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백서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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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801년에 순교한 황사영은 가톨릭계는 물론이고 일반 역사에서도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그가 쓴 백서, 즉 교황에게 쓴 편지 때문이다. 백서에 무슨 내용이 담겼기에 황사영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 가운데 아직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걸까? 이상훈의 소설 백서는 이 질문으로부터 구상의 실마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인 셈이다. 그렇다면 황사영의 편지 백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황사영은 백서에 1785년(정조 9) 이후의 조선교회 사정과 박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약전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에 대하여 증언한 다음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담보할 방안을 언급하였다. 그 방안이 바로 논란이 된다. 종주국인 청국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조선을 청국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그도 아니면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수만 명을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선 조정을 굴복시키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압수한 백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접한 정순황후 정권은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백서의 사본이 청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2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른바 가백서(假帛書)다. 여기에는 청국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만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우연히 입수했다. 그리하여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로마 교황에게 전달되어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광암 이벽으로부터 신앙의 세례를 받은 황사영의 깊고도 드높은 신심은 아내 정명련 마리아와 사촌처남 정하상 바로오에게 이어져, 혹독한 박해로 와해 상태에 이른 한국 천주교 부활의 밀알이 되었다. 작가는 바로 황상영백서가 지닌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통찰하여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작가는 당시 조선 정부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가백서’의 시각으로 황사영백서를 왜곡하면 안 된다는 통찰을 엄연한 사실과 역사적 배경에 기반하여 작품에 녹여냄으로써 황사영백서의 진정한 가치와 의의를 오늘에 되살린다.
저자

이상훈