는인간》을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으로《검은이야기사슬》《나를두둔하는악마에대한불온한이야기》《더없이어렴풋한일요일》《꿈》《목신의어떤오후》《오리무중에이르다》가,장편소설로《겨우존재하는인간》《핏기없는독백》《달에홀린광대》《하품》《중얼거리다》《강물에떠내려가는7인의사무라이》《바셀린붓다》《어떤작위의세계》《프롤로그에필로그》등이있다.동인문학상,한무숙문학상,대산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작가의말
겨우존재하는인간
환멸
해설
김경수삶의권태와소설쓰기

출판사 서평

집요한관찰자의시선에서가차없는집행자로변신

이소설은삶에내던져진불가피한운명속에서하루를살고있다고생각하는한권태로운인간에관한이야기다.교사였던주인공은자신의의지로다니던학교를그만둔후부모가주는생활비를받아살고있다.하지만그는거리의노숙자와다름없는일상을살아간다.공원의벤치에앉아있거나길거리를하염없이배회하며지나는사람들과지렁이같은미물을관찰한다.그는자신을보잘것없는존재이고이세상과아무런관련이없으며아무것도아닌존재라고자기를평가절하한다.삶자체가쓰레기더미와같다고생각하는그에게타인의삶도무가치해보일뿐이다.

그는아내를죽였다고고백하는남자를목졸라죽인다.특별한동기도이유도없는살인이었다.그리고그는지렁이를보면서그와하나가되는일체감을느낀다.작가는상식적으로는이해할수없는주인공의생각과행동을통해세기말의일탈욕망과문명의병리적징후를포착해내고있다.

나는누구이고당신은누구인가?

알베르카뮈의「이방인」에서주인공뫼르소는자기를낳아준어머니가사망했다는소식에도별다른감흥을느끼지못한다.“어머니가죽었다.아니어제였던가.잘모르겠다.”라고하며다음날여인과관계하는패륜적인행동을서슴지않는다.단순히강렬한햇빛에눈이부신다는이유로자신과아무관계도없는타인을총살한뫼르소는죄책감조차느끼지못한다.정영문의소설속에서도주인공은어머니를보며살해충동을느낀다.열한살때의소년시절의그가그랬던것처럼이층방에있는어머니를강아지처럼내던져버리는상상을하기도한다.끔찍한욕망에사로잡혀분열하던정신은급기야현실을부정하고망각하는단계에이른다.그는자신을억압하고지나친사랑으로자신의삶을망가트린어머니를기억속에서지워버린다.결국어머니라는가장익숙한존재는‘내가처음보는여자’로전락하기에이른다.이작품은특별한이야깃거리나극적인전개,인물간의갈등은없으나묘하게읽는이의마음에파문을일으키며전율을안긴다.

책속에서

야만적인꿈은,그것보다더야만적인현실의잠으로부터나를깨워준다.
---p.5

나는더이상나의몸이내게달려있지않고다른어떤곳에있는것처럼,단지나는나의육체의흔적만을갖고있는것처럼느껴진다.실제로나의몸은내게서분리되어밤과함께기어들어온어둠속에떨어져있는것처럼여겨진다.또한나의마음과정신은나의육체에도공간에도소속되어있지않은것처럼생각된다.이럴때면나는내가이세상과아무런관련이없이존재하는것처럼,내가아무것도아닌것처럼여겨진다.
---p.45

조금씩진폐처럼내내부에쌓여전신마취와도같이나를마비시킨권태는,시작과함께완성된그권태는,그날의방공훈련에모습을나타내지않고등장한가상적기처럼기습적으로내게로온것이다.이미그때나는,이세계의한가지중요한원리로그것이권태의무론토대위에구축되어있다는사실을깨달았다.
---p.53

나는곧,존재하는모든것은그것의맹목성속에서만,맹목적인지향성속에서만존재할뿐이라는생각을했다.내가지렁이에서본것은우리의존재이유를끝까지추적해들어갔을때,그끝즈음에서발견하게되는맹목성이었다.나는소멸중인그것속에서맹목성을본질로하는존재의일반적인양식을파악한것이다.
---p.148

나는생각을했다,이세계자체가아무런이유도목적도갖지않고존재할뿐이다,라고.그것이존재의두려운진실이었다.
---p.148

무한대로증식하는권태.그무한한권태만이나의삶을부양하고있다.권태는오랜세월동안,바닷가의바위에필사적으로부딪혀그것을침식시키는,염분을함유한파도처럼나를조금씩마모시켜왔다.
---p.179

나는모든살아있는존재의저주와이미죽은가장사악한악당들의경멸을,그리고세상의모든증오를받을짓을한것이오.어쩌면나는내게그런일이일어날줄알았는지도모르오.내내부의어둠속에몸을숨기고도사리고있던악마가내존재의약한틈새로뛰쳐나온것이오.내가놀란것은나의그감추어져있던어두운부분이갑작스럽게드러난것에,숨어있던악마가끌고나온그어둠을목격했다는데있었소.
---p.216

나는눈을감고,하루의종말의시각에,도대체왜또이런하루가,기적과도같은하루가,어디로가는지도모르게지나가는지를,또한오늘알지못한그이유를내일이된다고알게될리도없다는생각을하며,끝내잠이들지못하며,몸을뒤척인다.
---p.232

나는어떤고상하지못한욕구에내가휩쓸리는것을느꼈지만,그것에저항하는대신,저항하는것을포기한채로,나를그것에맡겼다.나는,이래서는안되는데,이럴필요까지는없는데,하는생각을하며,허리를구부려땅바닥에서돌멩이하나를쥐어그의뒤통수를내리쳤다.그는끽,소리한마디하지못하고,땅바닥에뻗어버렸다.그것은내가기대하지않은어떤것이었다.
---p.221

나라는존재는시간이라는간수의손에의해어제로부터오늘로,오늘로부터내일로끝없이이감되고있는죄수일뿐이다.그것만이내가이세상에속해있을수있는방법이며,동시에,내가그것과무관하게지낼수있는유일한방식인가?이것이이세계의원리이고,그원리를수정할수있는방법은이세계에는없단말인가?아아,삶의끔찍함이여,그끔찍함마저없다면단한순간마저도살아있기힘든,끔찍한삶이여.
---p.221

내가겨우정신을차리고자리에서일어나현관으로가문을열었을때,거기에는어머니가미소를지으며서있었다.“자고있었니?왜그렇게초인종을눌렀는데도대답을하지않은거야?네가없는줄알았다.일찍오려고했는데이렇게늦었구나.”내가눈을비비고있는데그녀가말했다.나는온몸이얼어붙어,그자리에그대로서있었다.그녀는내가처음보는여자였다.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